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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819년 서천군 마량진 조선 표류일기의 가치와 활용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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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4) 상륙을 결의하다

7월 13일 아침, 야스다는 조선관사에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 아무리 배에 침수가 심해도 조선측의 지시에 따라 선상 생활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히다카나 가와카미의 병세를 보면 이미 한계에 가깝다. 해변가 공터에 작은 가옥을 하나 지어 상륙시켜 줬으면 한다.

 

히다카, 가와카미, 야스다와 세 명의 종자 가운데 7명, 합해 10명, 관물 다섯 상자와 신변의 도구만 가지고 이주하게 해줬으면 한다고 요구했다. 전날부터 바람도 파도도 더욱 심해져 있었다.

 

14일 아침이 되어 도착한 역관 조행윤(趙行倫)의 서찰은 기묘했다. 이에 대한 대답도 야스다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공의 곤란한 상황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만, 상륙은 우리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지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조정에서 지시도 올 것입니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상륙을 용인한다면, 우리들이 사형에 처해집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5) 비인현감 결정 조선의 배로 옮기다

야스다는 일각이라도 빨리 선내의 곤란한 상황을 봐주었으면 하는 세 통째를 보냈다. 실제로 보고나서도 상륙을 거부한다면, 우리들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상륙을 감행한다. 그 때에 이르러 지도는 받지 않는다라고도 적었다.

 

드디어 마량진 첨사 이동형, 절충장군 이종길, 하급관사인 김기방과 장천규 무리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서 비인현감 윤영규와 역관 조명오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선내의 참상을 목격한 현감은 말했다.

 

야만적인 이민족이 이런 고난에 처한 경우라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귀국과 우리나라는 수호를 맺은 사이이다.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기에 우리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는 것도 있으나, 그러나 이 광경을 보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자가 있을까고. 야스다는 태수의 따듯한 정에 깊이 감사했고, ‘수호’의 의의의 깊음도 알고 있었다

 

 

◯ 합법적인 방안모색

태수는 서면을 바라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김기방과 장천규가 옆에서 서면을 들여다봤다.

 

조금 있다 침묵에 잠겨있던 현감은 붓을 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표류선에 머물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상륙을 허용할 권한은 없다.

 

새로운 조선 배 몇 척을 계류시켜 표류선 옆을 지켜 선원들을 안전한 조선 배에 이주시켜 주겠다 하며, 작은 조선 배 두 척이 바로 준비되어, 표류선을 양쪽에서 끼는 형태로 횡으로 연결하려고 왔다.

 

이는 표류선을 풍파에서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으나, 야스다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현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전한 배로 이동이 일단 우선되어야 하며, 배를 좋다 싫다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느냐. 작은 배도 두 척 있으면 큰 배와 마찬가지 기능을 할 수 있다. 작은 배의 흔들림이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 준비한 조선배가 병자가 견딜 수 있을 정도 흔들리는지 자신들이 확인해 보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선 배 두 척이 즉시 표류선을 좌우에서 연결하여 배의 자세를 다시 세워 뒤집어지는 걸 막았다. 서둘러 망루 위의 화물을 조선 배에 옮겨 실어 한숨 돌렸다

 

 

◯ 계속되는 보살핌

비인현감은 조정의 귀환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마량진에 표류한 야스다 일행의 불편함이 없도록 식량과 땔감 등을 제공하고 보살핌이 계속되었다.

 

 

◯ 조선의 큰 인물

비인현감 윤영규는 이날 “당신들 일은 제가 마음을 다해 어떻게든 하겠다”고 말했다.

 

야스다는 그 진심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었다. 조금 전 현감은 조선배로의 옮기는 안을 제시했을 때 야스다는 현감 윤영규를 그야말로 조선의 큰 인물 이라고 깊이 탄복했다.

 

그 사람 됨됨이는 엄숙하고 굳세어 방정하고, 예의를 갖춰 스스로 겸손하며, 잘 용서하여 충실하고, 잘 화목하여 너그럽다, 뜨거운 정은 얼굴에 나타난다며 전면적으로 칭찬하였다.

 

 

◯새끼 염소 선물 거절

표류선에서는 애완용으로 검은 아기염소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며칠에 걸친 태수의 후의에 대해 야스다는 이 새끼염소를 보내어 사의를 표하고 싶었다.

 

배 바닥 가까이에서 키워왔으나, 배의 침수가 진행되었기에 키울 장소 때문에도 고민이었다. 표류의 고난을 함께한 만큼 쉽사리 익사시키는 것도 가여웠다.

 

그래서 새끼염소를 태수에게 보내, 그 아래서 키워주면 다행이기도 했다. 만약 받아주지 않는다면 들판에 풀어줬으면 한다. 그러면 굶어죽지 않을 것이라고 현감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현감은 말했다. 아무리 금수라고는 하나, 표류할 때 생사를 같이 한 새끼염소를 타국에 버리고 가는 것도 가엽다. 먹이는 준비할테니 함께 데리고 돌아가는 게 좋다고. 조금 지나자 한 다발의 풀이 배에 도착했다. 현감은 먹이가 도착하는 걸 보고 나서야 배를 떠났다.

 

 

2. 관리와 선비의 교류

야스다는 마량포구에서 체류하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조선의 관리들과 지역의 선비들과 시(詩)를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의 실력을 엿보면서 마음의 감정을 자연스럽표출하기도 하였다 체류하는 동안 72수란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귀국시 호송관 이였던 송흠재(宋欽載-서천사람)이별의 시를 보면, 정들어 떠나보내기 아쉬워하는 마음 간절하다.

 

계곡물 앞에 두고 헤어지나 애석해라

대마도 구름 만리

가장 예의바른 일본인 세 사람

세상에서 빼어난 남자

 

 

야스다의 답의 차운에서...

 

동북의 먼 길 이별을 재촉 하네

물안개 자욱한 길 실로 천리만리

기우로 만난 위엄과 외로움을 갖춘

문채 좋은 이 남자

 

 

이렇듯 야스다는 본국으로 귀국하는 자신의 마음을 구름 한 점 흐르는 맑은 하늘에 비유하였고, 송흠재는 야스다의 돌아갈 뱃길을 염려하였다.

 

그들은 기우(奇遇)로 만났지만 서로의 깊은 우정을 느낄 수 있다. 송흠재가 예의 바르고 세상에서 기발(奇拔)한 사람이라고 한 것에 야스다는 차운하여 의롭고 문채 좋은 남자로 화답의 시를 보냈다.

 

두 사람의 이별시에 표현이 근사하고 이별의 정은 모두 깊고 진실하였다.

 

 

Ⅲ. 본국의 귀환 길

1. 귀환 소식

24일은 아침부터 바람이 강하고, 파도가 높아 화물을 옮긴 조선 배가 침수되었다. 배에 남아있던 조선인 2, 3명 모두 열심히 물을 퍼냈다. 큰 바람이 불면 간간히 이렇게 큰 파도가 되는 일도 있다고 한탄했다.

 

점심이 지나 현감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조선 배에 의한 송환이 조정 명령으로 정식으로 정했다고 하며, 축하주를 지참했다고도 했다.

 

야스다는 이렇게 귀로가 열린 것은 오직 현감의 간곡한 정 때문이며 엎드려 감사한다고 응하여, 히다카, 가와카미 모두 현감의 술을 받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2. 송환준비와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

송환준비를 마치고 송환선인 조선배에 화물을 모두 옮기자 마지막으로 야스다를 포함한 세 명의 상관은 표류선을 내렸다.

 

앞바다의 송환선까지는 작은 배에 탔으나, 비인현감 윤영규와 첨사도 동승했다. 한편 이전에 투하한 돗자리는 배의 착연재로 표류선의 중앙에 쌓아올려졌다.

 

나카스케, 젠노스케, 센스케에게 명하여 풀 다발에 불을 붙여 표류선의 옆에 대기시키고 야스다 일행이 멀리 떨어지고 나서 점화시켰다.

 

드디어 조금씩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작은 배가 송환선에 도착하여 현감, 첨사와 헤어질 때가 왔다.

 

야스다 일행이 송환선의 현 쪽에 서자, 현감은 세 명의 손을 한 명씩 잡았다. 모두 이별이 슬퍼 말을 하지 못했다.

 

현감은 세 명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빈다고 말하며, 야스다도 또 현감의 앞날이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무사히 돌아간다고 맹세하기에 바빴다.

 

모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이별을 주저했으나 마침내 작은 배는 떠나갔다.

 

가슴이 막힌 것 같은 마음으로 선상에서 바라보니 해변으로 향하는 작은 배의 현감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표류선에서 검은 연기와 큰 불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감도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스다에게 있어 이것이 비인현감 윤영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송환선 선원

선주 겸 사공(沙工 배를 부리는 사람. 선장에 해당됨) 박흥복(朴興福) 63세. 거주지 경강(京江) 마포(麻浦).

 

격꾼(格軍) 김치원(金致遠) 46세. 거주지 농암(農巖).

김인관(金仁官) 42세. 거주지 별영(別營).

한대악(韓大惡) 40세. 거주지 마포.

임복득(林福得) 40세. 거주지 마포.

김여심(金汝深) 30세. 거주지 동막(東幕).

박장복(朴長福) 30세. 거주지 마포.

박득손(朴得孫) 22세. 거주지 수철리(水鐵里).

김인성(金仁成) 20세. 거주지 마포.

 

 

◯ 송환선 호송책임자 서천포만호 박태무(朴泰茂)

마량진을 떠나 부산만 우암포의 귀환노정이 정해졌다. 관할구역의 소환책임자를 지정하였다.

 

서천군 송환책임자는 서천만호 박태무, 인계지역은 고군산진까지 임무를 맡아 호송을 완료하였다.

 

야스다 일행이 지난 7월3일 마량포구에 표류된 이후 7월26일 귀국길에 올라 부산만 우암포에 머물었다.

 

 

◯귀환길 수로(水路)와 이수(里數)

마량진부터 서천군 개야소도(介也召島)까지 30리.

개야소도부터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고군산진(古群山鎭)까지 70리.

고군산진에서 부안현(扶安縣) 위도진(蝟島鎭)까지 60리.

위도진부터 영광군(靈光郡) 법성진(法聖鎭)까지 70리.

법성진부터 나주목(羅州牧) 지도진(芝島鎭)까지 110리.

지도진부터 영암군(靈巖郡) 완도진(莞島鎭)까지 80리.

완도진부터 강진현(康津縣) 마도진(馬島鎭)까지 50리.

마도진부터 장흥부(長興府) 녹도진(鹿島鎭)까지 110리.

녹도진부터 낙안군(樂安郡) 사도진(蛇島鎭)까지 80리.

사도진부터 순천부(順天府) 방답진(方踏鎭)까지 1백 리.

방답진부터 경상도 고성현(固城縣) 통영(統營)까지 1백 리.

통영부터 동래부(東萊府)까지 110리.

자료 : 충청병영장계록 1819년 7월 29일

 

3. 본국으로 귀국 (부산 다대포 도착 8월 30일)

12월 28일, 부산왜관에서 귀국 지시가 내려왔다. 정월 6일에 쓰시마로 가는 배에 탄다고 한다.

 

 

Ⅳ. 일기의 가치와 활용방안

1. 일기의 작성 시점

1) 첫 번째 기록 -1819년

조선표류일기 내용중에 야스다가 틈틈이 일기를 작성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첫 번째 기록은 조선에 표착한 1819년(순조19년, 일본 분세2년) 7월3일의 기록으로 조선에 도착하여 이틀이 자났다고 하였다.

 

야스다는 조선역관 조행윤과 필담을 하고 그 내용을 옮겨 적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산포에 체류하면서 비인에서 필담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일기 사이에 맞추어 넣었다고 하였다.

 

2) 두 번째 기록 -1820년

두 번째 기록은 1820년(순조20년, 일본 분세3년) 봄,5월18일 대마도 하내포에서, 에라부지마를 출발한 1820년 6월14일부터 조선에 표착하여 지낸7월17일까지의 기록을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3) 세 번째 기록 – 1819년

세 번째 기록은 1819년(순조19년, 분세2년) 12월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4) 네 번째 기록 –1819년

네 번째 기록은 1819년(순조19년,분세2년) 12월16일에 기록으로 이 책에는 그 기록이 없지만, 일본에서 번역한 책에서 나타난다.

 

5) 다섯 번째 기록 – 1820년

다섯 번째 기록에 대한 기록은 1820년 9월 15일부터 24일까지의 기록은 후편에 자세히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대마도에서 조사받은 내용으로 추측이 되는데 조선에 대한 문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표류기 7권의 후서를 쓴 니이로 토키마스 햣코오(新納時升伯剛)는 야스다가 일본의 금제에 의하여 “표류기의 기록들을 태웠다”고 말했다.

 

 

2. 표류일기의 가치

역사적으로 일본인 등 각국의 표류선이 국내에 많이 표류한 사건이 많지만 대부분 지식인이 아니고 어부 등 하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여서 당시의 표류상황을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본 조선표류일기는 일본의 관공선으로 관리자인 지식인으로 특히 한자로 필답을 주고 받고 기록으로 남겨놓아 19세기 조선의 문화를 확인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새로운 콘텐츠개발로 활용할 가치가 크다고 생각한다.

 

3. 서천군의 그간 콘텐츠개발의 추진상황

1) 표류일기의 완역 활용 홍보

2019년 7월-2020년6월 완역출간--- 부경대학교

2) 마량포구 관광활성화를 위한 학술세미나 개최 — 서천문화원, 2020년 6월25일

3) 마량포구 관광시설확충 (조선표류관 설치 ) 마량 성경최초 전래관내에 검토 중

 

 

4 표류일기속의 콘텐츠개발 검토(방안)

1) 오페라 무대연출 – 전문극단과 협의 작품 창작연출

2) 에니메이션 및 만화 – 전문예술고, 대학과 협의 창작

3) 영화감독 작가 등 협의 제작 검토

4) 표류일기속의 인물 후손과의 만남 행사추진- 문중과 협의

5) 일본 지자체와 서천군과의 자매결연 문화교류추진

 

Ⅴ. 마무리하면서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우리 고장 비인면 마량진에서 폭풍우와의 사투를 벌이며 25명의 일본 관공선 표류인과 비인현감 윤영규와 첨사 이동형, 종사관과 함께했던 우리고자 선비와 일분 무사 야스다 사이에서 기록에서 본 오간 대화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한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다시 생각하는 울림이 크다.

 

표류하는 동안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에서 찰라에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는 절박함을 일기 속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당시 비인현감 윤영규와 야스다가 이별을 앞두고 아쉬워 하는 모습에서 과거 한 때는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불편한 관계였지만 당시 수교를 통해 가까워진 관계로 각자의 정든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현재는 정치적으로 먼 관계지만 향후 조선표류관설치로 일본인의 관광이 많이 유치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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