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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여동생, 서천 판교면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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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삼일천하의 주역 풍운아 김옥균(金玉均)이 꿈꾸었던 개혁은 수포가 되어 망명길로 끝내는 중국 타향에서 측근 홍종우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지만, 그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남편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숨어 살았다. 우리 고장 판교에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옥균(金玉均) 하면 구한말 1884년 12월 6일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당이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정세에 맞추어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수구세력과 맞서 일으킨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난 주역의 인물이다.

 

정변의 실패로 끝난 김옥균은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 국내에 남아 있는 그의 가족들은 역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옥사하고 부인 유 씨는 옥천에서 관비가 되었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에서 암행어사 유석에게 붙잡혀 금부에서 옥사했다.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피신하여 송병의(宋秉義 - 1997년도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 증조부)와 결혼하여 살았다.

 

김균 부부는 서울 경성에서 야밤에 충북 옥천군 청산면으로 피신하였고, 여동생 김균도 음독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편 송병의는 아내를 살려내고는 거짓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편 송병의는 살아남은 부인을 새색시로 둔갑시켜 장가를 들었고. 그 후 경상북도 영천군에 숨어 살다가 우리 고장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신문보도 239번지-현 237-1번지) 서당골(감동)에 정착하였다.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이 생존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40년 8월 14일 매일신보 보도로 알려졌다.

 

 

당시 김균의 나이는 87세였고. 판교리 주민들과 그간의 살아왔던 지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당시 일본 경찰이 호구조사를 갔다가 소문을 듣고 생존 사실이 보도되었다.

 

여동생 김균은 다음 해 1941년 1월 22일(호적기록, 당시 신문 일자 같음)에 별세하였다.

 

필자가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김옥균의 아들이 살아있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매일신보 1941년 2월 13일 자와 2월 14일 자 갑신정변 당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옥균의 아들이 망명하여 57년 만에 65세 나이로 고모 장례 후 49재를 치르기 위해 판교면 판교리에 찾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당시 매일신보 1941년 2월 13일 자와 2월 14일 자 보도를 보면 김옥균의 아들이 망명하여 피신하면서 살아온 그간의 생존 과정이 보도되었다.

 

김옥균의 아들 이름은 유금덕(劉金德)으로 성과 이름을 고쳤다.

 

성은 유씨(劉氏)로 김씨(金氏) 성은 이름 금덕(金德)으로 개명하게 된 것은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박해를 피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망명길에 모친 김만천(金萬千)은 아들한테 “이분 선생님을 따라가라” 하고는 곧바로 자살하였고, 아들 유금덕은 그 선생님을 따라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갔는데 그곳에서는 러시아 이름 <이봔 마르코프>로 사용하였다.

 

시베리아에 있을 때 알지 못하는 일본인이 “너의 아버지는 지금 일본에 계시니 나와 함께 가자”하여 머나먼 일본 북해도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대정 2년(1912년)에 유금덕으로 호적 신고(북해도 유봉군 유봉정대자 유봉자촌32번지) 하였다.

 

 

북해도에 있는 동안 부친을 만나보지 못하고 20여 년 동안 고기잡이로 생활하였다. 한때는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간신히 나무 조각을 잡고 4일간 떠다니다가 구출되어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유금덕의 호적에 북해도에서 1903년에 일본 여자 상림스에(上林未野)와 결혼하여 2남을 두었으나 부인은 1939년에, 큰아들은 1937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 후 1925년 북해도를 떠나 화태(華太-사할린)에 정착하여 살고 있으면서 몇 차례 왕래하였다.

 

기자의 질문에 “조선에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최근에 선친(김옥균)에 대한 생각이 나서 49재를 치르고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매년 한두 차례 3년을 두고 찾아오다가 4년째에는 조선에 살던, 아니면 사할린에 살던 결정 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 김균의 아들 송돈헌(宋敦憲-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 조부)과 함께하였다.

 

김옥균의 후손들이 지금도 사할린에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옥균 여동생 김균 여사가 왜 판교에서 살았을까?

 

◇ 판교 정착 이전의 생활

 

김옥균 여동생 김균 여사는 송병의와 결혼하였다. 김옥균은 1884년 12월 6일 갑신정변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지만,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연좌제로 인하여 참형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김옥균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편 송병의와 함께 충북, 경북 등 전국으로 숨어 살면서 거짓 장례도 치르고, 새색시로 둔갑시켜 새 장가를 들어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93번지로 이주하였다.

 

 

호적의 원적은 보령군으로 서천군 판교면으로 전적 하였음을 제적등본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보령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김옥균의 양아들 김영진 보령군수의 보살핌으로 보령에서 살게 되었다.

 

◇ 판교 정착 과정

 

김균 여사의 남편 송병의 사망으로 인하여 아들 송돈헌은 보령에서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로 호적을 전적하여 아들 송돈헌과 함께 살다가 1941년 1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균의 손자, 즉 송돈헌 아들 송재천(宋在天)은 옛 비인군 이방면 흥내리(현 종천면 석촌리202번지)에 사는 풍양 조씨 조용구(趙龍九)의 딸 조윤생(趙閏生)과 결혼하게 된다.

 

조용구는 김균 여사의 아들 송돈헌과 절친한 친구였다. 이로써 사돈이 되었다. 따라서 흥림저수지 주변 종천면 석촌리 옆 가까운 판교리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조용구는 1919∽1921년까지 당시 종천면장과 문산면장을 역임하였다.

 

 

◇ 조용구(趙龍九)의 선대 인물

 

조용구(1883년생) 벼슬을 하지 못했고, 부친 조동협(趙東協)은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고종 17년(1880)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고종 30년(1893)에 예조참판을 지냈다. 종천면 석촌리에는 조동협 예조참판댁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조용구의 가까운 친인척들은 문산면 문장리에 많이 살고 있으며, 김옥균 여동생 김균의 묘가 판교면 저산리에 있었는데 30년 전에 충북 옥천군 청소면 소서리 선산에 이장하였다가 2007년도 김균의 증손자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세종시 장기면에 있는 대전묘지공원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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