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삼일천하의 주역 풍운아 김옥균(金玉均)이 꿈꾸었던 개혁은 수포가 되어 망명길로 끝내는 중국 타향에서 측근 홍종우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지만, 그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남편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숨어 살았다. 우리 고장 판교에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옥균(金玉均) 하면 구한말 1884년 12월 6일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당이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정세에 맞추어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수구세력과 맞서 일으킨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난 주역의 인물이다. 정변의 실패로 끝난 김옥균은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 국내에 남아 있는 그의 가족들은 역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옥사하고 부인 유 씨는 옥천에서 관비가 되었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에서 암행어사 유석에게 붙잡혀 금부에서 옥사했다.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피신하여 송병의(宋秉義 - 1997년도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 증조부)와 결혼하여 살았다. 김균 부부는 서울 경성에서 야밤에 충북 옥천군 청산면
한산의 문헌서원과 서천의 건암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러나 문헌서원은 1969년도에 문중과 서천군의 지원으로 복설하여 문화재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건암서원은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두 서원에 대한 창건과 훼철 그리고 복설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에는 사학의 도장격인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이 설치되어 운영하여오다가 훼철된 후 일부는 복설되었고 지금까지도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고장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의 창건과 훼철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헌서원은 목은 이색(李穡)과 가정 이곡(李穀) 선생의 주 배향자로 1574년 사우(祠宇)인 효정사(孝靖祠)로 출발하여 광해 3년(1611년)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건암서원(建巖書院)은 1577년 명곡정사(鳴谷精舍)로, 명곡 이산보(李山甫)와 중봉 조헌(趙憲) 선생을 주 배향자로 현종 3년(1622년) 명곡서원으로, 숙종 39년(1713년)에 건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 서원들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고 1969년에 문헌서원만 복설되어 현존하고 있다. 서원은 조선
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4) 상륙을 결의하다 7월 13일 아침, 야스다는 조선관사에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 아무리 배에 침수가 심해도 조선측의 지시에 따라 선상 생활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히다카나 가와카미의 병세를 보면 이미 한계에 가깝다. 해변가 공터에 작은 가옥을 하나 지어 상륙시켜 줬으면 한다. 히다카, 가와카미, 야스다와 세 명의 종자 가운데 7명, 합해 10명, 관물 다섯 상자와 신변의 도구만 가지고 이주하게 해줬으면 한다고 요구했다. 전날부터 바람도 파도도 더욱 심해져 있었다. 14일 아침이 되어 도착한 역관 조행윤(趙行倫)의 서찰은 기묘했다. 이에 대한 대답도 야스다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공의 곤란한 상황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만, 상륙은 우리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지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문정 후 첫 보고(충청병영장계록) 이 표착에 관련된 <충청도병영장계등록> 순조(純祖)19년(1819년) 7월 초5일에, “이달 초5일 오시(午時)에 도부(到付)한 마량진 첨사(馬梁鎭僉使) 이동형(李東馨)의 첩정(牒呈)에, “이달 초3일 묘시(卯時)쯤 도부한 본진 갈곶(葛串-마량리) 후망군(候望軍) 방(方)과 김(金)의 치고(馳告-급보)에, ‘이양선(異樣船-다른나라배) 1척이 표도(漂到-표류)하여 연도(烟島)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므로, 첨사가 듣고 매우 놀라 장리(將吏)와 진졸(鎭卒)을 조발(調發-조사를 위하여 출발)하고 이양선이 표도한 곳에 달려가니 과연 이국선(異國船-다른나라배)이었습니다. 글로 물으니 답하기를, ‘일본(日本) 살마(薩摩) 선척이고 이죽선(二竹船-
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Ⅰ. 사건의 발단 우리고장 서천군 마량포구는 지정학적으로 옛날이나 현재도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외국 선박들이 무단, 또는 폭풍우등으로 표류되어 표착되는 사건들이 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하여 10차례의 표류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량포구는 1655년 조선시대에는 수군첨사진영으로 군영이 설치되었다.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에도시대에 일본인 조선반도에 표착한 사건은 92건에 1,235명이었다. 그 중 마량포구에 표착한 중요사건들은 순조16년(1816년) 영국의 함선Alceste호(함장 Murry Maxwell)와 Lyra호(함장 Basil Hall) 해도를 작성하기 위해 포구에 정박하고, 최초 성경을 전달한 사건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