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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문헌서원(文獻書院)과 건암서원(建巖書院의 창건과 훼철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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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의 문헌서원과 서천의 건암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러나 문헌서원은 1969년도에 문중과 서천군의 지원으로 복설하여 문화재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건암서원은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두 서원에 대한 창건과 훼철 그리고 복설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에는 사학의 도장격인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이 설치되어 운영하여오다가 훼철된 후 일부는 복설되었고 지금까지도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고장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의 창건과 훼철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헌서원은 목은 이색(李穡)과 가정 이곡(李穀) 선생의 주 배향자로 1574년 사우(祠宇)인 효정사(孝靖祠)로 출발하여 광해 3년(1611년)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건암서원(建巖書院)은 1577년 명곡정사(鳴谷精舍)로, 명곡 이산보(李山甫)와 중봉 조헌(趙憲) 선생을 주 배향자로 현종 3년(1622년) 명곡서원으로, 숙종 39년(1713년)에 건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 서원들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고 1969년에 문헌서원만 복설되어 현존하고 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士林) 에 의해 설립된 사설 고등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鄕村自治) 운영기구이다.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唐)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宋)나라 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수서원(修書院) 등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道學) 연마의 도장(道場)으로서 보급한 이래 남송(南宋), 원(元), 명(明)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말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북 순흥(현 영주)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뒤에 소수서원 (紹修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官人養成)을 위한 과거준비기구로서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음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서원은 선례후학(先禮後學)의 기치 아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함양하여 인격을 닦던 사림(士林)의 장수지처(藏修之處-숨어살며 수양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서원은 중종에서 명종까지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까지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 남설기(濫設期), 서원이 정리되기 시작하는 영조 17년 이후의 쇠퇴기 등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선현을 봉사하고 유생들의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으며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서는 향촌 자치제를 지향하였다.

 

 

배향(配享)기준도 학문이 깊고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자로 공론에 합당한 분이어야 가능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도 사액과 함께 전답, 노비, 서책 등을 내려 장려하였다.

 

이후 집권세력에 의해 자파세력 확대에 서원이 이용되면서 그 설립이나 사액에 정치권력이 작용하고,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이에 희생된 의사의 봉사(奉祀)가 성행하면서 점차 남설이 사회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은 현종 말부터 시작하여 숙종 대에 오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이 시기 남·서인 간의 정쟁(政爭)의 격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서원을 통한 자기존립(自己存立)을 모색하였던 지방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서원은 교육적 기능이 약화되고, 사현 위주로 전환되면서 가묘적(家廟的) 성격을 가지는 사우(祠宇)와 구별이 모호해졌으며, 서원·사우를 합하면 약 700개소나 되었다.

 

 

이같이 서원의 폭발적 남설은 정치적 사회적 폐단을 심화시켰으며, 따라서 영조 이후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다.

 

또 대원군 집정시인 1871년에는 마침내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을 기준으로 하여 1인 1원(院)의 원칙에 따라 27개의 사액서원(賜額書院)과 20개의 사액사우(賜額祠宇)만 남기고 모두 훼철(毁撤)되었다.

 

당시 충청도의 훼철된 서원은 33개의 원사(院祠)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9년(1576년) 당시 한산군수 파곡 이성중(波谷 李誠中-전주이씨)가 목은 이색(李穡)의 묘역 아래에 부친 가정 이곡(李穀)과 목은 이색(李穡) 선생을 배향하기 위하여 이곡의 시호의 문효(文孝)와 이색(李穡)의 시호 문정(文靖)의 효와 정을 취하여 효정사(孝靖祠)라는 편액을 걸고 사우를 건립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후손인 이덕형(李德泂 1566~1645년 漁城 申湛의 사위)과 좌의정 이덕형(李德馨 1561~1613년 광주인)에 의하여 이색 선생의 옛 집터인 지금의 한산면 고촌리에 이건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 2년(1610년)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많은 선비들이 서원 건립을 청원하여 다음 해 광해 3년(1611년)에 문헌(文獻)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문헌(文獻)이란 뜻은 글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서원이라는 뜻도 있다.

 

또한 건암서원은 지금 문산면 명곡리에 1577년 명곡 이산보(李山甫)가 3년간 시묘 살이 하던 장소에 명곡정사(鳴谷精舍)를 세우고 강학을 하여 오다가 명곡 이산보 사후 헌종3년(1622년)에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여 왔다.

 

그 후에 우리고장 출신 퐁옥헌 조수륜(趙守倫)과 그의 아들 창강 조속(趙涑)을 추가 배향하고 사액을 청원하였으나 불허되었다가 숙종39년(1713년)에 문산면 건암리에 이건하면서 조정으로부터 문산면 건암리(建巖里) 마을에 있다하여 건암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그로써 우리고장의 사립학교인 서원이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으로 오랜 기간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 냈다.

 

문헌서원에는 유명한 학자들이 서원장(書院長)으로 활동하였다. 서원장의 인물로는 연산에 살던 명재 윤증(尹拯),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한산의 군자로 칭송받던 수초당 권변(權忭)선생, 김노경(추사 김정희 부친), 운석 조인영(신정왕후 조대비의 숙부), 동은 정지묵(丁志默) 이 활동하였다.

 

또 건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義兵將) 중붕 조헌(趙憲)선생이 왕래 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중봉 조헌(趙憲)선생은 조정에 상소문을 통해 건암서원의 전신인 명곡정사에 이렇다 할 스승이 없는데도 영특한 인재들 많이 있으니 대학자인 송익필(宋翼弼)을 산장(山長)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송익필이 산정으로 활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전국 서원들은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20개의 사액서원과 27개의 사당으로 47개만 남겨두고 모두 훼철될 때 우리고장 2곳의 서원도 함께 훼철되었다.

 

그 훼철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문서가 남아있어 자세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각사등록이다.

 

대원군의 훼철 지시에 따라 예조판서(禮曹判書)인 조병창(趙秉昌)은 대원군에게 훼철 대상 서원을 품신하고 재가를 받아 각도의 감영에 시달하여 해당 군현의 수령에게 지시하고 그 처리결과를 보고토록 하였다.

 

충청도 내 훼철 대상은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을 비롯하여 33개의 서원이였다.

 

처리 과정을 보면 서원에 모셨던 위패는 깨끗한 곳에 매립하고, 서원에서 군역 대신 종사하던 사람들은 군역에 종사토록 할 것이며, 세금이 면제되었던 서원의 토지는 성책하여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서원 건물의 목재와 기와는 해당 관청에서 편한 대로 처리하되 영정을 봉안했던 서원은 훼철되지 않은 서원으로 옮겨 봉안해도 되며, 봉안할 서원이 없으면 본손(本孫)으로 하여금 편한 대로 옮겨 봉안하도록 하고 서원의 사액편판(賜額懸板)은 불태우도록 하였다.

 

 

훼철된 문헌서원은 제향을 위해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969년도 현재 한산면 고촌리 옛 서원 터에 중창 복설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하여 어려움이 있어 종중의 논의 끝에 문헌서원의 전신인 효정사가 있던 기산면 영모리 이색 선생의 묘역 주변에 서원의 터를 닦고 중창하였다가 복설된 서원이 협소하여 다시 주변 넓은 부지를 마련하여 2009년도 재 복설 공사를 시작으로 2013년 성역화사업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건암서원은 복설되지 못하고 훼철 당시 부지만 남아있다. 향후 복설되어야 할 서원이다.

 

현재 기산면 영모리에 복설된 문헌서원은 이색 선생 최초 신도비의 비명은 태종 5년(1405년)에 河 崙(하 륜)이 지었고, 비석에 새겨 세운 최초의 비석은 세종 15년(1433년)에 세웠다.

 

비문의 글씨는 고려말과 조선 초 문신이며 서예가인 공부(孔俯)가 썼다.

 

그 후 임진왜란(1592년)을 거쳐 정유재란(1597년) 때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었던 것을 현종 7년(1666년)에 선생의 후손들이 재건립하여 세웠다.

 

 

재 건립한 신도비 명은 최초 지었던 하륜(河崙)의 찬문(撰文-지은 글)과 뒷면 신도비 음기는 이색 선생의 손자 이맹균(李孟畇)이가 짓고,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찬(撰-지음)한 글을 첨가하였다.

 

그 후 우암 송시열의 찬한 음기에 河崙(하륜)의 신도비 명의 부당함을 근거를 들어 1904년에, 하륜(河崙)이 지은 신도비 명을 깎아 지우고 구한말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李容元(이용원)이 서문을, 독립운동가 송병선(宋秉璿)이 명(銘)을 지었다.

 

글씨는 대사성을 지낸 이용직(李容稙), 감독은 후손 이호직(李鎬稙) 담당하였다.

 

이색 신도비는 현재 묘역에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다 실측해보니 145m 위치에 있다. 1904년 전면을 깎아 다시 세울 때 위치가 변형된 것 같다.

 

최초의 신도비 명의 글씨는 조선 초 명필가인 공부(孔俯)가 썼는데 당시 신도비 명을 받고 공부는 세종 15년(1433년) 한산으로 출발하였다.

 

 

이색의 사돈(아들 이종선 장인) 양촌 권근(權近)은 공부(孔俯)에게 전송하는 시(詩)를 이렇게 써주었다.

 

海上多仙境 : 바닷가에 선경이 많으나

韓山一點靑 : 한산의 한 봉우리 더욱 푸르네.

精英鍾淑氣 : 준수한 영재는 맑은 기운이 뭉쳤고

蘊奧發諸經 : 심오한 문장 경전에서 피어났네.

百世師遺範 : 백대에 본받을 규범을 남겼으니

千秋炳列星 : 천추에 별처럼 빛나리로다.

勒碑恩命重 : 비 세우라는 은명이 중하니

可比鼎鍾銘 : 정종에 새긴 글과 견주겠네.

牧隱文冠古 : 목은 문장은 천고에 으뜸이요

河相出藍靑 : 하상의 재주는 스승보다 더 하네

道學眞王佐 : 도학은 참으로 임금 도울 재주이고

詞章出聖經 : 문장은 성경에서 흘러나왔네.

撰碑垂後世 : 지은 비문 후세에 전할 것이요

綴字似秋星 : 쓴 글자 빛남이 가을 별 같네.

又得漁村筆 : 더구나 어촌의 글을 얻었으니

何誇孔鼎銘 : 어찌 공정명만 자랑스러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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