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도로변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趙貞喆)의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조정철의 거사비가 세워진 내력과 그는 어떠한 인물이며, 조정철은 정조 암살미수 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기간 조정철을 위해 목숨과 바꾼 홍윤애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버스 정류장 옆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 거사비(忠淸道觀察使 趙貞喆 去思碑)가 서 있다. 순조 15년(1815년) 10월에 세워진 비석으로 우리 고장 서천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세웠다. 거사비를 세우게 된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마 순조 13년(1813년)에 조정철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던 해로 전국적으로 대기근으로 백성이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 호서지방에 1만 석으로 진휼한 것을 보면 구휼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관찰사 조정철(趙貞喆:1751-1831)은 본관은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서천읍 구암리에 안장된 우의정을 지내고 영조를 왕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조태채(1660-1722 :二憂堂 趙泰采)의 증손자다. 정조 1년(17
2023-09-16 박수환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숭문동)에는 8문장가 중 시인 기록 신광연과 그의 형제들은 대문장가로 세상에 명성을 날렸고 늦게나마 관계에도 진출하였다. 그 뒤에는 고향을 떠나 전국을 유랑하며 지낸 큰형 석북 신광수와 동생 진택 신광하의 생활과는 반대로 부모님과 고향을 지키며 살았다. 기록 신광연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고령신씨가 우리 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 부용당 신 씨의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께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1328∽1396)선생의 후손인 이윤수(李允秀)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인 이곳 활동리(숭문동)에 정착 세거하면서 번창하였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첨추공 신호(申澔 1687∽1767)의 첫째 부인 성산이씨는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와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을 낳으시고, 둘째 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와 부용당 신 씨(申氏 1732∽1791)를 낳았다. 1. 가족과 고향을 지켜며 살았다. 형님 석북 신광수와 아우 신광하의 삶에 비교하면, 기록 신광연(申光淵)의 삶
2023-09-08 박수환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우리 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숭문동)에 8 문장가 중 시인 진택 신광하와 그 형제들이 살았다. 당대에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관계의 진출이 너무 늦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갔다 숭문동 시인 진택 신광하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숭문동(崇文洞)은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의 옛 마을이름의 별칭이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가계는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께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1328∽1396)선생의 후손인 이윤수(李允秀)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인 활동리(은골, 어은동)에 정착 세거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장남 신담(申湛-호 어성-1519∽1595)은 충청도관찰사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역임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첨추공 신호(申澔1687∽1767)의 첫째부인 성산이씨는 석북신광수(申光洙1712-1775)와 기록 신광연(신광연1715∽1778)을 낳으시고, 둘째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1729-1796)와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 낳으셨다. 석북 신광수는 아들5명을 두었으나, 동생 신광연과 신광
2023-09-01 박수환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우리 고장 건암서원에 풍옥헌 조수륜과 그의 아들 창강 조속이 배향되어 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복설되지 않고 있다. 풍옥헌과 창강 선생의 서원배향과정과 광해군의 폭정으로 희생된 풍옥헌 선생에 대한 훗날 인조반정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서원창건과 사액 우리 고장 문산면 지원리(鳴谷-명곡)에 명곡서원(鳴谷書院)이 있었다. 건암리로 이전하기 전에는 사액되지 못한 명곡서원은 현종 3년(1662년)에 사당의 형태로 창건되어 명곡 이산보(李山甫1539~1594)와 중봉 조헌(趙憲1544~1592)을 배향면서 1709년에 풍옥헌 조수륜과 창강 조속 부자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 후 문산면 건암리로 이건하고 1713년 10월 24일 사액서원(賜額書院-조정의 인가서원)인 건암서원(建巖書院)이 되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현재까지 복설되지 못하였다. 2. 풍옥헌의 낙향의 생활 풍옥헌 조수륜(趙守倫)은 경기도 과천(果川)에서 태어났고 서천 문조향(文照鄕-서지골 현 문장교회 옆 서쪽 마을) 즉 문장리(화리) 마을에 낙향하여 5~6년간 살았다. 그곳에서 창강 조속(趙涑)을 낳았
2023-08-25 박수환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충남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한실)에 400여 년 전에 대곡서당을 설치, 지역인재를 육성하였고 구한말 민종식이 홍주의병 창의로 봉기하였을 때 구암 구병대 선생께서 의병에 참여하고 군수품 조달에 앞장서며, 대곡서당을 제공하여 의병의 숙영지로서 역할을 제공하였던 대곡서당에 대하여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 마을회관에서 대곡(大谷-한실)마을 뒷산 450m 지점 원통산(遠通山) 중턱에 옛 대곡서당 자리에 1954년에 복원된 운포서당(雲圃書堂)이 자리하고 있다. 은곡리(한실)은 평해구씨 구맹전(丘孟傳)이 1506년 중종사화를 피해 서천으로 낙향 세거하면서 살았던 서천 평해구씨의 입향조의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1507년(중종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당시 어지러운 시기에 사화를 피해 이곳으로 정착하여 세거하여 하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이곳에 400여 년 전부터 설치 운영되었던 대곡서당(大谷書堂)이 각종 역사 자료에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곡서당의 설치와 운영과정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창건역사(創建歷史) 가. 창건자(創建者) : 양촌(陽村) 구희로(丘希
2023-08-18 박수환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충남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삼거리에서 화양면 추동리 방향으로 420m 지점에서 활동리를 지나 1㎞쯤에 대등리(옛 숭문북동)마을이 있다. 이곳 마을은 17세기 한집안에서 8 문장가를 배출한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申光洙1712~1775) 4남매와 자녀들이 청빈하게 살았던 숭문동의 선대와 가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골짜기 어귀에는 복사꽃 피어/앞마을 이웃들은 눈이 부시네./시인은 내키는 대로 길을 가노니/봄새는 제철 만나 지저귀누나./세상 길이 한 해 한 해 바뀌어 가도/천기(天機)는 하루하루 다시 살아나네/저녁 바람 흰 머리에 불어오는데/냇가에서 마음을 가누지 못하네.” 이 시는 영조 때의 저명한 시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가 고향 한산의 숭문동(崇文洞-지금 화양면 대등리)에 머물 때 썼던 시(詩)이다. 복사꽃 활짝 피어 눈부신 세상이 되면 누군들 들로 산으로 꽃구경 가고 싶지 않으랴? 당시의 숭문동은 복사꽃이 만발하였을 것 같다. 1. 숭문동 입향조 순창공 신영원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의 6대조 순창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이 전남 순창에서 한산 숭문동으로 정
2023-08-11 박수환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우리 고장 비인면 남당리 청절사에 송당 유홍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씨조선의 종계(宗系)의 역사가 명나라에 잘못 전달로 명나라 법전이 잘못되어 200여 년간 고쳐지지 않고 있어 조정에서 유홍을 사은사(謝恩使)로 삼아 종계변무를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광국일등공신에 책록된 유홍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비인면 남당리(통박골) 청절사(淸節祠)에 배향된 인물 중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일등공신인 유홍(俞泓)이 있다. 유홍은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와 충청, 전라, 경상, 함경,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우의정 등을 지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자는 지숙(止叔)이고, 호는 송당(松塘) 또는 퇴우당(退憂堂)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아버지는 생원 유관(兪綰)이며,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사복시(司僕寺) 정(正)으로 추증된 남충세(南忠世)의 딸이다. 비인 남당리 입향조(入鄕祖)인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유기창(兪起昌)의 증손자이고, 예조 판서(判書) 유여림(兪汝霖)의 손자이다. 유홍(俞泓)은 조부 경안공 유
2023-07-28 박수환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옛 서천군의 진산은 천방산이다. 백제 때 서천군의 치소는 천방산 자락 문산면 신농리(왜멀)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고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처 조선시대에는 남산에서 금년도 신청사로 이전하기까지 서천읍 군사리에 500여년의 치소로 자리하여 왔다. 천방산이 남기 문화유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고장 천방산은 서천군의 명산으로 백제시대 때 서천군(설림군-舌林郡)의 진산(鎭山)이었다. 진산이란? 난리를 진압하고 국가(고을)를 지킨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 고을의 주된 산을 진산이라 한다. 또는 진호(鎭護)라고 하였다. 진산을 배경으로 그 고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고을이 발전하면서 문화가 형성되며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문헌에는 천방사(千方寺)로, 현재는 천방사(千房寺)로 표기하고 있다. 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 등 3개 면에 걸칠 만큼 산자락이 넓고 큰 서천 제일의 산이다.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가 둘러쳐 있고 동·남·북 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영산(靈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인 듯 천방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봉우리들은
2023-07-22 박수환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