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군의회가 제2차 추경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서천군이 편성한 어르신 국외선진문화 탐방 예산을 약 절반 가량을 삭감한 것은 유감이다. 서천군이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은 그동안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어르신 세대에 대한 공경과 ‘효’의 정신을 후대에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업이라고 누차 강조했었지만, 그동안 군의회는 포퓰리즘 사업이라며 이 예산을 전액 삭감해 왔다. 하지만, 군의회의 김기웅 군수 포퓰리즘 사업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변명에 불과하다. 서천군은 그동안 참전유공자 해외 전적지 순례 행사, 초등학생 국제 우호 도시 문화탐방, 중학생 나라 사랑 역사 탐방 해외캠프 등 명목으로 약 3억 2,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한 전례가 있다. 지원 대상이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어르신으로 변경되었을 뿐 큰 틀에서 보는 사업의 목적은 유사하다. 또한 서천군의회는 지난 6월 노인복지 증진 사례 발굴 및 장수문화 체험을 위한 노인 국내외 선진문화 탐방 사업을 지원할 수 있도록 서천군 노인복지에 관한 조례를 개정했으면서도 정작 예산은 반 토막을 낸 것은 정책추진의 일관성마저 잃은 졸속사감이며 의회 본연의 사명을 벗어난 의회의 독단으로밖에는 평가할 수 없다. 특히 이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모 의원은 장난 섞인 표정과 음성으로 30%만 주지 뭐라며 조롱했다는 소리가 의회 밖에서 들리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예결위원도 아닌 군의회 의장이 예산삭감을 좌지우지했다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지난 군의회 행정사무감사특별위원회에서도 정회 시간을 이용하여 행감특별위원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큰소리로 위원들을 호통치는 사태가 일어 일부 위원이 반발한 사례도 있었다. 아무튼 군의회가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 사업 예산을 반 토막으로 칼질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초래하자 서천군의회는 어르신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인원을 줄이고자 했다는 둥 변명 아닌 변명으로 군의회의 결정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 서천군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과 유사한 사업들이 타 지자체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노인복지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또한 이 사업은 어르신에 대한 공경과 효 문화 증진을 위한 사업이라는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군의회가 집행부를 견제하고 집행부에서 승인 요청한 예산안을 심의 의결할 권한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동안 서천군의회의 행보에 견주어 볼 때 이번 예산 칼질이 명분이 있었는지를 의아해 보인다.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집행부에 대한 딴지걸기 예산심의의 전형적인 전횡이라는 의혹의 눈길이 이는 이유는 그동안 군의회나 군의원들의 행실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번 군의회의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 예산삭감과 관련하여 서천군 곳곳에서 서천군의회가 서천군의 효 문화에 상처를 냈다고 평가하며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탐방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삭감된 예산만큼 군민 성금이라도 걷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군민 성금 모금을 통하여 군의회가 군민의 뜻을 의정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독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이번 군의회의 독선적인 예산 칼질을 주도한 군의원들이나 이에 들러리를 서서 손을 든 군의원들에 대한 질책의 목소리도 높다. 일각에서는 버릇없는 망나니를 뜻하는 격앙된 표현으로 군의원들을 질타하고 나서기도 한다. 군의원을 잘못 뽑은 군민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군민 성금 모금 운동 전개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군의회의 권한은 군의원들의 고유권한이 아니다. 군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라는 점을 군의회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군의회의 결정은 군민의 의사에 반해서는 안 된다. 군의회 의장이 예결위에 들어가 의회의 결정을 좌지우지하고, 군의원들을 거수기로 전락시켜 끝내 군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내려 군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이번 군의회 예산삭감 사태로 기초의회 무용론이 다시 거론되고 있어 유감이다.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충남 김경제 서천군의회 의장 의정활동에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게다가 부패방지법 위반에 대한 의혹으로 경찰에 고발되고 예산안 심의에서도 부적절한 행태를 보이는 등의 의정활동을 문제 삼아 지역의 시민단체가 주민소환을 추진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지난 15일 시민단체 게시판에 ‘김경제 군의원 주민소환 투표 청구 준비와 관련한 안내의 말씀’이라는 제목 아래 김 의장의 주민소환 추진을 예고했다. 이 시민단체는 게시판을 통해 “주민소환투표 청구 준비위원회 구성과 대표자 선임, 청구인 서명 등 법적 절차 이행을 위해 법률대리인을 선임해 현재 절차를 선거관리위원회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민소환투표는 투표의 성격상 투표율이 저조해 대한민국 역사상 주민소환투표율 33.33%를 넘기지 못해 개표하지 못했던 점과 모든 주민소환투표 비용을 서천군이 부담해야 하는 점을 고려, 내년 국회의원 선거일에 맞추어 병합(동시)투표가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라고 전했다. 앞서 이 단체는 김 의장이 민간보조금을 받는 사회단체에 자신 소유의 상가를 월 임차액 55만 원씩 받고 부동산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월 임차액을 지속해서 받아온 행위 관련해 경찰에 고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군의회 추경 예산안 심의에서도 부적절한 의정활동을 보여 빈축을 샀다. 지난 14일 군의회가 군 집행부의 추경 예산안을 심의하는 회의 석상에 김 의장이 끼어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종용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에 따르면 김 의장은 이날 추경 예산안 심의 회의장에 들어와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 지원사업비 편성 예산안의 절반가량을 권했다. 앞서 이 사업비 심의 과정에서 이강선 의원이 약 20분 정도 해당 부서장에게 사업비 타당성에 대해 질의했고 이어 김아진 의원이 예산 중 약 30%만 남겨놓기를 제안했지만, 이지혜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은 원안 처리를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군은 어르신 중 사회적 약자 90명을 선발, 3박 4일 일본 후쿠오카 등의 선진지 견학 프로그램을 기획, 경비는 1인당 약 79만 원(자부담 20%)이 소요되는 국외 문화탐방 지원비용 5,700만 원의 예산안을 편성, 의회에 승인을 요청한 바 있다.
누구든 고향을 떠올리면, 가슴이 애틋해질 것이다. 자랑스러운 애틋함인지, 안타까운 애틋함인지의 차이는 있을 테지만 말이다. 서천에서 나고 자라며 교사라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서천이란 고향은 정서적 안정감의 토대이다. 서천의 교육 현장에 오기 직전까지도, 자랑스러운 애틋함이 지배적인 감정이었다. 서천의 교육 현장에 와, 나와 같이 서천이 고향인 아이들을 만나보니 안타까운 애틋함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서천을 과연 자랑스러운 고향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어떻게 하면 서천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천에 터를 잡고 살고 싶은 마음을 선물할 수 있을까. 현재도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 있다. 다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동료 지역민과 연대하기 위하여 부족하게나마 칼럼을 통해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공간은 물리적인 실체를 의미한다면, 장소는 물리적인 실체를 넘어 정서가 반영된, 의미를 지니는 곳을 의미한다. 캐나다의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와 장소 상실’이라는 저서를 통해 ‘장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생활 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토대’임을 밝혔다. 그렇기에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임을 말했다. 현대 산업사회의 직격탄 속에서 장소는 잃어지고 있다. 하지만, 서천은 여전히 장소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누구는 이를 시골의 정취라고 할 것이며, 또 누구는 여전히 발전되지 못했다고 평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장소성을 지닐 수 있는 공간으로 파악했다. ‘자연경관’과 ‘서천을 서천답게 했던 것’(미곡창고, 장항선 등)들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어떨까. 자연과 서천다움을 유지하되, 아이들의 생각을 반영하여 물리적 공간에 정서를 한껏 투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1학기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서천이란 공간에 매력을 느낄까’를 주제로 숱한 논의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매력적인 서천의 공간은 무엇인지, 서천다움을 살리면서도 현대인(정확히는 아이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상상하고, 말하고, 글로 쓰기를 반복했다. 물론 상상이 실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 과정 자체에 지역에 대한, 구체적으로 지역의 한 공간에 대한 학습적 경험과 그에 깃든 정서만으로도 장소화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서천 출신의 교사가 서천의 공간에 대한 자신의 장소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이번에 서해신문에서 아이들의 서천 공간의 장소화하는 방식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덕분에 아이들의 서천이란 공간을 장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천 지역민들은 분명, 다양한 공간을 장소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서천을 걱정하고, 여전히 서천에 발을 붙이고 삶을 영위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하면 서천의 아이들이 단순한 공간이 아닌 장소로서 서천을 기억하게 될까. 고향을 생각하고, 자랑스러운 애틋함을 느낄 수 있게 될까. 서천의 공간들로 하여금 나는 얻은 것이 많아, 서천이라는 지역 자체가 내게는 장소화되었다. 얼굴을 알든 모르든 어른들께 인사하면 칭찬으로 화답받던 신부락 시장, 친구들과 짧은 보폭으로 몇 시간을 우왕좌왕 걸어 도착하여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 송림욕장, 언니와 함께 배를 타고 군산을 오가며 독립심을 장착해가던 도선장, 주말 아침이면 가족과 함께 들러 깨죽을 먹으며 안락함을 느낀 닐다방! 벌써 9월의 중순이다. 가을의 초입이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날이 더워, 끝 여름이란 호칭을 붙이고 싶다. 끝 여름을 배웅하기에 이 서천이 얼마나 다정다감한가. 짠 내 나는 바다에서 뛰놀다 보면, 끈질기게 달라붙는 옷자락들과 그 사이로 소록 바람이 들어와 바다 향을 묻히는! 낮은 건물과 그 위로 차곡히 널어둔 빨래에 일몰의 노을로 색을 입히는! 환경에 대한 감상을 내뱉고는, 역시 서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또, 그 생각으로 하여금 서천의 삶을 영위하려 마음먹는 이들이 생겨나길 소망한다. 나의 고민과 감상, 소망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 만날 아이들이 많고, 어떤 깨달음을 줘야만 하는 사명이 있고, 무엇보다 서천을 잊히는 고향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1. 최고의 법은 무엇인가? 법이라고 모두가 똑같은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도 있고 덜 중요한 것도 있다. 이 말은 어떤 법은 지키고 어떤 법은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법에도 경중이 있다는 것이다. 범법자도 하나는 중범자로, 하나는 경범자로 취급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법의 불공평성도 있다. 권세 있고 힘 있고 돈이 있으면 법을 뚫고 나가기도 하고 특별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특별대접을 하기도 한다. 힘없고 약한 자들은 억누르고 무시하고 쉽게 체포도 하고 구속도 한다. 만민이 법 앞에는 평등해야 법의 질서가 서고 법치국가가 되는 것이다. 힘깨나 쓴다고 법을 초월하는 자들에게 따끔한 경고가 필요 할 때이다. 법 중에 최고의 법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법이 최고의 법이고 여기에 금할 법이 없는 것이다. 나의 조국, 나의 민족, 내 가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최고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약2:8) 2. 행동하는 지성(知性), 행동하는 양심(良心)을 가지라. 행동하는 지성, 양심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성이나 합리적인 방법에 따른 선별 의지를 전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다.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 행동하는 양심이 없으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요 죽은 양심이다. 죽었다는 것은 활동이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만이 능력이 역사한다. 죽은 지성 죽은 양심 죽은 신앙은 부패와 죄악이 관영할 따름이다. 요즈음 정치인이나 성직자나 권세 자 중에 행동하는 지성과 행동하는 양심가들이 많지 않다. 중범죄자와 도둑들이 많다. 내로남불이다. 자기 자신을 볼 줄 모른다. 상대방의 티는 보고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중환자가 많다. (마7:3-4) 빨리 병원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조물주(造物主)가 주신 지성과 양심을 회복(回復)하는 길만이 살길이다. 나 자신과 가정,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이다. 3. 혀를 바르게 사용(使用)하라 서양 격언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속담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하였다. 요즘의 국회의 대정부 질의나 답변을 보면 피파 망신 주기, 설전이 벌어진다. 국민과 시청자들은 짜증이 난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진정성 있는 질의·답변을 통해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말의 실수가 없다면 그는 온전한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다. 성경 야고보 3장 2절은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수했으면 실수로 인정하고 사과(謝過)하는 미덕을 갖고 사과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사과하면 오히려 큰 죄인으로 정죄(定罪)하는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영사해주고 그 인격이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큰 배라도 키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생에 있어서 혀는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지체이므로 혀를 바르게 사용하자.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의 언어는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그 나라를 움직인다. 국회의원들의 말과 행동은 악한 법이든 선한 법이든 입법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과 국가발전을 위해서 언행 심사를 바르게 해야 한다. 혀를 조장하고 잘 다스리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거짓말과 사기 치는 입술을 절제하라. 샘이 한 구멍에서 어찌 쓴물과 단물이 나오랴? (약3:11) 서로 중상모략하는 언쟁을 중지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혀의 사용 용어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우리 모두 덕 있는 말, 긍정적인 말, 위로의 말을 사용합시다. 정직과 진실한 말로 믿음을 주고 신뢰를 회복합시다. 최고의 법(法)인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으로 사회의 빛과 등불이 되고 혀를 바르게 사용하는 언행(言行) 심사를 통해 화목하고 화평한 지역과 이 나라 이 민족을 만들어 가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봅시다.
지난 9월 5일, 서천 문예의전당에서 몽골국립예술단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의 제목이 특이하게도 ‘서천아리랑’이었다. 호기심에 내용을 살펴보니, 전통예술단 혼과 몽골국립예술단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든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라 한다. 몽골과의 협연인데 어째서 ‘서천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어쩌면 몽골 예술의 근본은 노마드(Nomad)에서 비롯되고 우리의 예술은 그 뿌리가 아리랑에 닿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향은 다르지만 떠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있는 그 둘을 융합한 작품을 서천에서 첫선을 보이는 것이라면 ‘서천아리랑’이라는 이름이 썩 어울려 보인다. 절로 정감이 가고 입에 착 붙는다. 몽골국립예술단의 공연은 매우 흥미로웠다. 대초원의 창공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흐미’라 불리우는 독특한 발성법과 유목민족 특유의 활달한 춤사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마두금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악기들도 다채로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몇몇 악기는 현대적으로 상당히 개량된 것으로 보였고 합주에 필요한 좋은 음색을 갖고 있었다. 역시나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단답게 격조 높은 무대였다. 이날 무대에는 또 하나의 보석이 숨어 있었다. 서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고 웅장한 연주로 ‘서천별곡’이라는 곡을 들려주었다. 권해경 지휘자가 작곡했다는 그 곡을 들으며 서천의 예술이 풍성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서천의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감성으로 서천을 표현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더 많은 서천아리랑과 서천별곡이 태어날수록, 더 많은 서천의 시와 노래와 그림과 춤이 태어날수록 서천은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고장이 되어갈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서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밑그림을 그리고, 몽골국립예술단이 색칠을 했다면,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전통예술단 혼이었다. 그들이 날렵한 몸짓으로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몽골 초원에 봄이 오고 화사한 꽃들이 피어났다. 특히, 혼의 무용수가 들고 춤추는 공작선 부채와 몽골 무용수의 모자에 꽂혀있는 공작 깃털의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그 예상치 못한 이어짐에 짜릿한 동질감을 느꼈다. 공작선과 공작모가 한 몸처럼 어우러져 마치 공작새가 춤추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천과 몽골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연은 노력에 의해 필연이 된다. 서천의 공작부채와 몽골의 공작모자를 어떤 이는 우연의 일치로 여기겠지만 나는 필연이라 생각한다. 그 필연은 십 여년 전 한 기업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몽골로 사업을 넓히면서 알게 된 몽골 예술인들을 서천의 예술인들과 연결시켜준 서천기업인협의회 장현기 회장이 아니었다면 서천과 몽골의 인연은 시작되지 않았고 이번 공연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장현기 회장의 후원 아래 몽골국립예술단과 서천의 전통예술단 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2015년에 몽골에서 혼의 첫 공연이 성사된 이후 해마다 서로를 방문하며 공연을 이어왔다. 서천의 문화유산을 활용하기 위해 애쓰던 혼은 한산면에 전래되어온 공작선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드는 등의 노력으로 충남을 대표하는 무용단으로 성장했고, 몽골과의 협연도 결실을 거두어 ‘서천아리랑’이라는 작품에 이르게 되었다. 예술을 통해 문을 연 서천과 몽골의 인연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지난 7월에 김기웅 서천군수가 몽골을 방문해서 몽골정부와 우호증진협약을 맺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교류가 한 단계 더 성장하여 다방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몽골국립예술단도 서천을 교두보 삼아 한국에서의 입지를 넓히고 있다. 이번 방한에는 서천 뿐만 아니라 충남도청을 비롯해 부여, 청주, 아산, 대전, 계룡 등을 혼과 함께 순회하며 합동공연을 펼쳐 그들의 명성을 높였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미래가 된다. 전국 228개 기초 자치단체 중에서도 인구 수로 172위인 작디 작은 서천이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15배가 넘는 나라를 상대로 이러한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간 몇몇 사람이 보이지 않게 기울여온 노력이 이제 조금씩 빛을 보고 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들을 돕고 우리가 힘을 더해준다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침 가을이다. 새삼 풍요롭고 아름다운 서천의 가을이다.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는 고령 신씨가 세거하면서 17세기 당대의 8문자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특히 숭문동은 조선의 대표적 3대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 임벽당 김씨,와 함께 명성 떨친 여류시인 부용당 신씨의 고향이다. 진택 신광하의 여동생 부용당 신씨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조선의 대표 3대 여류시인(女流詩人)을 말한다면 신사임당(申師任堂), 임벽당 김씨(林碧堂 金氏), 그리고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 1732∽1791)를 말한다. 임벽당 김씨와 부용당 신씨는 서천이 낳은 여류시인이다. 비인 남당리 임벽당은 15세기, 신부용당은 17세기의 여류시인이다. 대표적 3대 여류시인 중 2명이 서천 인물이다. 부용당 신씨는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서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첨추공 부친 신호(申皓 1687∽1767)의 딸로 태어났다. 부용당 신씨의 가문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를 비롯하여,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의 오빠들은 당대 문장가로 널리 명성을 날렸다. 부용당 신씨도 오빠들처럼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후손들도 문장가를 낳아, 숭문동(崇文洞)에서 배출된 문장가들이 명성을 남겼다. 부용당 신씨는 석북 신광수의 이복동생이다. 부친 신호(申澔)와 모친 성산 이씨(星山 李氏)는 석북 신광수와 신광연을 낳았고,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둘째 부인으로 보령 청라 이천령(李千齡) 따님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결혼하여 신광하와 부용당 신씨를 낳았다. 부용당 신씨는 3명의 오빠로 하여금 수업을 받았기에 문학가문의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 석북 신광수 막내 여동생 문인이 되다. 조선시대에는 남성 사대부가 문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써 문인으로써 작품을 남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용당 신씨 이전에는 허난설헌(許蘭雪軒), 신사임당(申師任堂), 우리 고장 비인 남당리 임벽당 김씨 등 몇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석북 신광수 4남매의 막내였던 부용당 신씨는 별호를 산효각(山曉閣)라고 하였다.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과 어울려 오빠들에게 시문을 배웠다. 그동안 부용당 신씨의 삶과 문학에 관한 연구가 없었다. 부용당 신씨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5년 석북 신광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간행한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숭문연방집은 우리 고장 한산(韓山) 숭문동(숭문동-현 화양면 활동리)에 세거한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 부용당 신씨의 문집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숭문연방집의 해제는 당시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이 해제를 썼다. 특히 진택집(震澤集)은 진택공의 종7대손 신완식(申完植)과 이가원 회장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필사본으로 영인발간 하였다.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부용당집(芙蓉堂集)이라고 한 것이 여러 권이 있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신씨는 많은 작품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나 소수만 남아있다. 2. 결혼 전 조카들과 함께 공부하다. 석북 신광수의 4남매는 숭문북동(숭문북동-현 화양면 대등리)로 새 집터를 마련하고 새집을 짓고 1750년 새해를 맞아 신년의 감회와 다짐을 하는 시(詩) 신제춘사(新第春詞)에 4남매와 아들딸들이 함께 새집에서 글공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새집이 이미 새로 이루어졌고/새해가 새로 왔네./영화스러운 빛이 초목에 피어나고/물건들이 모두 절로 이루네./봄 술도 또 새로 익었으니/당(堂)에 올라 부모님께 헌수를 하네./형제와 누이들이 문장으로 서로 우애하고/아손(兒孫:자기 아들과 손자)들이 다시 열을 지어/모두 시와 글을 외우네./가다가 부로(父老:나이 많은 어른)들을 만나면/들 사람 모습이 조금도 꾸밈이 없네./관장(官長:군수)의 일은 말하지 않고/다만 농사일만 이야기 하네/풍년들어 의식이 족하고/구실 돈은 기한을 어기지 않으니/이 밖에 더 무엇을 바라리오./맑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으려 하네./【新舍旣新成。新年復新至。榮光發卉木。物物咸自遂。春酒亦新熟。上堂壽父母。兄弟及少妹。文章自相友。兒孫復成列。詩書誦在口。時遇近父老。野態無餙辭。不言官長事。但道桑麻時。豐年足衣食。租賦無愆期。此外何所求。淸心以爲師】 석북집 <신석초 역> 큰오빠 석북 신광수와 부용당 신씨는 이복(異腹: 어머니가 다른) 남매로 나이 차이가 20여 세나 되고, 부용당신씨 큰오빠 아들인 조카들과 나이가 비슷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또래이자 나이 어린 조카들과 함께 벗처럼 자랐다. 부용당 신씨의 넷째 조카인 신석상(申奭相 1737∽1816)이 지은 ‘제고모윤부인문(祭姑母尹夫人文)’을 통해 부용당의 생전 모습을 알 수 있다. “숙질간으로 나이가 서로 같고 도(道)가 서로 같다면 숙질이면서 친구이니, 어찌 남녀 간이라 하여 차이가 있겠는가?--생략-- 소자의 형제 다섯 명은 고모와 나이가 들쑥날쑥 차이가 났지만, 위아래로 서로 돕고 함께 책을 배우고 글을 짓고 음식을 먹고 장난을 치며 함께 즐겼다. 그 후 부인은 나이가 더욱 들어가니, 배운 것을 버리고 거의 글자를 잊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부용당 신씨와 조카들과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석북 신광수는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아들 신석상은 고모와 함께 공부하고 글을 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 신씨도 함께 공부한 것으로 여류시인으로 작품을 남기는데 세 오빠의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3. 궁핍한 생활고로 친정 숭문동과 외가인 보령으로 이사 가다. 부용당 신씨는 1750년 19살 나이로 해남윤씨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 윤운(尹惲)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 윤운(尹惲)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 처조카이기도 하다.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부인은 해남윤씨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딸이다. 또한 신광수 부인은 친정에서는 올케가 되며, 시댁에서는 시고모가 된다. 부용당 신씨는 결혼 초에는 해남에서 살다가 친정인 숭문동으로 이사를 와서 당분간 살았다. 1759년에 보령 외가에 농토를 얻어 한산 숭문동을 떠나 부용당 신씨는 큰아들 윤규영(尹奎永)과 둘째 윤규응(尹奎應-초명:尹持訥)을 데리고 보령 신성(현재 주포면 보령리)로 이사 갔다. 오빠 신광수는 동생 부용당 신씨가 외가로 떠나는 모습을 시로 남겼다. 그리고 큰오빠 신광수와 신광하는 보령을 자주 찾아갔다. 보령 청라의 외삼촌 이제암(李齊嵒)과 외사촌 이우경(李羽慶)의 도움으로 곤궁한 생활을 견디며 살아갔다. ‘보령 외가에 논을 빌려 농사지으러 가는 여동생을 이별하며’의 시에, “5월 신성(新城) 가는 길에서 너를 이별하자니/총총히 떠나는 네 모습이 가련하구나./가을걷이 끝나면 다시 만날 줄 알지만/병중이라 만사가 흩어지는 일이 많고/먼 길이라 편지도 때에 맞추기 어려우리/문까지 따라가 제일 우는 녀석은 누간가?/어미 없이 졸졸 따랐던 내 셋째 아이놈일세./”라고 한 것으로 친정과 외가댁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4. 결혼 23년 만에 남편 잃어 부용당 신씨는 결혼 23년(1773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 윤운(尹惲)은 윤선도(尹善道)의 5대손이고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니 부용당 신씨로서는 명가에 시집을 간 셈이었다. 당시 43세인 부용당 신씨는 두 아들을 두었고 또 다른 아이를 뱃속에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자 부용당 신씨는 순절하기로 결심을 세웠다. 보령으로 조문을 갔던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의(義)이겠으나, 뱃속에 있는 유복자를 가지고 따라 죽는 것은 의(義)가 아님이다”라고 하니, 부용당 신씨는 흐느끼면서 “내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또한 그리하려는 것이었느니라, 이제 너의 말을 듣고 내 어찌 차마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남편을 따라 자살하려 하였으나, 신광수의 아들인 조카 신석상(申奭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큰아들 윤규영과 12살 둘째 아들 윤지눌(윤지눌-개명 윤규응)을 두었고 그 후 유복자 딸을 낳았고, 딸은 여주 이씨(呂州 李氏) 이치범(李治範)에게 시집을 갔다. 5. 둘째 아들 윤규응 진천군수 제수와 모친 삶의 마감 신부용당은 2남을 두었었는데 큰아들 윤규영(尹奎永), 둘째는 초명에 윤지눌(尹持訥)로 쓰다가, 순조 1년(1801년) 윤규응(尹奎應)으로 개명하였다. 개명하게 된 사연은 천주교 박해 시절 윤지눌(尹持訥)의 6촌인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건인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여 역적의 항렬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이유로 조정에 개명을 요구, 허락받아 개명하게 되었다. 신부용당은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4년(1790년) 29세 나이로 문과 병과 1등으로 뽑혔다. 정조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최단기에 승진하니 주변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평양 상원군수(祥原郡守)를 거쳐, 진천군수(鎭川郡守)로 부임하게 되어 부용당 신씨는 아들을 따라가 그곳에서 살다가 삶을 마쳤다. 윤지눌(尹持訥)은 아들이 없어 당숙 윤지경(尹持敬)의 셋째아들 윤종구를 양자로 입양하였다.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9년(1795년) 정조가 주서(注書)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정조는 다른 유모씨(柳某氏)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지눌(尹持訥)은 외사촌 정약전(丁若銓)을 천거하였다. 정조는 다시 다른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바꾸지 않았다. 정조는 진노하고 철월부(鐵原府)로 귀양을 보냈다. 외사촌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귀양가는 윤지눌(尹持訥)을 전송하며, “첫 번째 쇠북소리에 혜화문이 열리더니/ 산 넘고 물을 건너 북으로 가는 길 겹겹이로세/ 산이 대신 일산을 펴 외로운 말을 맞고/얼음발을 안개가 내려 구룡을 숨겨주리/다행히도 잠시나마 청쇄달에서 놀아지만/ 우리 함께 백운봉을 오를 때만 같겠는가/ 듣자하니 신진 축에 뛰어난 인물 많아/ 검은 머리 붉은 얼굴에 감정 자태 다 좋다네./”라고 위로하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딸 윤소온(尹小溫 1728-1770년)이다. 부용당 신씨는 다산 정약용의 외숙모가 된다. 신부용당 아들 윤지늘(尹持訥)은 귀양을 마치고 외가인 당시 한산군 활동리(숭문동)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면서 서천군(舒川郡)지역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후 부친과 모친 부용당신씨, 아들 윤지눌의 묘는 본가인 전남 해남군 화산면 신리로 이장하였다. 申芙蓉堂 詩 ‘늦가을’ “가을 산의 나무여, 비단 장막이 되었고(山木秋兮錦帳)/내려앉는 기러기여, 내 낀 물가로구나(下鴻羽兮烟汀)/산 빛이여, 찬란히 붉고(山光兮粲)/강 빛이여! 푸르고 푸르도다(江色兮蒼蒼)/”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서면에 있는 한국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본관 5층 보일러실 배관에서 밸브가 폭발해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화상 등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게다가 장항국가산업단지 내 있는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 공사 현장에서도 2명이 도장작업 중 쓰러져 병원 후송 후 치료받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해 기업의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경찰과 소방 당국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39분경 일상점검 중 보일러실 배관 밸브가 터지면서 1명이 사망했으며, 3명은 중상을 입는 등 총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경찰과 소방 및 고용노동부 보령지청 근로감독관 등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한편 보일러 밸브의 압력을 낮추고 수증기를 빼내는 작업을 진행하는 등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에 나섰다. 경찰·소방 당국·노동 당국은 발전소를 대상으로 자세한 사고 경위와 안전 조처 위반 여부, 중대재해처벌법·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각각 조사할 예정이다. 또 사고 발생 사실을 인지한 즉시 현장에 도착한 근로감독관은 사고 내용 확인 후 근로자 안전 확보를 위해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상시근로자 50인 이상 또는 공사금액 50억 원 이상인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 사고가 발생할 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 등을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경우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한 경우 ▲동일한 유해 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한 경우 등이 적용된다. 또한, 이날 오전 9시 24분경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건물 지하 주차장에서도 도장 작업 중이던 2명의 근로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인근 병원에서 치료받고 귀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소방 당국은 사고 현장인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에폭시 도장 작업을 하던 중 질식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다. 이번 사고는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에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역의 한 시민단체는 “준공 2년밖에 안 된 신서천화력발전소의 설비에서 발생한 만큼 안전사고에 대한 대처가 부실했던 것 아니냐”라며 “뷰티사이언스 공장 역시 지난해 분쇄·혼합기 청소작업 중 오작동으로 근로자 1명이 오른팔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입주 이래 잦은 사고 발생은 안전불감증에서 나온 결과”라고 지적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지금 우리 사회에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충남 서처군 화양면에 거주하는 정규호(74) 씨가 sbn뉴스와 인터뷰 자리에서 첫 번째로 전한 이야기다. 서천군청 홈페이지 ‘칭찬합시다’에 지난 5년간 총 27회의 글을 올린 그는 남을 칭찬해야 나 자신 역시 칭찬받을 수 있는 등 서로 칭찬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난 2018년 1월 ‘컴퓨터 기초 제대로 배워 실력 다지기 윈도우7 강사님을 칭찬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첫 ‘칭찬합시다’의 글을 올린 그는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칭찬했다. 현재 그의 ‘칭찬합시다’ 글의 조회 수는 무려 4,000여 개 넘었고 이와 비슷한 조회 수를 기록한 글은 같은 해 2월에 올린 ‘서천교육청 소속 기관 서천도서관의 컴퓨터 교육 강사를 칭찬합니다’의 글이다. 부인과의 결혼이 펜팔로 이뤄졌다고 하는 그는 문헌서원에서 시를 쓰며 남은 삶 동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겠다고 전했다. ‘칭찬합시다’에 올린 글 중 가장 기억이 남는 글에 대해 그는 지난해 6월 ‘서천소방서 전종원 소방관 칭찬합니다’라는 글이라며 지방 일간지에도 보도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글을 통해 ‘제32회 한산모시문화제 행사장 서천소방서에서 어린이 화재 예방 캠페인 차 안에 설치된 동영상 보고 싶어 소방관에게 문의했는데 친절하게 안내해 줬다’라고 전했다. 이날 그는 아파트 화재 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안 되고 반드시 계단을 통해 피신하는 방법과 심폐소생술, 소화기를 직접 분사 등의 체험 학습으로 용기를 갖고 자신 있게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그의 신념은 고스란히 아들 정강진 박사(건양대학교 의과대학원)에게 전달돼 암세포 기전을 규명하는 논문 발표로 제10차 대한암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우수논문상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서천군청 홍보지에 예전에 있었던 ‘칭찬합시다’라는 보도 창을 만들어 지역 내 많은 군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하면 더욱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건의했다. 또 착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멸시하고 짓밟는 대신 그들을 격려하며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5년 대통령 훈장을 받고 퇴직한 공무원으로 현재 배움터지킴이를 하는 그는 마지막으로 책 한 권을 소개했다. 그는 미국의 소설가 마거릿 미첼이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를 소개하며 이 책은 우리가 결코 잊지 못하는 것 중 하나라고 꼭 읽어 보기를 권했다.
충남 서천지역 내 산업현장의 안전불감증이 심각하다. 최근 장항국가산업단지에 입주기업인 선진뷰티 사이언스 공사 현장 지하에서 에폭시 도장작업 중 작업 인부 2명이 가스에 질식되어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이 회사에서는 지난해에도 공장 2층 분쇄 작업실에서 분쇄·혼합기 청소작업 도중 갑작스러운 혼합기 오작동으로 생산직원 1명의 오른팔이 절단되는 인사사고가 발생했었다. 이 회사는 화장품 원료 제조회사로 2019년 6월 장항국가산업단지에 스마트팩토리 제조시설을 갖춘 신공장을 준공하여 입주한 이래 매년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발생해 지역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 같은 날 서면 마량리 소재 신서천화력 발전본부 5층 보일러실에서는 배관 파손으로 누출된 증기로 인해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산업재해 발생 때 산업안전사고 발생의 원인에 따라 책임자를 처벌해 왔다. 하지만, 산업과 건설 현장에서 지속해서 안전사고에 따른 사망사고가 잇따르면서 정부는 2022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여, 1명 이상의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중대 재해의 경우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강력한 법 규정을 마련했다. 이 법이 시행된 지 2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산업현장에서의 재해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1명 이상의 사망사고 발생 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영주 등 책임자를 형사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업현장에서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하다. 법률 시행 후 이 법 위반 제1호는 2022년 5월 연세 나을 암 요양병원 증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와 관련하여 대표이사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현장소장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제2호는 2023년 3월 한국제강 방열판 보수작업 중에 발생한 사망사고로 대표이사가 징역 1년의 실형을, 하청 업체 대표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번 신서천화력 발전본부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사고도 근로자 사망사고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엄정한 수사와 함께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의 혐의 사실이 입증되면 대표이사를 포함한 경영주와 관리책임자 모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산업안전 예방조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중해도 항상 모자란다. 또한, 산업현장에서 사업장의 특성에 따른 유해·위험 요인을 확인하여 개선하고, 안전보건관리책임자, 관리감독자, 안전보건 총괄책임자 등을 선임하여 산업현장에 상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책임은 전적으로 경영주에게 있다. 선진 뷰티 사이언스 공장신축 현장에서 발생한 안전사고도, 비록 근로자가 사망에는 이르지 않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저촉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매년 지속해서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영주의 대오각성이 촉구된다. 특히 공사 현장에서 불법 하도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의 경우, 안전 관리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사고로 원천적으로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우리 서천의 수산업 분야 노동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계절근로자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안전 관리 감독에도 철저히 해야 한다. 지리적 특성으로 대륙 국가인 몽골 출신 계절근로자를 낯선 바다로 내보내 김 양식장 등에서 노동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안전사고의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안전사고 예방 교육 및 안전관리자 상근 등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지방정부의 노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안전불감증은 늘 예기치 못한 재해를 불러온다고 하지만,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은 산업재해를 불러오는 신호수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안전사고는 사고 발생 후 살펴보면 예견되어 있었고, 안전불감증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이제 우리도 산업현장에서 안전보건과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주의를 우선시해야 한다. 순간의 방심이 대형 사고를 유발한다. 우선 산업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안전관리를 위하여 방심은 금물이라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경영주 또한 안전보건을 위한 사전점검과 산업환경 개선 및 관리·감독을 강화하여 산업안전 재해로부터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경영철학에 담아야 한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내 부족한 인력공급을 위해 투입된 외국 근로자들의 근로환경 및 인권 문제 해결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몽골 근로자들의 4대 사회보험 가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지병으로 인한 병원 치료가 무방비 상태로 놓이는 등 외국 근로자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요구되고 있다. 군에 따르면 몽골 옥탈채담군에서 1차 입국한 계절근로자 122명이 지난 7월 29일 서천군에 도착,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지역 내 19개 멸치 가공공장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일부 멸치 가공공장에 마련된 몽골 근로자의 근로 고충 등 인권 문제가 발생하고 숙식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 9일 한 멸치 가공공장에서 식사 중이던 한 몽골 계절근로자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쓰러져 원광대학병원으로 후송돼 ‘뇌출혈’ 증세로 치료 중이다. 평소 고혈압을 앓고 있었던 이 근로자의 치료비는 약 5~600만 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다. 이는 이 근로자가 4대 사회보험에서 산업재해보험만이 가입돼 국민건강보험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수백만 원에 달하는 진료비는 현재 치료받는 몽골 근로자가 부담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이에 몽골 근로자에 대한 인권 존중과 고용주의 배려가 요구되고 있다. 거기에 몽골 계절근로자의 숙식 등 근로환경이 열악하다는 지적이 나와 김 양식장에 투입될 200여 명의 계절근로자 입국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한 군민은 “그동안 김기웅 군수의 몽골 방문과 협약 등의 업적 홍보에만 열을 올렸던 민간관계자들도 이들 계절근로자의 근로환경과 인권에는 무관심해 왔다”라며 “근로 현장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라고 촉구했다. 100여 명의 몽골 근로자의 고충을 해소할 통역사가 1명이라 점도 문제다. 서면 지역 한 군민은 “한국어에 능통한 몽골 유학생 출신 통역사 1명이 몽골 근로자 122명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느냐”라며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방관한 서천군의 행정이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현재 치료 중인 몽골 계절근로자에 대한 치료비는 지역의 복지단체를 통해 해결 책을 마련하고 있다”라며 “몽골 계절근로자에 대한 근로환경 및 인권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모색해 서천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관리 감독에 나서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오는 10월 김 양식 어가에 투입될 200여 명의 몽골 근로자의 숙소 환경 및 음식 문제 해결, 인권유린 등을 위한 방안 등을 마련하는 서천군의 적극적인 행정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잃기 전에는 가지고 있던 게 뭔지 모른다.’ 즉, 우리의 옛말 중에도 구관이 명관(名官)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정치지도자 클레망소도 이를 이처럼 말했다. ‘나쁜 정치인 X을 바꾸려고, 새로 뽑았더니 그보다 더 나쁜 정치인 X이 뽑히더라’ 지난 20대 국회에 진저리가 나, 이를 바꾸자며 치른 게 지난 2020년 4.15 제21대 총선이다. 무려 55% 이상의 초선, 새 얼굴로 바뀌어 정치 문화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처럼 초선의 구태정치 청산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21대 국회 개회부터 초선의원들이 싸움닭이 되어 분탕질과 온갖 편 가르기에 떼쓰기, 보이콧으로 얼룩지게 했다. 터지는 사건마다 들춰보면 국회의원이 개입되지 않은 곳이 없고, 이권과 유착된 금배지들이 수두룩하게 연루되어있다. 상임위원회 회의장에서 코인 투자를 하지 않나, 자신의 사무실 여성 보좌관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나, 지방 선거때 공천헌금을 받지 않나, 특정사안에 후원을 가장해 금품을 받고 검찰 수사를 받지 않나, 거짓 루머를 제보로 포장해 해당 장관에게 의혹을 제기하지 않나. 이는 이전 20대 국회보다도 더 저질이다. 심지어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공수가 교대되면서 생기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곳곳에 벌어진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사업을 밀어붙이던 의원들이, 야당이 된 날부터는 안된다고 싹 돌아섰다. 또 안 된다고 하던 국민의힘 역시, 여당이 되고 보니 더불어민주당이 외치던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자신이 검사일 때 검사 수사권 강화가 먼저라고 외쳐대던 국회의원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총대를 멘 사실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금배지들이 ‘카메라 앞에 힘을 주는’ 말장난의 모습들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런 21대의 정치혐오와 정치증오를 거둬낼 내년 4.10 제22대 총선이 오는 9일이면 7개월 앞으로 다가와정치인들은 분주해졌다. 책을 내고, 조직을 갖추고. 총선 출마 예상자는 지인들에게 후원금을 약속하고 다닌다는 얘기도 있다. 특정 광역단체장의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광역단체장이 자신을 밀고 있다’라는 소문이 파다해 선관위가 내사 중인 곳도 있다. 내년 총선 자료를 보면 대전·세종·충남·충북지역 28개 선거구에 예상되는 인물은 100여 명 안팎이지만, 국회의원 감이 없다. 지금의 제21대 현역 국회의원보다 인물이 출중하거나 자질이 빼어난 이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면서 필요에 따라 진보를 자처하며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또 시대가 바뀌니 보수집회에 나선 이도 여럿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4.10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 개정과 관련,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만지작거린다. 사표 방지와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쉬워지라는 기존의 준연동형제를 병립형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들은 지난 21대 총선에서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준연동형제 취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래 놓고 기득권 사수를 위해 정치적 퇴행의 길을 가려는 모습이 불쌍해 보인다. 그들은 최근 물밑 협상에서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으로 가닥을 잡았다. 권역은 크게 수도권과 중부권, 남부권으로 나누기로 했다. 충청권은 중부권이다. 그러나 비례제 의석수 배분 방식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020년 총선에서 여야는 정당 득표율과 지역구 의석을 연동하는 대신 초과 의석 문제를 방지하는 준연동형제로 공직선거법을 바꿨다.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기 때문에,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이 쉬워진다. 양당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보다 최소한의 제도적 보완 장치였다. 그렇지만 양당은 지난 총선에서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애초의 취지를 퇴색시켰다. 양당을 그래 놓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별도로 계산하는 병립형으로 검토 중인 것이다. 이는 야합이다. 내 손으로 우리를 대변할 금배지를 뽑는 지금의 제도적 장치가 먼저다. 여야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 밀어붙이는 것은 꼼수다. 꼼수정치에는 감이 안되는 금배지들이 나와 기대되는 정치개혁은 물 건너간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지 오래인 국회, 7개월 남은 총선은 서글픈 현실이다.
[sbn뉴스=서천] 이석규 기자 = 충남 서천지역 시가지 주요 도로변에 흉물로 변한 ‘생활정보지 배부함’에 대한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일부 군민이 배부함에 생활 쓰레기 등을 버리고 있는 데다가 일부 정보지 배부업체 역시 이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고 도로변에 방치하는 등으로 군민의 불만을 사고 있다. 복수의 제보자에 따르면 서천·장항읍 시가지 도로변의 40여 개의 ‘생활정보지 배부함’이 곳곳이 녹이 슬어 흉물로 변한 지 오래인 데다 인도에 버젓이 설치돼 보행자들의 통행 불편을 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일부 ‘생활정보지 배부함’ 속에는 각종 쓰레기와 오물들로 가득 차 있고 일부 노후 배부함은 이리저리로 나뒹굴고 있어 도시미관까지 해치고 있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 다양한 생활정보지가 생겨나면서 시가지 도로변 거리 곳곳에 생활정보지 배부함이 마련됐지만,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군에 따르면 거리나 도로 곳곳에 제멋대로 놓여 있는 ‘생활정보지 배부함’은 도로법 제38조에 따라 무단 도로점용에 해당하는 불법 설치물이다. 이에 인도를 점거해 보행자 통행에 불편을 주는 ‘생활정보지 배부함’ 등에 대한 단속 및 정비작업을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천읍에 거주하는 한 제보자는 sbn서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도로점용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도로변 등에 설치된 일부 ‘생활정보지 배부함’은 버려진 음식물쓰레기 등으로 파리 등 해충이 들끓고 있어 도시 미관을 해치고 무질서한 도시로 오인하게 만든다”라고 비판했다. 또 한 제보자는 “‘생활정보지 배부함’이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곳곳이 녹이 슬고 찌그러지는 등 흉물로 변한 지 오래고 정보지 넣는 곳까지 서로 뒤엉켜 있어 흉물로 취급받고 있다”라며 “일부 배부함은 오랜 시간 먼지가 쌓여 있는 등으로 산뜻한 거리환경을 해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이렇듯 수년간 사용이나 관리도 하지 않은 채 흉물스럽게 시가지 주요 인도상에 방치돼 통행에 방해가 되고, 쓰레기 수거함으로 전락한 ‘생활정보지 배부함’에 대한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지역 내 설치된 ‘생활정보지 배부함’은 지역 내 몇 개가 설치되어 있는지 실태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다 사유재산이라 행정기관에서 마음대로 처리하기도 곤란하다”라면서 “하지만, 지속적인 민원 제기를 해소하기 위해 행정대집행을 통해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도시경관을 해치고 있는 배부함을 조속히 정비하는 등 쾌적한 주거환경 조성에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도로변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趙貞喆)의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조정철의 거사비가 세워진 내력과 그는 어떠한 인물이며, 조정철은 정조 암살미수 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기간 조정철을 위해 목숨과 바꾼 홍윤애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버스 정류장 옆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 거사비(忠淸道觀察使 趙貞喆 去思碑)가 서 있다. 순조 15년(1815년) 10월에 세워진 비석으로 우리 고장 서천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세웠다. 거사비를 세우게 된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마 순조 13년(1813년)에 조정철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던 해로 전국적으로 대기근으로 백성이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 호서지방에 1만 석으로 진휼한 것을 보면 구휼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관찰사 조정철(趙貞喆:1751-1831)은 본관은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서천읍 구암리에 안장된 우의정을 지내고 영조를 왕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조태채(1660-1722 :二憂堂 趙泰采)의 증손자다. 정조 1년(1777)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남인을 등용하여 개혁을 내세우자 노론의 세력은 불안을 느끼고 정조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조정철도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 생활하게 된다. 유배지에서 홍윤애를 만나 사랑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한 홍윤애는 죽음으로 조정철를 지켰다. 유배하는 동안 조정철(趙貞喆)이 역모의 대역죄를 짓고 제주도에 유배 생활 하는 동안 제주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정조 암살미수 사건의 배경 제주도는 절해고도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고려, 조선시대에는 대역죄인의 정치적 수용소인 유배지였다. 제주도에 유배당하면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많은 유배자 중에 조정철만큼 오랜 기간 고초를 겪으면서 유배 생활을 한 사람 없다. 무려 27년간의 유배였다. 정조 1년(1777) 8월, 정조 임금을 시해하고 은전군(恩全君)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주동자와 연루자들이 줄줄이 잡혀 들었다. 조정철은 그때 27세의 장래가 촉망되던 준수한 청년 선비로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조영순(趙榮順),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조겸빈(趙謙彬), 증조할아버지는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으로 유명한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였으니, 당시 조선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순조롭게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장인(丈人)은 노론 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洪趾海)였다. 온갖 행운은 그의 것이었고 세상의 모든 길은 그를 향하여 뻗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모 사건이 들통나고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 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그 순간부터 그의 목숨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금의 목숨을 노리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모반의 죄는 어떤 왕조에서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2. 역모 사건의 대역죄는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단행 조선왕조는 역적에게는 부계(父系)는 물론 모계(母系)인 외가(外家)와 처계(妻系)까지 삼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고 있었다. 중죄 중의 중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죄가 반역죄였다. 달리 일컬어 대역죄라 했다. 조정철(趙貞喆)은 장인 홍지해(洪趾海)의 정조 시해 미수 사건으로 연루되어 반역자로서 죽음을 면치 못하였지만, 조정철은 증조부 조태채(趙泰采)는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공신을 참작해 생명을 부지한 채 제주도 유배 생활에 처했고, 그 후 조정철의 부인 홍씨는 8개월 된 아들을 두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3. 제주도 유배지에서 홍윤애의 만남 명문의 거족 27세인 조정철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심성이 좋은 김윤재(金潤才)의 집에 거처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죄인이 유배 생활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이웃에 살던 스무 살 아가씨가 홍윤애(洪允愛)를 만나게 된다. 제주의 돌담은 낮다. 목만 돌리면 집 마당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낮은 까닭에 이웃 간에는 숨길 것도 없고 서로의 사정도 저절로 알게 마련이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가 가장인 집에서 언니와 쌍둥이처럼 사이좋게 살아가는 홍윤애(洪允愛)에게 서울에서 귀양 온 유배객 조정철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그의 조용하고 신중한 처신과, 항상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시를 짓는 선비 중의 선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변소를 출입하기 위해 마당에 나온 그의 파리한 얼굴과 마주치거나 여윈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 한편이 저미도록 동정심이 갔다. 밥값을 한 푼도 못 낸 지 이미 오래고 그의 처지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게 된 홍윤애는 용기를 내어 김윤재의 아낙을 찾아가 자기가 그분을 돌보아드리겠다고 자청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그녀는 바느질삯을 알뜰히 모아 조정철의 식사와 의복을 수발하는 데 남모르는 정성을 기울였다. 홍윤애가 조정철을 위하여 마련하는 밥상은 소박하고도 조촐했다. 또한 그의 의복, 의복이래야 죄인에게 허락된 것은 흰 무명저고리바지가 고작이었으나 정성껏 지어 입혔다. 4. 집필묵과 도서 구입의 경제적 도움 조정철은 시인(詩人)이었다. 서책(書冊)은 그에게 스승이며 벗이며 정신의 버팀목이기도 하였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 시를 짓는 일은 그에겐 육신의 양식인 밥보다도 더 소중한 영혼의 양식이었다.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 기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글에 대한 갈증이었다. 어느 날, 조정철이 손가락에 물을 찍어가며 벽에 시를 쓰는 것을 목격한 홍윤애는 그만 왈칵 눈물이 솟구치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날로 그녀는 어머니가 생전에 마련해 주고 간, 시집갈 때 쓰라는 비단 옷감을 돈으로 바꾸었다. 그 돈으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섬에서는 구하기 어렵고 귀한 물건인 먹이며 붓, 종이는 물론 서책도 육지를 오가는 상인에게 부탁하여 구하였다. 행복의 절정에서 느닷없이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진 신세였으나 어떤 액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 조정철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정의 손길이 고요히 다가와 그를 감싸고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줄기 맑은 샘물과 같은 홍윤애의 마음씨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조정철에게 따스하게 흘러들어 희망의 빛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홍윤애는 행동에 조심에 조심을 더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채워져 있는 가혹한 운명의 족쇄를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5. 공포가 드리워지는 조정철의 유배 생활 지금의 정조임금님이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놓여날 수 없다고들 했다. 어느 날 조정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 사약(賜藥)을 가진 금부도사가 내려올지 모른다 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짙게 드리워진 조정철의 절망,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피비린내를 몰고 광풍(狂風)은 발자국을 죽이며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당파가 서로 달라, 오랜 견원지간인 김시구(金蓍耈1724∽1795)가 정조 5년(1781)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판관 황윤채와 짜고 조정철을 제거하고자 했다. 제주목사에게는 다른 곳의 수령들에게는 없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선참후계권(先斬後啓權), 모반을 획책한 대역죄인인 경우 먼저 베고, 나중에 상황을 적은 장계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는 권한이었다. 제주는 육지와의 사이에 거친 바다를 두고 있어 일기가 고르지 못할 경우 상황을 보고하고 후속 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나 시일이 오래 걸리므로 우선 죄인부터 처단하고 수습한다는 것이었다. 정적 제거에 있어 이러한 권한이야말로 하늘이 김시구에게 준 절호의 찬스였다. 고로(古老)의 말로는 5월에 제주목사 앞으로 감사(監司)로부터 밀사(密使)가 와서 조정철을 적당한 죄명아래 장살(杖殺)하라고 했다. 그는 법정에 끌려 나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시체가 되어 법정 밖으로 운반되어 나갔다. 6. 제주목 관아의 형벌로 죽어가는 조정철 목숨을 살린 홍윤애 이때 홍윤애(洪允愛)가 달려들어 그의 몸에서 아직 온기가 있는 것을 알고 입에 오줌을 부어 놔 소생시켰다. 당시의 법은 장사(杖死)했다고 해서 버려진 죄인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으면 또다시 죽이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조정철을 죽을 만큼 몽둥이질해서 내쳐놓고 목숨이 마침내 끊어졌다는 소식을 기다리던 김시구 목사는 그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구명한 것이 누구인가를 탐문, 당장 잡아들이라 설쳤다. “조정철은 상감께 대역을 저지른 죄인이다. 앞으로 이 자를 비호하거나, 이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이라도 주는 자가 있다면 내 그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자를 길거리에 내다 버려 백성들에게 대역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고, 끝내는 까마귀밥이 되게 하라!” 하고 곤장을 칠 때 분명히 여러 사람이 알아듣도록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자신 말이 먹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해괴하고 괘씸하였다. 7.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죽음 선택한 홍윤애의 진정한 사랑 홍윤애(洪允愛)는 정식으로 혼인을 맺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서 딸(1781년 2월 30일∼1863년 11월 24일)이 태어나기도 했다. 홍윤애는 관가로 끌려가기 전, 낳아서 두 달밖에 안 된 어린 딸을 언니 품에 안겨 한라산 속의 절로 떠나보냈다. 김시구 목사는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홍윤애를 보자마자 증오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끓어오르는 적개심으로 얼굴이 검붉게 변하여 두 발을 탕탕 구르면서 자백을 요구했다. - 조정철이 임금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 자신을 귀양 보낸 조정 중신들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 다른 유배인들과 서찰교환도 하고 몰래 접촉도 하더라는 자백 - 홍윤애와의 관계 홍윤애는 이러한 죄목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었다. 그녀는 잡혀 오기 전 조정철에게 “그대를 살리는 길은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義女曰公之生在我一死 : 조정철이 쓴 洪義女 碑文)”라고 자신의 의지를 밝힌 터였다. 내가 죽되, 어떻게 죽어야 님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몽둥이가 50대가 부러지고 60대가 부러져 나뒹굴었다. 홍윤애의 몸은 살이 찢어져 흩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까무러쳤다. 찬물이 끼얹어져 의식을 되찾기를 몇 번, 그때마다 목사는 원하는 답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한결 답은 “그런 바 없다!” 하였다. 몽둥이 재질(材質)이 너무 약해서 잘 부러진다며 목사는 잘 부러지지 않고 매 자국이 지독하게 아픈 윤노리나무 몽둥이를 특별히 깎게 하여 쳤다. 윤노리나무 몽둥이까지 70대가 부러져 나갔다. 그녀의 처절한 비명은 관아의 높은 담장을 넘어서 제주성 내로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귀란 귀는 모두 관아를 향하여 열어놓고 이 사건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연약한 여자이기에 몇 대 맞으면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어내리라 생각하였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8. 죄 없는 홍윤애의 죽음으로 큰 파장 일어 홍윤애의 죽음으로 인한 파장도 컸다. 김시구 목사는 이렇다 할 물증도 없이 가혹한 고문으로 홍윤애를 죽이고 나서 이 죽음을 은폐(隱蔽)호도(糊塗)하는 장계를 올린다. 제주에 유배와 있는 죄인들끼리 서로 통하며 역적모의한 낌새가 있어 그들을 징치(懲治)하였다고.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처참하게 살육한 이 사건은 곧 조정에 알려지고 큰 파장으로 일으켰다.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처참하게 살육한 이 사건으로 안핵어사(按覈御使) 박천형이 파견되어 진상조사 결과 죄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조정철은 정의현(旌義縣)으로 이배(移配)를 명령받는다. 육지의 친구나 친척으로부터 연락이나 원조 물품을 받을 가망성을 확실히 차단할 수 있는, 선박(船舶)의 왕래가 없는 첩첩산골 성읍리(城邑里)에서의 20년의 세월, 그래도 그는 살아남는다. 제주 유배지에서의 작성한 조정철의 시문집 ‘영해처감록(瀛海處坎錄)’, ‘큰 바다 건너 구덩이에서 보낸 세월에 대한 기록’이라고나 해석할까. 그 문집에 실린 시의 행간을 살펴보면 이때 그는 짚신을 삼고 댕댕이 덩굴로 모자를 짜서 먹을 것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읍에서도 다시 한차례 위기를 맞는다. 9. 27년간 한 맺힌 유배해제와 복권 후 제주목사 부임 정조 12년(1788) 신대년(申大年) 정의현감이 부임하면서 유배인들, 특히 조정철을 심하게 핍박, 기찰하였다. 우선 그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하였고, 시나 글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정철은 유배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30여 년의 귀양살이에서도 살아남은 뒤 환갑의 나이 복권되어 1811년에 한 맺힌 유배지였던 제주에 35년 만에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홍윤애가 조정철 때문에 장살 된 지 31년만인 셈인데 이때가 조정철이 61세 환갑 나던 해이다. 그는 오자마자 홍윤애의 묘비명을 짓고 애도시를 적어 넣었으며 그 애도시(哀悼詩)는 그의 제주에서의 유배집인 ‘영해처감록(瀛海處坎錄)’의 마지막에 실렸다.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제주에 유배되어 27년을 한라산을 바라보며 힘든 유배 생활을 하다 61세 노인이 되어 제주목사로 왔을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을까. 홍윤애가 죽고 17일 후인 6월 2일 새벽, 자기 때문에 아까운 일생을 무참히 마치고 장지로 떠나는 홍윤애의 상여 소리를 들으면서 조정철은 어떻게 이 원혼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인가를 몇 번이고 되씹었다. 이처럼 가슴 맺혀 떠났던 그가 다시 한번 제주도에 와보고 싶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0. 버려진 홍윤애 무덤에 묘비를 세우고 사랑의 시를 새겨주다. 그는 제주에 목사로 도임하자 곧 홍랑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손수 글을 지어 비를 만들어 세웠다. /옥같은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 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일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자매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겨져 있구나/ 라고 하며, 죽은 후에나마 비통하게 간 홍윤애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조정철이 제주에 왔을 때 그녀의 딸은 이미 죽고 사위 박수영(朴秀榮)도 그가 제주에 부임하던 해에 죽었다 제주에서의 목사 재임 중에 받는 봉급 전부를 시댁(媤宅)이 있는 애월읍 곽지리에 삼 칸짜리 초가도 지어주고 농토도 네 번에 걸쳐서 사주어 기본생계 걱정을 덜어주는 등 아비로서의 정을 아낌없이 쏟았다. 또한 사위를 족보에 올려 제주에 딸이 있음을 천명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인간에 대한 예의요,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은(報恩)이며, 사랑하는 님에 대한 단심(丹心)의 표시였다. 조정철이 목사 재임 중 제주성(濟州城)을 개축하고 왜구(倭寇) 등 국방의 대비에 힘쓰고 성 주변 12과원(果園)을 설치, 감귤재배를 권장하고 흉년 때 육지에서 들어와 노비가 된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부당한 세비를 빙자한 재물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부역(賦役)으로 과중한 부담이 없도록 하였다. 이동래부사로 떠난 후 충청도관찰사,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을 거친 후 1831년 5월19일 지중추부사를 마지막으로 곡절 많았던 세상을 하직했다. 조정철은 이렇듯 말년을 영화롭게 장수하며 생애를 마감했다. 홍윤애의 무덤은 광양도리공동묘지에 있었는데 1937년 제주농업학교가 이설되면서 현재 유수암리에 홍윤애의 외손자인 朴奎八(1803-1822)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고 없도록 힘썼다. 한편으로는 귀양 살 때 자기 때문에 고통을 받은 집주인과 이웃들을 만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옛날의 신세에 대한 보답도 하였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온 이듬해 조정철이 세운 비도 옮겨 놓았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나라사랑 애국연대,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 서천군의회 정의 바로세우기 시민연대 등 3개 시민단체가 서천군의회 앞 광장에서 김경제 의장과 이강선 의원 규탄결의대회를 가졌다. 이들 시민단체는 지난 4일 서천군의회 개청식에 맞춰 도로변에 김경제 의장과 이강선 의원의 규탄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시위 부스를 설치하는 등 규탄결의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날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수사가 진행 중인 김경제 의장의 구속수사 촉구와 이강선 의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개청식에 참석한 외부 인사들을 향해 호소했다. 또한, 이희 서면의용소방대장은 이강선 의원의 ‘싸가지 없다’라는 발언과 관련해 당시 상황 증언을 통해 “자신이 분명히 싸가지 없다고 말한 이강선 의원의 말을 들었고 3명 이상의 증인이 있다”라면서 당시 현장에서 욕설을 들은 사람들의 직함과 실명을 모두 공개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도 이강선 의원이 고소, 고발을 좋아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로 화해까지 했다가 갑자기 허위사실 등으로 주민과 언론인들을 고발한 행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의원 신분임에도 욕설 파문과 주민들까지 무차별 고발한 것은 물론 본인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탄압까지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라 지적했다. 이강선 의원은 지난달 8일 sbn서해신문과의 서면질의를 통해 “바나나보트 사업장 근무자와 안전요원을 상대로 일절 언쟁은 없었다”라고 반박한 바 있다. 또 “‘이강선 의원’의 신분을 밝혔고 특정 안전요원에게 ‘싸가지 없다’고 말한 그런 일은 없었다”라며 “다만 ‘예의가 없다’라고 한 적은 있고 다른 안전요원에게 업무적으로 지시나 지적을 한 것도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정태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 상임대표는 “이강선 의원은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 무엇이 가짜뉴스이고 언론이 어떤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인지 상세히 사실관계를 확인해 주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비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긴 김경제 의장의 부정부패 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등 건물을 임대주고 예산으로 임대료를 챙긴 점을 비판했다. 한편 이강선 군의원으로부터 고발당한 피고소인 9명은 변호사를 공동 선임해 무고 및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과 모욕죄에 대해 맞고소 등 강경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보령·서천 지역구) 의원은 지방공무원이 국가공무원으로 비다수인 대상 채용되는 경우 일반직공무원으로는 임용될 수 없도록 하는 국가공무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고 12일 밝혔다. 현행법은 공무원을 공개경쟁 채용시험을 통하여 채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경력경쟁 채용시험 또는 다수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시험을 통해서도 공무원을 채용할 수 있도록 하고, 비다수인 대상의 경우 공고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차장의 자녀가 공고 없이 진행된 비다수인 대상 채용에서 면접위원 3명으로부터 모두 만점을 받아 충청북도 선거관리위원회에 최종 합격한 사실이 드러나 채용 비리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촉발되었다. 실제로 국가권익위원회에서 지난 7년간의 선거관리위원회 경력채용을 전수조사한 결과 353건의 채용 비리가 적발되었고, 이 중 부정 합격으로 의심되는 채용자만 58명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장 의원은 “비다수인 대상 채용 제도는 모든 국민의 공무담임권을 보장하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논란이 되는 지방공무원이 국가공무원으로 비다수인 대상 채용되는 경우 일반직공무원으로는 임용될 수 없도록 하는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해 공무원 인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