우리 고장 옛 장항제련소와 마주한 후망산 아래 장암진성(長巖鎭城)은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입구에 설치되었던 수군진영성(水軍鎭營城)이였다. 장암진성의 수장은 종4품인 만호(萬戶)로 관장하도록 하였다. 장암진성은 백제시대 기벌포(伎伐浦), 고려 때 장암진(長巖鎭), 조선시대에는 서천포 장암진(舒川浦 長巖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 장암진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1.백제의 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백강전투와 고려 때 진포대첩의 승전지 신라와 당나라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 장암진에 상륙한곳이며, 백제(百濟)가 함락된 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서 출전한 왜의 수군과 나당연합군이 장항 앞바다 금강에서 최후의 해전으로 왜군이 패한 백강전투, 고려우왕6년(1380년) 8월 이곳 장암진이 있는 금강 하구에 왜구가 500여척의 선단으로 부두에 정박하고 노략질 하였다. 고려정부는 해도원수 나세(羅世)장군이 이끄는 100여척의 군사로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화포로 정박하고 있던 왜구선단 500척을 불태워 수장하고 승전의 대첩을 이룬 역사적인 곳이다. 장암진성은 고려시대에는 변방을 지키는 수(戍-변방경비대)자리였다. 장암진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중6년(1511년) 9월에 쌓기 시작하였다가 중지되었고, 중종9년(1514년)에 완성되었다. 장암이란 지명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한다. 그 후에도 일제가 강제합병하여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기 이전의 구한말 지명은 장암리(長巖里)와 항리(項里)였다. 마을 첫 글짜 하나씩 따서 1938년도 장항읍이 태어났다. 장암(長巖)이란 지명은 장항제련소 굴뚝산인 전망산(前望山)과 장암진성 뒤 후망산(後望山)이 전체가 큰 바위로 이루어졌기에 장암(長巖)이라고 하였고, 항리(項里)는 금강의 입구를 뜻하는 지형의 마을 이름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전망산과 후망산의 이름은 장암진성(長巖鎭城)이 두 산의 아래에 군사시설이 주둔하여 산위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망루역활을 하였던 산이기에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후망산에는 고려시대부터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운영되어 오다가 서천 남산의 봉수대가 설치되면서 후망산의 봉수대는 폐지되었다. 고려 말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한산8영 시(韓山八詠 詩) 중 원산수고(圓山戍鼓)에 원산(圓山-화양면사무소 뒤산)에 “봉화 날리고 수자리 북소리 울린다.”라는 것을 보아도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암진성의 석재는 후망산의 석재를 이용하여 성을 쌓았다. 재질을 보면 후망산의 바위와 같은 재질로 확인된다. 장암진성의 뒷산 후망산은 기우제도 지낸 곳이다. “용당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면 장암포구/그 위에 교목 그늘 아래 황량한 사당/동남으로 향하는 배를 신령에게 비나니/노래와 춤 분분하고 술과 고기도 듬뿍/ 몇 년 전부터 꽤나 심한 풍우의 재해/사람이 불성실해 신령이 복을 안 주는지/ 내가 한가히 노닐지만 마음에 걱정되어/ 천리에 내 낀 파도 괜스레 눈에 그득/” 이와 같이 우리고장 인물 가정 이곡(李穀)선생의 가정집에는 금강을 지나는 배들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음을 알 수 있는 시(詩)가 남아있다. 2. 장암진은 고려시대 정치인들의 유배지 이곳 장암진(長巖鎭)은 바닷가의 외딴 곳에 수군진영(水軍鎭營)으로 여러 정치적인 인물들이 유배를 오기도 한곳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14년(1365년)에 신돈(辛旽)의 무고로 예성군(芮城君) 석문성(石文成)이 이곳으로 유배당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우왕2년(1376년) 가을 7월에 사헌부가 탄핵하기를, 전교부령(典校副令) 신인보(申仁甫)가 3품 직함을 거짓 칭하였고, 또한 죽은 낭장(郎將) 박동조(朴東朝)의 아내와 간통하였으니 법에 의하여 논죄를 청하여 곤장을 때리고 이곳 장암수(長巖戍)에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고려사에도 거론되지 않은 평장사(平章事) 두영철(杜英哲)이 이곳 장암진에 유배당했다고 그 일화가 1656년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헌에 반복적으로 실려 있는 점이 이채롭다. 고려시대 3명의 유배객 중에 두영철(杜英哲)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656년에 편찬한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의 기록을 보면, 서천군 만호진(舒川郡 萬戶鎭-장암진)에 고려시대 두영철(杜英哲)이 일찍이 정치적으로 이곳 장암진(長巖鎭)에 유배되었는데, 어떤 노인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유배가 풀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돌아갈 때에 노인이 말하길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대해 경계하니, 두영철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훗날 지위가 평장사(平章事-정2품)에 이르렀는데 다시 죄에 걸려 좌천되어 유배가는 길에 이곳 장암진을 지나게 되었는데 지난 장암진 유배당시 친하게 지냈던 노인이 그를 빗대어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가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소악부(小樂府)에 전해지는 장암곡(長巖曲)이다. “폴짝대는 참새야 너는 어찌하여/그물에 걸린 새끼 참새가 되었나/보라는 눈은 어데 두었나/가련타 그물에 걸린 어리석은 참새여/장암은 사람을 저버리지 않았는데/사람은 어이하여 장암을 저버렸나/----중략--- /가고 오는 길 장암이 우뚝이 내려다보니/갈 적에 명심하더니 올 적에 부끄러움뿐/ --중략 --/떠날 때 준 한마디 경계가 가볍지 않았네/참새가 파닥댄들 어찌 그물을 벗어나랴/맹호가 노리는데 결국 함정에 빠졌구나/--중략--/연자방아 나귀처럼 갔던 길을 맴 돈다네/그대는 다시 천리 먼 길을 유배 가니/--중략--/ 아첨이나 하는 소인에게 말하노니/ 장암곡 이 노래 한번 들어 보아라/” 1908년 4월30일자 대한매일신보의 장암진곡의 두영철 유배에 전해오는 기사가 있다. 두영철이가 다시 유배 길에 이곳 장암진에 들러 그 노인을 찾았으나. 노인은 바위에 걸터앉아 장암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 노인은 만나고자 하였으나 홀연 사라지고 만나지 못했다는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3. 일제강점기 장항제련소 부지 확보를 위해 장암진성 석재이용 물막이 공사 일제강점기 장항제련소를 건립하면서 부지확보를 위해 장암진성의 석축을 헐어다가 물막이 공사인 축항공사 자재로 활용하여 지금의 장암진성 앞 성곽은 사라지고 없다. 이러한 성곽석축이 헐리는 기사가 동아일보 1935년 4월 14일자에 보도되었다. 기사내용에, “백제시대부터 운영되었던 수군진영인 장암진성의 성곽이 지난 2월부터 시작되는 조선제련소 공사에 해면 매립하는 자재로 오랜 역사를 갖은 장암진성은 헐리는 중에 있다”라고 아쉬움의 기사가 보인다. 4. 장암진은 모래찜질의 풍습이 이어지고 있는 곳 장암진에 유배 온 유배객들 한가로이 지낼 때 모래찜질을 하였다는 풍습의 장소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조선시대 해동지도를 보면 장암진성과 전망산 장항제련소 바위산 사이로 배가 정박 할 수 있도록 깊숙이 들어온 해안으로 형성되었고 남쪽으로 넓은 백사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장암진의 백사장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온 장항송림리 모래찜질장소는 매립공사로 옛날은 모래사장이 없어짐에 따라 위치가 현재 사용하는 서쪽 편 바닷가로 이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전해오는 모래찜질의인 모래의 날이 음력으로 4월 29일인데, 당초의 모래찜질의 날은 한여름인 말복 전,후로 정해졌었다. 중외일보 1928년 8월 12일자 보도에, 서천군의 사욕장(砂浴場-모래찜질장)에 옛날부터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행사로 말복(末伏)을 전.후로 1일 하루에 10,000명이 운집하는데, 장항의 장암에 5,000여명, 마서면 죽산리(하소)에 4,000여명이 대부분 부녀자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모래의 날 행사가 음력 4월 29일로 언제부터 변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래의 날이 음력4월29일로 변경된 것은 10월1일로 지정되었던 군민의날을, 1966년4월29일 비인공업단지 기공식과 서천군청 새 청사 준공식의 뜻깊은 축제의 날 이였기에. 1967년3월22일자 군정자문회를 열어 4월29일을 군민의 날로 변경하게 되었다. 군민의 날 변경과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도 모래찜질로 무더위 대서(大暑)날에 삼양해수욕장에서 매년 모래찜질을 하고 있고, 일본 가고시마 이브스키 해안가에서도 뜨거운 여름철에, 두바이에서도 한 여름철 달궈진 모래를 맨발로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모래로 찜질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방자치와 민선 자치단체장 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내건 지역축제가 난무하고 있다. 지방마다 저마다의 지역관광 인프라와 지역 특산물을 앞세워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개최되고 있는 축제가 전국적으로 2,000여 개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우리 지역만 하더라도 얼핏 잡아 10여 개 이상의 축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지만, 축제장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외지 관광객들을 유치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매년 특성 없이 되풀이되는 지역축제는 이제 관광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지자체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지역축제를 개최하고 있지만, 어디를 가나 그게 그거고, 지역 특산물은 외면한 채 허가받은 야시장으로 둔갑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특히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 지자체일수록 그 폐단에 대한 지적은 높게 일고 있다. 적은 예산으로 각종 축제에 쪼개 쓰다 보니, 축제에 대한 홍보비나 운영비 충당을 위하여 지역 특산물과 관련 없는 야시장을 끌어들이고, 이름 없는 무명 가수들이 무대를 꾸미며 이제 더 이상 관광객들의 외면 속에 지자체들의 골칫거리로 변질하여 가는 것이 지역축제의 현실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어들다 보니 바가지요금이 횡행하고 온갖 부정한 상술이 판을 쳐 축제가 끝나고 나면 지자체마다 각종 민원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축제가 절정기를 이루는 5월에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다 보면 축제하지 않는 고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지자체별로 축제가 중복되어 적은 관광객들의 분산으로 제각기 아우성친다. 우리 서천군도 마량진행의 광어·도미 축제와 장항항의 꼴갑 축제 일정이 겹쳐 관광객 분산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렇다고 수년째 각종 축제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일부 의식 있는 지자체들은 지역축제의 통폐합을 거쳐 중복을 줄이고, 드론 불꽃축제 등 새로운 이벤트를 선보이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으려 자구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천군도 관광 축제를 주관하는 단체 등에서 이벤트의 다양화 등을 통하여 관광객 유치에 골몰하고는 있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그 결과가 돋보이지 못하고 있다. 민선 8기 들어, 새로운 김기웅 정부가 지역의 대표축제인 한산모시문화제의 성격을 축제에서 문화제로 바꾸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산모시짜기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지역 향토문화제로 그 성격을 바꾸려 시도하고 있다. 문화제와 축제는 엄연히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지만, 예년의 방대한 예산을 삭감하는 과정에서 반발 또한 정치적 부담으로 남겨 있다. 경제 군수를 표방한 김기웅 군수가 한산모시문화제의 지역경제 파급효과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보이며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장항 송림욕장에서 ‘맥문동 축제’를 새롭게 열기로 하였다. 김 군수는 2022년 이웃 군산에서 열린 ‘수제 맥주 축제’를 예로 들며, 젊음과 재즈가 맥문동 보랏빛 향기에 물든 새로운 지역축제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기여에 모티브를 둔 새로운 축제문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동안 지역축제마다 구태의연하게 등장했던 야시장이니 품바 공연이니 하는 이벤트를 지양하고 21세기 MZ시대에 부응하는 거리 공연과 재즈 열풍을 시원한 바닷가 송림욕장에 불어 넣으며 지역에서 생산된 수제 맥주 판매를 통하여 관광객들의 지갑을 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전문 경영인 출신의 경제 군수답게 지역축제도 투자가치와 투자승수를 계산하겠다는 전형적인 경제 논리로 지역축제를 내다보겠다는 이론이다. 물론 김 군수의 경제 논리가 새로운 맥문동 축제에서 그 효과를 발휘하여 축제가 지역경제에 부(富)를 창출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구태의연하고 진부했던 지역축제에 변화의 물결을 부어 넣으려는 시도는 바람직하다. 서천군 축제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왕 지역축제라면, 지역 특산품 홍보에 주력하려는 노력이 미진하다는 점이다. 한산모시문화제나 각종 해안가 수산물 축제장에 서천군의 주력 지역 특산품인 서래야 쌀과 서천 김 한산소곡주의 전문 홍보부스가 부족한 점이 안타깝다. 기왕에 어렵게 유치한 외지 관광객들에게 이 기회에 지역 특산품을 홍보하여 지역 농·수산물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려는 서천군의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주꾸미, 광어·도미, 꼴갑, 전어 축제 등 다른 지자체에서도 똑같이 따라 하는 지역축제에서 이제는 성공을 기대하기 힘들다.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관광객들은 기대하고 있다. 시대는 변화를 요구한다. 오늘도 끊임없이 지역축제는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지역축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의 구태의연했던 야시장과 품바로 의존하려는 안일함을 버리고, 새롭게 관광객을 유혹할 수 있는 변화의 물결에 합류해야 한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장동혁 의원(국민의힘/보령·서천)이 보령시와 서천군의 내년도 현안 사업 예산확보를 위해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장 의원은 지난 22일 세종시 정부청사를 방문해 부처 장·차관 등을 만나 지역 숙원사업들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내년도 정부예산 반영을 요청했다.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의 면담에서는 지역 기업과 소상공인 지원대책을 논의하고, ‘보령 지식산업센터’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보령센터’건립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어명소 국토교통부 2차관과는 ‘국도 21호 2공구와 국지도 68호선’과 같은 신규 도로 사업들을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 기본계획’에 반영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서천군이 ‘항공보안장비시험인증센터’와 함께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항공안전보안산업 지원센터 건립’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환경부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금한승 기후탄소정책실장에게 ‘녹생융합클러 조성 기본계획’에 ‘바이오가스’ 분야 확대 필요성을 전달하고, 신진수 물관리정책실장을 만나서는 ‘웅천천의 국가하천 승격’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밖에도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정책국장과는 ‘농촌협약’ 등 지역 농업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당부했다. 장동혁 의원은 “정부 장·차관은 물론 해당 실무자까지 만나 지역 현안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예산 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했다”라며 “앞으로도 수시로 정부 관계자들과 직접 소통해서 정부예산 확보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날 방문에는 김동일 보령시장과 김성관 서천부군수가 동행해 힘을 보탰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김윤태 대한노인회 충남 서천군지회장이 ‘노인복지조례 일부개정안’을 놓고 서로 힘겨루기하는 서천군과 서천군의회를 겨냥해 서천 노인인구 약 2만여 명을 대표해 일침을 가했다. 김 지회장은 지난 16일 ‘노인회의 역할과 노인보다 어른이 돼야 하는 이유’라는 입장문을 통해 “어찌 노인이 선진문화를 견학하는 것이 사회에 보탬이 되지 않고 예산의 낭비로만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서천군 인구의 39.5% 약 2만여 명의 노인들에 대한 복지정책이 무엇이고 무엇이 있나? 묻고 싶다”라며 “서천군과 서천군의회는 2만여 명의 노인들에게 답변해주길 간곡히 요청한다”라고 촉구했다. 그는 “그동안 정부나 지자체는 청소년, 사회단체별로 다양한 영역에서 선진지 견학을 통하여 선진문화를 견학하고 각 분야 삶의 풍요로움을 만들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서천군 역시 초등생 국제 우호 도시 문화탐방이나, 중학생 나라 사랑 역사 탐방 해외캠프, 참전유공자 해외 전적지 순례 등 많은 사례가 있다”라며 “넓은 세상을 바라보도록 어른들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 지회장은 노인을 존경하고 받드는 사람이 많아야 사회가 성숙해진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는 “누구나 부모가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면서 성년이 되고 결혼하여 부모가 되어 또다시 나의 부모와 같은 삶의 과정을 살아간다”라며 “세월이 각박해지고 어려울수록 노인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성숙해지고 살맛 나는 사회가 된다”라고 당부했다. 이어 “젊은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욕망과 행동을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을 길러야 한다”라며 “그것은 고대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때부터 저 멀리 동양의 공자 이전부터 강조되어 온 불변의 진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노인이든 젊은이든 절제의 미덕을 배우고 실천할 때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성장하고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 지회장은 노인복지조례 일부개정안의 주요 골자인 해외 문화역사 탐방에 대한 당위성도 주장했다. 그는 “서천군 지방재정자립도가 충남도 내 최하위인 것을 우리 노인들이 왜 모르겠냐?”라며 “이에 따라 해외 문화역사 탐방 시 자부담 20%를 처음부터 서천군에 제시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현 노인회관에 2019년 2월 15일 입주하면서 옛 노인회관 토지, 건물을 서천군에 기부채납(3억 원 상당)을 하였고, 행정자치부의 특별교부세(2억 원)를 받아 현 노인회관 4층 회의실(75평)을 증축하는 데 보탬을 주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2만여 명의 노인들 복지향상과 각종 건강 프로그램 운영, 공동취사, 독거노인 관리, 노인 일자리 1,227명 관리, 노인대학·무료 급식소·행복경로당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한, 김 지회장은 노인이 많은 사회보다 어른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하며 더 많이 배우려 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인이 많으면 사회가 병약해 지지만 어른이 많으면 사회가 윤택해지게 된다”라며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발효되는 음식이 있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노인이 되는 사람과 지혜를 가진 어른이 되는 사람도 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노인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현재에 머무르지만, 어른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배우려 하는 사람”이라며 “이에 세계적인 장수국가이고 노인회 조직도 우리나라 경로당과 유사한 점이 많고 비용이 저렴해 해외 문화역사 탐방 국가를 일본으로 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서천군의회 제311회 제1차 정례회기 중 지난 16일 열린 의안심사특별위원회에서 ‘서천군노인복지조례 일부개정안’이 보류함에 따라 오는 22일 정례회 안건 상정에 따른 의결에 귀추가 주목된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의회 현역 의원이 중징계를 받는 등 군의회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군의회는 지난 16일 윤리특별위원회를 열고 이지혜 의원에 대해 20일 출석정지·공개 사과 등 중징계를 결정했다. 이날 비공개로 열린 윤리특별위원회에는 위원 5명이 참석한 가운데 의회 사무과 직원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이뤄졌으며 약 3시간 회의 끝에 참석 위원 5명 중 3명이 최종 중징계 결정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군의회는 징계 대상자인 이 의원을 제외한 6명의 전원이 공직자 갑질 논란 등 5개 항목의 징계사유를 들어 A4 용지 36쪽 분량의 방대한 징계요구서를 윤리특별위원회에 제출해 심사를 요구했다. 이에 윤리특별위원회는 징계 심사 전 지난 12일 윤리심사자문위원회의 회의를 통해 이 의원에 대한 출석정지 20일과 공식경고 의견을 전달받았으나 이날 한 단계 위인 20일 출석정지·공개 사과를 의결했다. 이지혜 의원의 징계사유 5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군의회 사무과 직원 및 군청 직원에게 지속적인 갑질 및 강압적인 행동에 의한 의원 품위유지 위반이며 두 번째로 언론에 제공한 입장문 및 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작성한 게시글 등에 의한 군의회 위상 실추이다. 세 번째로 군 보건소와의 이해당사자로부터 지속적인 교통편의를 받고 보건소 계약업무에 관여하는 등 의원 청렴의무 위반이며 네 번째로 관내 S 병원을 불시에 방문해 병원 측의 허가 없이 응급실, 장례식장, 기타 병원 내부 등을 임의로 불법 촬영하는 등 권한 남용이다. 다섯 번째로 군청 사회복지실에 개인정보가 포함된 원본 자료의 제출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이에 대해 개인정보보호 등의 이유에 의해 곤란하다는 집행부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인 요구를 하는 등 신분과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영향력 행사이다. 이와 관련 이 의원은 이날 징계 결정에 앞서 참석한 자리에서 징계요구서에 관한 내용에 대해 소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이 의원이 본인이 선임한 변호사를 함께 소명하는 자리에 참석하려다 의회 사무과 직원들의 변호사 입장을 제지하는 등 한때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번 징계 결정에 이지혜 의원은 법률 검토 후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 의원과 법률대리인인 김성진 변호사는 sbn서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절차상 하자를 들어 본회의에서 징계 의결 확정 후, 곧바로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하여 사법적 판단을 구하겠다”라고 밝혔다. 또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중 제척사유에 해당하는 의원이 위원으로 참석한 점과 위원회의 일방적인 주장에 대해 충분한 조사나 증빙 없이 징계를 결정하였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36쪽이나 되는 방대한 징계사유서에 대해 징계 대상자에게 충분한 소명의 시간과 기회를 부여해야 함에도 불구 소명의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지 않는 등 절차상 하자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윤리특별위원회 속에서도 징계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견해도 나왔다. 윤리특별위원회에 징계 심사에 참석했던 A 위원은 sbn서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위원회가 마치 무엇에 쫓기는 모습처럼 촌각을 다투듯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표결까지 단행한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의원에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쌍방의 상반된 주장을 자세히 검토해 사실관계를 밝히고, 징계 심사 대상자에게도 충분한 해명 기회를 부여했어야 한다”라고 전했다. 한편 서천군의회의 징계 의결을 두고 이지혜 의원이 징계 의결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할 것으로 보여 법정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서천군노인회는 1954년 3월 1일 창립되었고 현재 14개 읍·면 분회 331개 마을경로당과 1만 3,000여 명의 회원으로 조직됐다. (2023. 3. 10. 현재 노인인구 1만 9,674명 39.5%) 서천군노인회 회원은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 전후 1935년~1955년에 태어난 회원들이 대부분이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이다. 우리 세대는 농경시대, 산업화 시대,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이 있었다면 현재는 각 마을경로당의 노인회장들이 2만여 명의 노인들 복지향상과 각종 건강 프로그램 운영, 공동취사, 독거노인 관리, 노인 일자리 1,227명 관리, 노인대학 운영, 무료 급식소 운영, 행복경로당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천군노인회에서 해외 문화역사 탐방계획을 세운 것은 외국의 경로당 운영 및 장수 노인들 일상생활 현황 및 다양한 체험을 하고자 함에 있다. 대상 국가는 가까운 일본이 세계적인 장수국가이고 노인회 조직도 우리 경로당과 유사한 점이 많고 비용이 저렴하여 선택했고 자부담 20%는 처음부터 관계기관에 제시했다. 지방재정자립도가 충남도 내 최하위인 것을 왜 모르겠나? 그래서 현 노인회관에 2019년 2월 15일 입주하면서 옛 노인회관 토지, 건물을 서천군 노인회 이사회 결의에서 서천군에 기부채납(3억 원 상당)을 하였고, 행정자치부의 특별교부세(2억 원)를 받아 현 노인회관 4층 회의실(75평)을 증축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5월은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다. 또한 5월은 청소년의 달,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언행반치(言行反致). 즉, 입으로 말하고 행동은 반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어른을 영어로 adult(완전히 믿을 만한 사람)로 번역하지만, 우리말에 있어서 어른은 영어로 번역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어른에 대한 사전적 의미로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나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어른은 단순히 나이가 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른에게 주어진 책임과 도리가 우선되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어른은 어른다워야 어른으로서의 대접받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어른은 나이가 많으면서 그 나이에 맞는 덕을 갖추고 덕을 베풀 줄 알며 사리 판단이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이며 욕심에 좌우되지 않는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동안 앞서간 어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왔던 것 같다. ◇노인이 많은 사회보다 어른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노인이 많으면 사회가 병약해 지지만 어른이 많으면 사회가 윤택해지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발효되는 음식이 있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노인이 되는 사람과 지혜를 가진 어른이 되는 사람도 있다. 노인은 나이를 헛되이 날려버리는 사람이지만, 어른은 세월이 지날수록 성숙해지고 지혜로움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노인은 외적인 머리만 커지는 사람인 반면에 어른은 지혜로운 마음이 커지는 사람이다. ◇더 많이 배우려 하는 어른이 되어야 노인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현재에 머무르지만, 어른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배우려 하는 사람이다. 또한, 배우지 않는 노인은 노력도 하지 않고 부족한 것을 채우려만 하는 사람인 반면 어른은 넉넉하지만, 더 많이 채우려고 노력하며 넘치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비우게 되면 또 채우려 하는 사람이다. 노인은 자신을 밟으면 참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을 하지만은 어른은 자기를 딛고 올라서라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다. 노인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만, 어른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며 즐거워한다. ◇노인을 존경하고 받드는 사람이 많아야 사회가 성숙해진다. 세월이 각박해지고 어려울수록 노인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성숙해지고 살맛 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누구나 부모가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면서 성년이 되고 결혼하여 부모가 되어 또다시 나의 부모와 같은 삶의 과정을 살아가게 된다. 젊은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어른이 어른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욕망과 행동을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을 길러야 한다. 그것은 고대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때부터 저 멀리 동양의 공자 이전부터 강조되어 온 불변의 진리는 어른의 섬김이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절제의 미덕을 배우고 실천할 때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성장하고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넓은 세상을 바라보도록 어른들께 기회를 제공해야 그동안 정부나 지자체는 청소년, 사회단체별로 다양한 영역에서 선진지 견학을 통하여 선진문화를 견학하고 각 분야 삶의 풍요로움을 만들어 오고 있다. 어찌 노인 어르신만이 선진문화를 견학하는 것이 사회에 보탬이 되지 않고 예산의 낭비로만 단편적인 생각을 하여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이해할 수가 없다. 초등생 국제 우호 도시 문화탐방이나, 중학생 나라 사랑 역사 탐방 해외캠프, 참전유공자 해외 전적지 순례 등 많은 사례가 있다. 끝으로 서천군 인구의 39.5% 약 2만여 명의 노인들에 대한 복지정책이 무엇이고 무엇이 있나? 묻고 싶다. 서천군과 서천군의회는 2만여 명의 노인들에게 답변해주길 간곡히 요청한다. 작금의 어르신들에 대해 베풀고 이해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 마지막 삶의 기회를 배려해주실 것으로 기대해 본다.
네 분의 대통령 집권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로 그분들의 공사를 가까이서 봐왔고, 기사로 옮겼던 터라, 알려지지 않은 일이 적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1971년 10억 달러 수출을 기적으로 여겼다. 당시 야당은 바닥까지 다 긁어다 판다며 박 전 대통령의 10억 달러 수출을 맹비난했다. 그럴 즈음, 중동에서 손짓했다. 사우디, 리비아 등에서 한국 건설회사를 불렀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국내 건설사의 중동진출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사흘 뒤 두 장관은 차례로 독대하며 박 전 대통령에게 ‘중동진출 불가함’을 설명했다. 이유는 중동은 열사의 나라로 모래뿐이고, 모레 위에 튼튼한 건물을 짓기가 어려운데다 한낮 온도가 섭씨 60도까지 올라가 낮 노동이 쉽지 않다고 보고했다. 그런 박 전 대통령은 ‘경제를 키워 국민을 배불리 먹이자’라고 약속했던 정주영 전 현대건설 회장을 불러 이를 물었다. 정 전 회장은 다른 의견을 냈다. “각하, 이런 좋은 찬스가 어딨습니까. 사방이 모레라서 모레 걱정은 안 해도 되고, 한국 인부들이 막걸리를 달라고 할 테지만 이슬람국가라서 술을 마실 수 없어서 좋고요. 밤에는 선선해서 좋으니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됩니다.” 박 전 대통령은 ‘중동진출’을 결정했고, 싼값에 석유를 들여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뿐만 아니다. IMF 외환 금융위기라는 숙명적 사명을 갖고 취임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필자의 소속사였던 <대전일보>의 금 모으기 캠페인을 높이 평가해온 김 전 대통령은 5대 재벌 회장들과 오찬 회동을 자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5대 총수들에게 앞으로 IMF 관련, 우리나라 경제가 나아갈 길에 대해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재벌총수 모두 훌륭하고, 국익과 관련한 나름대로 진단과 계획을 내놨다. 마지막 발언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남달랐다. “대통령님, 지금까지 김 대통령님과 정부가 잘 도와주셔서 IT·반도체 등이 기반을 다져 앞으로 25년?, 한 30년? 은 먹고 살게 됐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먹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경제는 위험합니다. 그러니 대통령님께서 과학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과학기술로 먹고살아야 합니다.” 좋다, 싫다 내색하지 않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회동 끝나자마자 김 전 대통령은 “당장 내일 아침 8시에 총리를 비롯해 전 장관, 과기부 장관과 과학기술 단체대표 등을 오시라고 해서 ‘과학기술의 R&D 정책회의’를 갖자”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과 이건희 전 회장 역시 훌륭한 리더십을 보였다.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주년이 된다. 여러 가지 잘잘못을 놓고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과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평가가 극과 극이지만, 어쨌든 아쉬움이 큰 1년이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경제침체가 길게 이어진 상황에서 국내 정치와 외교면, 심지어 이태원 참사까지 적잖은 문제로 국론이 나뉘어있는 게 현실이다. 북핵 위협 속에 국내 정치마저 크게 흔들려 여야가 극단적 대결, 그리고 윤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인사들의 잇따른 설화(舌話)까지 빈발해 지지율마저 저조한 현실이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고, 국민을 위해 협치하겠다는 약속을 허언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가가 폭등하고 민생은 팍팍해 더 나은 삶을 기대하던 사람들의 비난도 더 많아졌다. 국가 혈세를 아껴야 한다고 말만 떠들었지, 33조 원대의 적자에 있는 어느 공기업은 직원을 더 뽑고, 또는 승진시켜 다른 부처 연구소로 파견하고, 임금을 30%나 올려도 정부는 질책이 없다. 검사들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끌고 가는 정권으로 각인된 지도 오래다. 인명 경시, 패륜, 마약, 재난이 들끓는 윤 정부시대, 어디까지 희망가를 부를 것인가. 여야 구분 없이 머리를 맞대는 것을 포기한 듯한데, 여당 내에서도 갈리고 분열된 상태에서 나라 꼴, 윤석열 정부는 몇 점짜리일까.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갑자사화 때 우리 고장의 인물 중에 수난을 많이 당한 한산이씨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서천군) 화양면 추동리(사성골)과 표동에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목숨을 걸고 직언하여 화를 입은 대사간(大司諫) 이윤번(李允蕃 1460∽1538)의 묘와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막내아들 양경공 이종선(李鍾善 1368∽1438)의 두 번째 부인 안동 권씨(양촌 권근 딸) 묘가 자리하고 있고,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경내에는 양경공 이종선 묘가 자리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갑자사화로 인하여 수난을 당한 한산이씨 인물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목숨 걸고 직언한 대사간 이윤번 추동리(사성골)에 연산군의 폭정에 목숨을 걸고 직언한 대사간 이윤번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윤번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으로 목은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고손자이다. 성종 11년(1480년) 진사시(進士試)-사마시(司馬試)와 성종 23년 (1492년)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연산군 때 사간원 정언(正言-사간원 정6품직)을 거쳐 중종 16년(1521년) 대사간(大司諫-정3품직 국왕에 대한 잘못된 것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관료)을 지냈다. 공(公)이 1504년 정언으로 있을 때 연산군 생모(生母) 폐비 윤씨(尹氏)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에 대한 학살 등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윤번은 국왕의 잘못된 일에 대하여 직언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5월 3일 왕조실록을 보면, 정언 이윤번이 어머니를 뵙고 돌아와서, 공신들의 외람된 관작에 대하여 잘못을 논하니 연산군이 비답하기를, “대간과 홍문관이 여러 번 건의를 올렸어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갑자기 한 사람이 하는 간쟁을 듣겠는가? 이 말은 늦었다” 하였다. 그러나 또 공이 아뢰길, “진실로 들을 만한 말이라면 천(賤)한 사람의 말일지라도 반드시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소신의 사사로움이 아니요, 곧 국가의 공론이오니 이 말을 늦었다 하지 마시고 빨리 명(命)을 거두소서” 하니 어찰로 비답하기를, “대간은 모두 공론을 주장하는 것이니 어찌 사적인 말이 있으랴. 지금 아뢰는 것은 명분은 공론이기는 하나 실로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 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날 4일 공이 또한 아뢰길, “지난번 어찰에 대간은 공론을 주장한다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대간의 말이 이미 공론임을 아시면서도 개정(改正)하지 않으시니 아마 받아주실 뜻이 없는 듯합니다.”하니 국왕인 연산군도 물러서지 않았다. “옛날 중국 주나라 성왕(成王)은 어린 임금이었지만, 동생하고 놀면서 장난삼아 동생을 오동잎을 잘라, 진(晉)에 봉하겠다고 한 것을 두고도 국왕이 한 말이라 실천하게 되었다. 이러할진대, 지금 만일 도로 그 자급을 거둔다면 신하로써 어찌 임금을 믿는 자가 있겠는가?” 하니 공은 다시 아뢰길, “옛날 당나라 태종(太宗)은 지난 어진 국왕들이 한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서슴치 않고 고쳤습니다. 신(臣)은 전하를 요순(堯舜) 이상의 국왕으로 바라는데, 전하께서는 당태종(唐太宗) 이하로 자처하시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옛날 탕왕(湯王)이 걸(桀)을 치며 이르기를, 너는 불신함이 없어라 짐은 식언하지 않으리라 하였으니 어진 임금은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대간의 의사를 보건대, 마치 처음에는 꼬리를 얻으려 하다가, 꼬리를 얻으면 또 머리를 얻으려는 것과 같다. 지금 만일 개정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다 고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허락하지 않는다”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공신의 가자(加資-품계를 올려줌)에 관하여 논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대사간에 복직을 명하였는데, 다시 사직하였다. 연산군 10년 (1504년) 4월 28일자 왕조실록을 보면, --중략 — 임사홍(任士洪) 등이 의논하길, “이윤번, 곽종범 등이 궁중의 일을 지레짐작하고 입에서 들어내었으니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님이다. 지금 풍속을 개혁하는 때이니, 중한 법으로 다스려 다른 사람들을 경계시켜야 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무릇 국가의 일은 입이 있다 해서 다 말해서는 안 되고, 언관(言官)만이 말하며 언관이라 해도 또한 안 하며 모두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정사에 관한 일이라면 의당 말해야 하지만, 궁중의 일 같은 것은 어찌 지레 짐작하고 말할 하는 것인가?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윗사람을 믿지 않고 그 하는 일을 의심하여 엿보아 말을 한다면, 위에서도 아래를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징(申澄)과 곽종번(郭宗蕃)은 참수(斬首-목을 베다) 하고 이윤번 등 간관(諫官)은 처벌하지 않았으나 계속 간언하니, 연산군 10년 (1504년) 5월 7일 의금부로 하여금 이윤번을 잡아들여 신징처럼 즉일로 참수하는 형벌로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승정원이 아뢰길 신징은 죄를 자복한 뒤에 처벌하였는데 지금 이윤번은 국문하지 않고 극형으로 하리까? 하니, 우선 도로 가두게 하고, “죄가 신징과 같은 가를 알아보고 보고 하라” 하였다. 또한 연좌 죄를 적용 이윤번의 아들은 장(杖) 80대를 맞고 먼 지방에 노비(奴婢)로 보냈다. 그리고 2년 후 연산군 12년(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고 신원되어, 중종 16년 (1521년) 6월 6일 공은 대사간으로 제수되었다. 공의 딸은 안동권씨 권겹(安東權氏 權韐)에게 출가하여 외손자 권전(權佺)을 낳았고 권전은 지족당 권양(權讓)을, 권양은 수초당 권변(權忭)과 제월제 권성을 낳아 명문가의 집안이 되었다. 이렇듯 이윤번은 국왕의 정사에 잘못된 것을 목숨을 걸고 직언을 다 하였으니 언관(言官) 중의 언관이었다. 2. 갑자사화로 실전된 이종선과 부인 안동권씨 묘 양경공 이종선의 묘는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경내 목은 이색 묘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이종선의 첫째 부인은 찬성사 권균(1464 ~1526)의 딸로 아들 이계주(李季疇)를 낳고 일찍 죽었고, 이계주는 사육신 이개(李塏)의 부친이다. 두 번째 부인은 찬성사 權鈞(권균)의 7촌 간인 양촌 권근(權根 1352~1409)의 큰딸로 4남 2녀를 낳고 1456년에 죽었다. 화양면 추동리(표동)의 묘소가 바로 둘째 부인 ‘안동권씨’이다. 이종선의 묘와 둘째 부인 안동권씨의 묘소는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공의 손자 이파(李坡 1434~1486년)가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 속의 시신을 꺼내 목 자름)의 형벌을 받을 때 연좌제에 해당되어 봉분을 파헤쳐 평평하게 만들어 버렸고, 오랫동안 봉분을 쌓지 못하고 있었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공의 손자 이파가 예조판서로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이 즉위하여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당시의 재상과 언관들에게 죄를 물을 때 이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죄를 물을 수 없었으나, 연산군은 죽은 사람의 무덤의 시신을 꺼내 분풀이로 한명회, 정창손, 이파 등 122명을 부관참시하였고 처형과 귀양의 형벌을 받은 자가 239명에 이른다. 이 사건이 바로 甲子士禍(갑자사화)다. 양경공도 연좌제에 해당되어 형벌로 봉분이 제거되었는데, 반정으로 중종(中宗)이 즉위하였어도 오랫동안 봉분을 회복하지 못했다. 공의 후손인 죽천 이덕형(李德泂)이 지은 죽창한화(竹窓閑話)의 기록을 보면, 어성 신담(申湛 1519~1595)의 외손자인 죽천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고조부인 이유청(李惟淸 1459~1531)이 꿈속에 양경공이 나타나 말하길, “내 집이 헐어진지 이미 오래되어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공만이 내 집을 지어줄만하니 공은 잊지 말도록 하라”는 현몽이 있어 꿈이 하도 괴이해서 양경공의 종손인 이질(李秩)에게 말하니, “양경공은 이파(李坡)의 조부이기 때문에 연산군의 갑자사화로 인하여 함께 묘 봉분이 헐리게 되었으며 자손이 미약하고 묘소가 한산에 있기에 아직 고치지 못하였기에 현몽하게 된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유청은 태종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의 외손자이다. 의정공 이유청은 “이런 일로 보면 사람의 정백(精魄-죽은 혼백)이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과 또한 무덤은 죽은 사람의 집이 되는 것이 분명하니 자손 된 자는 먼 조상이라는 이유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요 무너진 무덤은 고쳐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1528년(양경공 사후 90년경) 친자식들을 보내어 봉분을 다시 쌓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양경공 부인 안동권씨의 묘 봉분은 다시 쌓지 않아 오랜 세월이 흘러 실존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이파(李坡)의 사위인 어성 신담(申湛)은 부친 신영원(申永源)의 묘소로 점지해둔 곳에 치표하기 위해 터를 파는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안동권씨의 지석을 발견하게 되어 실전되었던 안동권씨의 묘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어성 신담의 부친 신영원 묘소의 치표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안동권씨의 묘소는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성 신담의 부친 신영원은 한산이씨 이윤수(李允秀)의 사위이기도 하다. 안동권씨 지석 발견으로 신영원의 묘는 서쪽편 언덕으로 변경되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김경제 서천군의회 의장이 최근 발생한 군의회 관련 사태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했다. 김 의장은 지난 15일 군의회 제311회 제1차 정례회 개회사를 통해 “최근 군의회에서 발생한 일로 군민께 실망을 주고, 많은 질타를 받는 점 등에 대해 깊이 사죄드린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는 군의회 이지혜 의원의 갑질 논란 등 전반적인 의정 활동의 문제점에 대한 군의회 차원의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면서 김 의장은 군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 방안도 제시했다. 그는 “‘서천군의회 의원과 공무원 등의 갑질 행위 근절과 피해자 보호에 관한 조례안’ 마련을 통해 갑질 방지와 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올해 1차 추가경정예산 심사와 행정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의장은 “이번 정례회는 2023년도 1회 추가경정예산 심사와 더불어 행정사무 감사까지 시행하는 중요한 회기인 만큼 빈틈없이 직무에 임해달라”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군의회 의원과 집행부 공직자들은 이번 정례회 기간 중 심사되는 사항이 군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사항임을 명심하고, 내실 있는 정례회가 될 수 있도록 해 달라”라고 당부했다. 한편, 6월 2일까지 총 19일의 일정으로 제311회 제1차 정례회 기간 서천군노인복지조례 개정안 등 27개 조례안건 심의와 올해 1회 추가경정예산안 심의, 행정사무 감사 등이 이뤄진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장동혁 의원(국민의힘/서천·보령 지역구)은 지난 15일 국립생태원이 서천을 널리 알리는 창구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장 의원 이날 생태원을 방문해 조도순 생태원장과 간담회 자리에서 “생태원에 ‘서천’지명을 나란히 적어 서천군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달라”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생태원의 서천지역 상생협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라며 “다양한 상생협력 사업을 발굴하는 등 지속 가능한 협력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천 지역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정책 발굴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약속했다. 또한, 장 의원은 생태원의 에코리움과 국제적 멸종위기 동물 보호시설(CITES) 등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국가 생태 주요시설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국립생태원은 개원 10주년을 기념해 오는 10월 28~29일 관람객 1만 1,250명에게 서천사랑상품권을 선착순으로 지급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이지혜 서천군의회 의원의 의정활동을 두고 갑질이니 정상적 의정활동이니 하는 다툼이 지속되는 가운데 김경제 군의회 의장의 리더십 부재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이지혜 의원이 지난 4일 검찰에 의회 사무과 A 팀장을 포함한 성명 불상자 등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고소했다. 여기에 이 의원은 같은 날 군청 집행부 B 간부를 공문서위조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해 이에 따른 법정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군의회는 지난 8일 임시회 본회의를 열고 이지혜 의원 징계 요구에 대해 윤리특별심사위원회 회부 절차에 돌입했다. 이 과정 이지혜 의원은 한 언론사 기자들을 대동해 본회의장에서 취재하려다 의회 사무과 직원들의 제지를 당하는 등의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날 군의회는 지난 10일 윤리특별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2일 윤리특별심사위원회 자문위원회를 통해 징계수위 권고를 결정했다. 이어 이지혜 의원의 징계안은 오는 15일부터 개회되는 제1차 정례회 기간중 윤리특별심사위원회 회부로 심사가 이뤄지며 오는 18일 최종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의원의 윤리위 회부는 의사과 직원들의 갑질 주장과 함께 C 병원을 불시에 찾아가 응급실, 입원실 등 무단으로 촬영하는 행위로 군의회 위상을 떨어뜨린 것이 주요 쟁점으로 보인다. 반면 이지혜 의원은 sbn서해신문과의 반론 보도 인터뷰를 자청한 자리에서 “갑질이 아닌 정상적인 의정활동이었다”라며 당위성을 강조하는 등 관련 공무원들을 검찰에 고소·고발했다. 또한, 군청 자유게시판을 통해 C 병원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반박하는 등 군의회 의원으로써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 의원은 군의회가 반듯해지려면 우선 의회 사무과부터 투명성이 보장돼야 한다며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의 업무추진비와 의회 사무과 운영비 사용 등이 구린내가 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초심을 잃지 않고 의정활동에 임하고 있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군의회의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군민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역의 한 군민은 “군민을 대변해 군청 행정부를 관리·감독하라고 뽑아줬더니 제 밥그릇들 챙기느라 군민의 대변자는 물론 의장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지혜 의원의 소신이 맞는다면 이를 의장이 나서서 해결하는 등 물리적으로 의회 사무과 직원들과 의원들 간의 마찰을 해소, 작금의 이런 사태까지 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꼬집었다. 여기에 같은 당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도 이 의원과 손절에 나서고 있다. 같은 당의 한 의원은 sbn서해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 의원의 의정활동에 의욕이 넘치는 부분은 일정부분 인정하지만, 그간 보여준 이 의원의 의정활동은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원로 정치인들까지 군의회의 수장인 의장의 리더쉽에 대해 아쉬운 입장을 보였다. 군의회 의장을 지낸 한 정치인은 “이번 이지혜 의원의 사태는 군의회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며 “수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지속해서 발생하는 이런 사태를 지켜보는 군민에게 부끄럽기만 하다”라고 고백했다. 또 한 원로 정치인은 “일련의 이런 사태로 확대되기 전에 군의회 의장이 지도력을 발휘해 사전에 수습하는 강력한 지도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를 방관한 것 같은 의장의 리더쉽이 아쉽다”라고 전했다. 한편 서천군의회 윤리특별심사위원회에 부쳐진 이지혜 의원의 징계 결정에 군의회와 이지혜 의원 간의 법정 공방이 예상돼 앞으로도 군의회 의원들의 의정활동이 순탄하지 않으리라고 일각에서는 우려하고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내 어르신 해외 탐방 조례 일부 개정안을 두고 일각의 선심성이라는 주장과 언론보도에 대해 김기웅 군수가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유감을 표했다. 김 군수는 지난 10일 sbn서해신문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지역의 어르신을 위한 진정성을 표퓰리즘이라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왜곡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는 매년 관내 65세 이상 노인들 90명을 선발해 해외 문화탐방을 지원해주는 노인 복지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안을 두고 이를 반대하는 일부 군의회 의원들과 일부 언론들의 표퓰리즘 지적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 군에 따르면 ‘서천군 노인 복지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안’은 노인 국내외 선진문화 탐방사업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군은 지난달 20일까지 조례 일부개정 입법예고를 마치고 조례 규칙 심의회를 거쳐 서천군의회 제1차 정례회에 안건을 제출했다. 김 군수는 이와 관련해 “지역 어르신들이 국내외 문화탐방에 대한 높은 욕구에도 불구하고 관광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해 해소 차원으로 마련한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65세 이상 어르신 인구가 충남에서 가장 높은 인구 비율을 갖고 있어 어르신 맞춤형 복지 시책으로 노인 복지 문화와 장수 문화가 우리 군보다 발달한 선진국(일본)을 탐방하게 하는 것이 어찌 무분별한 선심성 복지라 할 수 있냐”라고 반박했다. 이어 “이 사업은 내년 총선을 대비한 급조한 사업이 아닌 민선 6~7기부터 군민을 대상으로 선진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지속해서 추진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2017~2019년 3년에 걸쳐 참전유공자 해외 전적지 순례 행사, 2019년 초등학생 국제 우호 도시 문화탐방, 2019년 중학생 나라 사랑 역사 탐방 해외캠프 등 약 3억 2,000만 원의 군비를 들여 사업을 추진한 사례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한노인회 서천군지회의 특혜 우려에 대해 김 군수는 “보조금 지원 방식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대상자 선정할 것”이라며 일축했다. 군의 열악한 재정 건전성을 고려한 김 군수의 결단도 돋보였다. 이는 지난해 김 군수가 타 지자체처럼 보조금 지원에 대해 형평성을 맞춰 달라는 새마을지도자 수당이나 대한노인회 서천군지회 경로당 회장들의 활동 수당 조례제정 요청에 부정적 견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 군수는 “재선에 따른 선심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난해 경로당 노인회장의 활동 수당과 새마을지도자 수당 지원을 배제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며 반문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을 위한 순수한 의도를 정치적 시각으로 판단해 진정성을 훼손하는 현실에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어 “청년정책 사업 못지않게 어르신을 위한 복지사업 추진도 필요한 것으로 올해 그동안 참전유공자 해외 탐방과 학생 대상 해외 교류 사업 추진에 이어 어르신 해외 탐방을 시행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 군수는 “지역의 어르신들이 평생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한 노고에 위로하고자 추진한 사업인데 때아닌 표퓰리즘 논란에 휘말려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서천군의회가 군민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모름지기 정치란 군민을 걱정해 주는 것이라 했거늘 도리어 군민이 정치를 걱정해 주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으니 군의회에 대한 자성 촉구의 목소리가 거세질 수밖에 없다. 기초의회마저 중앙정치의 줄서기 정치에 혈안이 되어 특정 정당 출신 의원들은 지역 유력정치인의 ‘병풍’ 노릇을 하기에 바쁘고 지역 현안에 대한 협치나 화합은 오간 데 없이 따로국밥 군의회로 변질하고 있다. 군의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행정사무 감사의 당위성보다는 군의원들끼리 색안경을 끼고 앉아 반대를 위한 반대에 급급해 의원 간에 고성이 오가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군의원 간 불 협치를 조정하고 조율해야 할 의장 또한 부화뇌동하고 있어 군의회의 화합과 협치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군의원들은 군정 관리에 따른 집행부와의 간담회에서 준비 부족으로 헛발질이나 하고 있고, 모 의원은 확인되지도 않은 지인이 제공한 거짓 정보로 군의회의 품위를 훼손했다. 이렇게 군의회의 신뢰가 추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회 차원의 한마디 사과도 없이 임시회가 끝나고 뜻이 맞는 의원들끼리 자축 만찬을 했다니 가관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무색할 정도이다. 군민은 지역경제가 어렵다며 저마다 하소연들이고, 인구절벽, 청년실업 등 지역 현안들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고 있음에도 군의원들은 오로지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역할에 분주하다. 이렇듯 군의회 의석수 감소로 인해 소수 이기주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역 정가의 분석이 옳은 듯하다. 아울러 가장 중요한 군의회 의장의 리더쉽 부재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군의회 불협치의 원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급기야 군의회는 동료 의원을 징계하기 위해 윤리특별심사위원회 회부 절차에 돌입하는 상황까지 다달았다. 게다가 해당 의원이 검찰에 의회 사무과 팀장을 포함한 성명 불상자 등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고소했다. 또 같은 날 군청 집행부 간부를 공문서위조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해 이에 따른 법정 공방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군의원의 의정활동을 도와주는 의회사무과 직원을 검찰에 고소한 군의원은 과연 임기까지 의정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또한 집행부의 핵심 간부를 공문서위조 혐의 고발로 인한 향후 발생할 법정 공방의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 같은 군의회의 삐거덕거림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군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군민의 노인 복지를 위해 시급히 시행되어야 할 제도가 일부 의원들의 정치적 판단으로 조례 개정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를 두고 선심성이니 표퓰리즘이니 하면서 집행부 수장인 군수가 상정한 조례안에 대한 찬반 견해로 의원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들리고 있다. 이것이 무슨 대의정치의 장인 의회냐는 푸념 섞인 조롱의 목소리가 지역 정가에서 기초의회 무용론과 기초의회 폐지론까지 이어지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지방자치의 근간이 되는 기초의회마저 정치적 개인주의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다 보니 의회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할 리가 없어 보인다. 군의회가 협치와 화합의 길로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군의회 의장의 강력한 리더쉽 발휘가 절실할 때다. 의장이 정당을 초월해 대의 명분을 갖고 의회의 화합을 위해 중재 역할에 나서야 한다. 의원 수가 9명일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소수 이기주의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포용의 미덕을 앞세워야 한다. 선거기간 동안 군민들의 머슴이 되겠다고 목이 터지라 외친지 1년여 만에 숙였던 허리는 뻣뻣해졌다. 군정 발전보다는 개인의 자존심과 권위를 앞세우려 한다는 군민의 지적을 군의원 모두가 겸허히 받아들일 때 군의회의 협치와 화합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군의회 의장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이지혜 서천군의회 의원이 지난달 25일 군청 내부 전산망 게시판에 올린 ‘이지혜 의원의 갑질에 대한 군의회 의회사무과 직원들의 입장’이라는 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지혜 의원은 지난달 28일 sbn뉴스-서해신문 보도 관련해 반론 인터뷰를 자청한 자리에서 “갑질이 아닌 정상적인 의정활동이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사과 직원들이 주장하는 갑질 행위 부분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전체 의원이 합의한 조례안건 심의 기한을 넘기고 직원들의 전화와 문자, 메일이 무시하고 타 의원이 발의한 조례안에 대해 이 의원 본인을 설득해 보라는 주장에 대해 이 의원은 일신상의 문제로 비롯된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의사과 직원들의 주장과 달리 당시 코로나19에 감염돼 상당히 심하게 앓고 있는 상황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라며 “온몸이 아프고 정신을 놓을 정도의 몸 상태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앓고 있다가 의회 사무실에 가니 이해하기 어려운 조례안이 있어 이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 상황이었다”라고 전했다. 또 이 의원이 본인의 차가 없어 데리러 올 것과 택시 호출 등의 사적인 요구가 허다했다는 주장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의원은 “어제쯤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제 개인적인 업무로 인해 행사장을 방문했다가 다른 행사장으로 자리를 옮길 당시 의사과 직원에게 서천지역 택시 콜 전화번호를 물어본 경우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당 직원이 왜 그러시냐고 물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시 택시 콜 전화번호를 묻자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전화번호를 재차 알려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해당 직원 본인이 시간이 있다며 데리러 가겠다고 한 상황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람사르 습지 도시’ 국외 출장 동행 요구와 정책간담회 자리 참석 요구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의원은 “‘람사르 습지 도시’ 국외 출장 동행 요구는 해당 부서장과 면담에서 나온 얘기로 본인이 꼭 가고 싶다고 하자 의사과에 의원 여비가 있으며 동행할 수 있다고 해 의사과 직원에게 문의했지만, 그런 여비는 없다는 답변을 듣고 해당 부서장에게 다음 기회에 이용하겠다고 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또 “국회의원 정책간담회에 군수, 군의회 의장, 도의원 등만 참석하면 전반적 현안 파악이 어려워 간담회 참석을 부탁했고 국회의원실에서 거절했다는 의사과 직원의 답변에 본인이 직접 장동혁 의원에게 전화로 문의한 결과, 참석해도 상관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보좌관 좌석에 앉아 참석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부 의원들의 관외 출장 관련으로 한 직원이 병원에 갈 정도로 강압적 자세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이 의원은 “일부 의원들이 관외 출장을 간 것을 의사과 한 직원으로부터 알게 됐고 본인 역시 가고 싶은 곳이어서 의사과 과장에 어떻게 관외 출장이 진행됐는지 물었으며 이에 의사과 과장은 현재 일부 의원들과 관외 출장이니 복귀해서 보고하겠다는 답을 들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복귀하기까지 기다리기에 마음이 급해 의사과 해당 업무를 수행한 직원을 찾아 해당 사업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고 해당 직원은 전화 통화시 제 질문에 앵무새처럼 질문 내용을 반복적으로 확인해 답답하니 ‘네’ ‘아니오’라고 답해달하라 한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해당 직원이 병가를 낸 것도 전화가 안 돼 의사과에 방문해 알게 됐고 관외 출장 자료 요구에 제출하면 되는데 과잉 대응으로 일관하는 일련의 상황이 재밌지 않으냐고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지혜 의원은 지난 4일 검찰에 의회사무과 A팀장을 포함한 성명 불상자 등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고소장을 접수해 향후 법적 다툼에 귀추가 주목된다.
갑신정변 삼일천하의 주역 풍운아 김옥균(金玉均)이 꿈꾸었던 개혁은 수포가 되어 망명길로 끝내는 중국 타향에서 측근 홍종우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지만, 그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남편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숨어 살았다. 우리 고장 판교에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옥균(金玉均) 하면 구한말 1884년 12월 6일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당이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정세에 맞추어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수구세력과 맞서 일으킨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난 주역의 인물이다. 정변의 실패로 끝난 김옥균은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 국내에 남아 있는 그의 가족들은 역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옥사하고 부인 유 씨는 옥천에서 관비가 되었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에서 암행어사 유석에게 붙잡혀 금부에서 옥사했다.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피신하여 송병의(宋秉義 - 1997년도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 증조부)와 결혼하여 살았다. 김균 부부는 서울 경성에서 야밤에 충북 옥천군 청산면으로 피신하였고, 여동생 김균도 음독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편 송병의는 아내를 살려내고는 거짓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편 송병의는 살아남은 부인을 새색시로 둔갑시켜 장가를 들었고. 그 후 경상북도 영천군에 숨어 살다가 우리 고장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신문보도 239번지-현 237-1번지) 서당골(감동)에 정착하였다.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이 생존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40년 8월 14일 매일신보 보도로 알려졌다. 당시 김균의 나이는 87세였고. 판교리 주민들과 그간의 살아왔던 지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당시 일본 경찰이 호구조사를 갔다가 소문을 듣고 생존 사실이 보도되었다. 여동생 김균은 다음 해 1941년 1월 22일(호적기록, 당시 신문 일자 같음)에 별세하였다. 필자가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김옥균의 아들이 살아있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매일신보 1941년 2월 13일 자와 2월 14일 자 갑신정변 당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옥균의 아들이 망명하여 57년 만에 65세 나이로 고모 장례 후 49재를 치르기 위해 판교면 판교리에 찾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당시 매일신보 1941년 2월 13일 자와 2월 14일 자 보도를 보면 김옥균의 아들이 망명하여 피신하면서 살아온 그간의 생존 과정이 보도되었다. 김옥균의 아들 이름은 유금덕(劉金德)으로 성과 이름을 고쳤다. 성은 유씨(劉氏)로 김씨(金氏) 성은 이름 금덕(金德)으로 개명하게 된 것은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박해를 피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망명길에 모친 김만천(金萬千)은 아들한테 “이분 선생님을 따라가라” 하고는 곧바로 자살하였고, 아들 유금덕은 그 선생님을 따라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갔는데 그곳에서는 러시아 이름 <이봔 마르코프>로 사용하였다. 시베리아에 있을 때 알지 못하는 일본인이 “너의 아버지는 지금 일본에 계시니 나와 함께 가자”하여 머나먼 일본 북해도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대정 2년(1912년)에 유금덕으로 호적 신고(북해도 유봉군 유봉정대자 유봉자촌32번지) 하였다. 북해도에 있는 동안 부친을 만나보지 못하고 20여 년 동안 고기잡이로 생활하였다. 한때는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간신히 나무 조각을 잡고 4일간 떠다니다가 구출되어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유금덕의 호적에 북해도에서 1903년에 일본 여자 상림스에(上林未野)와 결혼하여 2남을 두었으나 부인은 1939년에, 큰아들은 1937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 후 1925년 북해도를 떠나 화태(華太-사할린)에 정착하여 살고 있으면서 몇 차례 왕래하였다. 기자의 질문에 “조선에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최근에 선친(김옥균)에 대한 생각이 나서 49재를 치르고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매년 한두 차례 3년을 두고 찾아오다가 4년째에는 조선에 살던, 아니면 사할린에 살던 결정 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 김균의 아들 송돈헌(宋敦憲-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 조부)과 함께하였다. 김옥균의 후손들이 지금도 사할린에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옥균 여동생 김균 여사가 왜 판교에서 살았을까? ◇ 판교 정착 이전의 생활 김옥균 여동생 김균 여사는 송병의와 결혼하였다. 김옥균은 1884년 12월 6일 갑신정변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지만,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연좌제로 인하여 참형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김옥균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편 송병의와 함께 충북, 경북 등 전국으로 숨어 살면서 거짓 장례도 치르고, 새색시로 둔갑시켜 새 장가를 들어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93번지로 이주하였다. 호적의 원적은 보령군으로 서천군 판교면으로 전적 하였음을 제적등본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보령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김옥균의 양아들 김영진 보령군수의 보살핌으로 보령에서 살게 되었다. ◇ 판교 정착 과정 김균 여사의 남편 송병의 사망으로 인하여 아들 송돈헌은 보령에서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로 호적을 전적하여 아들 송돈헌과 함께 살다가 1941년 1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균의 손자, 즉 송돈헌 아들 송재천(宋在天)은 옛 비인군 이방면 흥내리(현 종천면 석촌리202번지)에 사는 풍양 조씨 조용구(趙龍九)의 딸 조윤생(趙閏生)과 결혼하게 된다. 조용구는 김균 여사의 아들 송돈헌과 절친한 친구였다. 이로써 사돈이 되었다. 따라서 흥림저수지 주변 종천면 석촌리 옆 가까운 판교리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조용구는 1919∽1921년까지 당시 종천면장과 문산면장을 역임하였다. ◇ 조용구(趙龍九)의 선대 인물 조용구(1883년생) 벼슬을 하지 못했고, 부친 조동협(趙東協)은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고종 17년(1880)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고종 30년(1893)에 예조참판을 지냈다. 종천면 석촌리에는 조동협 예조참판댁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조용구의 가까운 친인척들은 문산면 문장리에 많이 살고 있으며, 김옥균 여동생 김균의 묘가 판교면 저산리에 있었는데 30년 전에 충북 옥천군 청소면 소서리 선산에 이장하였다가 2007년도 김균의 증손자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세종시 장기면에 있는 대전묘지공원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