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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819년 서천군 마량진 조선 표류일기의 가치와 활용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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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Ⅰ. 사건의 발단

 

우리고장 서천군 마량포구는 지정학적으로 옛날이나 현재도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외국 선박들이 무단, 또는 폭풍우등으로 표류되어 표착되는 사건들이 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하여 10차례의 표류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량포구는 1655년 조선시대에는 수군첨사진영으로 군영이 설치되었다.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에도시대에 일본인 조선반도에 표착한 사건은 92건에 1,235명이었다.

 

그 중 마량포구에 표착한 중요사건들은 순조16년(1816년) 영국의 함선Alceste호(함장 Murry Maxwell)와 Lyra호(함장 Basil Hall) 해도를 작성하기 위해 포구에 정박하고, 최초 성경을 전달한 사건과, 그 후 순조19년(1819년)7월3일 일본 규수 남단에 위치한 시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에 속한 부속도서 에라부지마에 1817년 봄부터 다이칸 보좌로 부임한 야스다는 임무를 마치고 다이칸 히다카 및 동료 다이칸 보좌 카와카미와 등 25명이 함께 고향에 돌아가게 되어, 1819년 6월 14일 낮, 동남풍을 타고 에라부지마를 출항했다가 갑작스런 폭풍우를 만나 파도에 밀려 표류가 시작되어 사선을 넘나들며 난파직전으로 가까스로 표류하다 마량진과 연도앞 해상에 정박한 사건이다.

 

 

표착한 야스다 일행이 비인현감 등 조선관료들의 조사등을 마치고 7월26일 마량진을 떠나 일본으로 귀환하는 동안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일기로 남겼다.

 

본 자료는 일본 고베대학 부속도서관에 『朝鮮漂流日記』 총7권 표지포함 315페이지 그중에 비인현의 관리와 주민의 생활모습 등을 남긴 37장의 화첩이 있다. 본 일기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 등을 본고를 통하여 살펴보고 일기의 가치에 대한 활용방안 제안하고자 한다.

 

1. 표류의 과정

 

문화14년(1817년) 봄부터 에라부지마 다이칸 보좌로 부임한 야스다는 武士(사무라이)로 나이는30세 엘리트였다.

 

다이칸 히다카 및 동료 다이칸 보좌 카와카미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게 되어, 문정2년(1819년) 6월 14일 낮, 동남풍을 타고 에라부지마를 출항했다.

 

잠시 뒤 토쿠노시마가 북쪽으로 보였고 그 서쪽의 바다를 밤새 북상했다. 보통 에라부지마를 출발하면 먼저 아마미오오시마로 향했다.

 

 

아마미오오시마의 항구에서 짐을 싣거나 바람을 기다린 뒤 사쓰마반도의 야마카와 항을 향해 북상했다. 즉, 에라부지마에서 곧장 야마카와항으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6월 15일 아침, 아마미오오시마에 근접했을 때 갑자기 바람이 바뀌고 폭우가 내려 서쪽으로 떠내려가는 바람에 오오시마에 도착하지 못했다.

 

16, 17일도 계속 서쪽으로 떠내려갔다. 18일에 남풍이 불어 오오시마를 향했지만, 해류는 반대 방향. 19일 밤 이후, 배는 서쪽으로 떠내려갔다. 야스다는 선장과 둘이서 선수에 앉아 진행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날 선장과 야스다는 앞으로의 항해에 대해 논의했다. 선장은 계속 바람이 동쪽에서 오기 때문에 이대로는 오오시마에 도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돛을 충분히 펴고 야마카와 항으로 직행하자는 제안이다.

 

야스다는 어쨌든 오오시마로 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야마카와항으로 가자고 반론했다. 20일 저녁의 하늘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색과 빛에 덮여 있었다.

 

6월 21일의 일기에는 ‘망망한 적류, 풍랑은 다소 노여움을 품다’고 쓰여 있다. 배는 계속 조류에 떠밀려가고 바람과 파도는 거듭 거칠어지고 있었다.

 

 

야스다는 지금 어디를 향해하고 있는 건지 점점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나나시마(토카라열도) 주변을 통과하는 중일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사공들은 ‘나나시마 근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나시마의 서쪽을 지나고 있는지 동쪽을 지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석에 의지하여 계속 북쪽을 향했다.

 

1) 폭풍우 속의 사투

 

22일, 폭풍으로 돛을 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큰 파도에 떠밀려 화살처럼 질주했다.

 

23일, 맹렬한 바람이 판자를 날리고, 격렬한 파도는 선미를 부술 것 같았다. 언제 전복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에 짐을 가볍게 해서 침몰을 막았다. 야스다는 ’개인의 짐은 모두 버려라. 번주어용 화물은 버려서는 안 된다‘고 배의 전원에게 명령했다.

 

배는 계속해서 큰 파도에 시달렸다. 거룻배를 배 쪽에 고정하는 3개의 밧줄 중 2개가 끊어지고 수십 척의 널판지가 새의 날개처럼 선상을 날아 바다로 사라져갔다.

 

뱃머리와 선미 주위의 복판이 부서져서 돗자리를 펼쳐 바람과 파도를 막았다.

 

 

야스다는 품속의 부적을 대야의 물에 띄워 기도하고, 선장에게 명령하여 대야의 물과 함께 바다에 던지게 했다. 부적은 번주로부터 받은 것으로, 바다에 던지면 수난을 피할 수 있다고 들은 것이었다.

 

야스다가 선실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니, 바다는 ‘둥근 산’을 이루고 배는 ‘구천의 바닥’에 있는 것 같았다. 구천이란 ‘저세상’을 말한다. 이미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선장과 사공 5, 6명이 달려들어 서로 큰 소리로 말하며 배의 키를 조작했지만, 전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상투를 잘라 평안을 빌었고, 부처의 이름을 몇 번이고 읊조리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윽고 돛대를 밑동부터 베어내기로 결단을 내렸는데, 이는 중심을 낮춰 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애초에 둘레가 몇 미터나 되는 돛대를 쓰러뜨리는 것은 평소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큰 파도에 휩쓸리고 있는 배는 상하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도 어려웠다. 히다카 요이치자에몬이 도끼로 베어 넘어뜨리려 했지만 손끝이 안정되지 않아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때 배 안에서도 강력하다고 알려진 지란쵸(知覧村)의 산시로가 골절도를 손에 들고 돛대로 향했다. 베어낸 돛대는 우현 방향으로 쓰러져 바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크게 세 번 울려 퍼졌다.

 

선체도 크게 손상되어 큰 파도가 닥칠 때마다 선내로 바닷물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장소에 따라서는 목 언저리까지 물이 차 있었다. 야스다는 ‘살아남고 싶다면, 전원, 물을 퍼내라. 따르지 않는 자는 베겠다.’고 외치고 열심히 물을 퍼내는 작업을 시켰다.

 

 

◯ 바닷물 끓여 식수 얻다

 

목숨을 건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야스다는 24일, 25일 동안 파도에 모든 것을 맡겼다. 거센 파도가 이제는 잔잔해지고 남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선미에 작은 돛을 걸어보았다. 사공들은 그 작게 펄럭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부자재로 임시키와 돛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완성된 것은 작았지만 이것으로 바람을 받아 북상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이 며칠간 4개 실었던 물통 중 3개가 쓸려가고 남은 1개도 넘어져서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에 대량으로 퍼 올린 바닷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고 그 증기를 식혀 순수한 물을 얻었다.

 

계속해서 남풍을 타고 북상한 28일, 낮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선상에서 빗물을 한 말 이상 모아 다 같이 벌컥벌컥 마셨다. 그 탓에 승선자의 반이 복통과 설사를 겪게 되었다.

 

29일, 햇볕이 처음으로 밝게 내리쬐고 바다의 색이 깨끗하게 보였다. 선상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일본 바다 같다’고 했다. 야스다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2) 기대와 불안

 

7월 1일 새벽, 10리 정도 앞에 확실히 섬이 두 개 보였다. 사공들은 일본 비센(肥前)의 5섬일 것이라고 말했다. 섬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선장은 술을 꺼내 신에게 바친다며 희색이 만면하여 마셔댔다. 두 개의 섬이 차츰 가까워지자 각각의 섬은 둘레 1리 정도의 암초로, 섬 사이의 거리는 수백 보였다.

 

5도 열도의 앞에 있는 오시마(男島), 메시마(女島)가 아닐까 하는 자도 있는 한편, 뱃사람 중 가장 연장자인 쇼에몬은 신중한 어조로 산의 형태가 일본의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2일 이른 아침에는 동쪽에 봉우리가 2개, 남쪽에 큰 섬이 보였다. 5도 열도가 아닐까 하는 자가 있고, 남동쪽에도 섬이 두 개 보였다.

 

선장은 5도 중 탄가시마(男鹿島)(오지카지마(小値賀島))가 아닐까 하고 말했다. 이날의 해 질 녘, 동북쪽으로 구름을 휘감고 하늘을 뚫는 큰 산이 보였다.

 

이때 쇼에몬은 조용히 “일본의 서북쪽 바다에서 이런 큰 산을 본 적은 지금까지 없다. 아마 여기는 조선국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선원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지며 두려움에 떨었다. 야스다는 선원들에게 “두려울 것 없다. 똑바로 나가자” 하고 배는 계속해서 동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2. 마량진 표착(漂着)과 문정(問情)

 

1) 마량진 첨사의 문정

 

7월 3일 이른 아침, 커다란 포구에 도착했다. 돛을 내리고 닻을 내린 곳은 주위를 에워싸듯 산이 이어지는 장대한 땅이었다.

 

그러나 흉노의 땅일 수도 있기 때문에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활과 총을 준비하고 주변의 기색을 신중히 살폈다.

 

잠시 후 동서쪽 해안에서 두 개의 돛을 단 배가 20여척 나타나 수백 보 거리에서 사쓰마 선박을 둘러쌌다. 전혀 모르는 만이(蛮夷), 흉노의 땅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선상은 환희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윽고 둘러싼 배중에서 2 척의 작은 배가 다가왔다. 히다카 요이치자에몬과 카와카미 히코쥬로 두 명은 병석에 누워있어 도저히 협상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야스다가 혼자 이방인과의 필담을 각오했다.

 

문사에 익숙지 않은 자신이 필담을 맡다니 남들이 비웃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라부지마를 떠난 뒤 선상에서도 계속 한자를 공부해서 한문으로 여행기를 써왔다.

 

어쩌면 어구의 배치가 바뀌어 의미가 없는 문장을 거듭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조선인도 의도는 알아줄 것이다. 두 척의 작은 배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흰 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야스다는 그 모습과 용모를 보고 바로 조선인임을 알았다. 조선의 두 척의 배는 마량진 첨사 이동형(李東馨)의 조사단이었다. 야스다와 조사단이 사쓰마 선상에서의 기념할 만한 첫 필담 응답은 다음과 같다.

 

문) : 그대는 어느 나라 어느 땅의 사람이며, 어쩐 일로 바다에 나와 표류하고 있었는가?

 

답) : 일본 국의 배로, 역풍을 만나 오랫동안 바다에서 고초를 겪다 오늘 천운을 얻어 귀공의 나라에 도착하였다.        귀공의 나라가 어디인지는 모르나, 배 안의 물이 고갈되었으니 불쌍히 여겨 자혜를 베푼다면 머리 숙여 감          사 하오리다.

 

야스다가 요구한 물은 잠시 뒤 여러 척의 배가 실어 날랐다. 배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그릇을 손에 들고 목을 축였다. 수질이 매우 뛰어난 ‘천하제일의 물’이라고 모두가 호평일색이었다.

 

지금까지 바닷물을 증류한 물만 마셔왔으니 천연수가 분명 더 맛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 도착한 안도감이 물을 더 맛있게 느끼게 했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이곳은 조선국 충청도(忠淸道) 비인(庇仁)이라고 알려주었다.

 

◯ 선상의 소란

 

선상으로 찾아온 일행 중에 보기에도 의관이 다른 인물이 있었다. 충청도 비인현 마량진 첨사 이동형(李東馨)이다.

 

이동형(李東馨)은 사쓰마 선박을 조선의 작은 배로 견인하여 파도가 잔잔한 곳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선내에서는 제안에 찬성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송하여 키와 돛대를 다시 만들고, 배의 수선을 부탁하고 물을 채운 뒤 일본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달라고 해서 자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선상에 찾아온 사람 중에는 관리가 아닌 자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은 마치 시장 한복판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중 야스다의 벼루함을 들여다보는 자들이 있었는데, 붉은 먹이 신기했는지, 손짓으로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야스다는 주묵(붉은먹)을 3개로 나누어 3명에게 나누어주었다.

 

뒤늦게 온 자는 그런 혜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도 벼루함 안에서 인주를 찾아내더니 조금씩 떼어내서 가지고 돌아갔다.

 

야스다가 문득 보니 인주가 반 정도로 줄어있어 ‘독’이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주자, 당황하여 돌려주는 자도 있었다. 야스다는 김시기라는 하급 관리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충청도 비인이라는 곳은 조선국의 동과 서중 어느 쪽에 위치하는가? 아니면 북쪽인가?”,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여기서 일본은 어느 방향에 있는가?”, “귀국에는 일본어 통역이 있는가?”

 

오후 2시가 지났을 즈음일까, 풍향은 어쨌든 조류는 배를 만 안쪽으로 이끌기에 좋은 상태였다. 즉시 조선의 작은 배와 사쓰마 선박을 이어 양쪽의 ‘격군(格軍)’이 힘을 합쳐, 만(灣) 안으로 이동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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