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공덕산 토석 채취 저지 대책위원회(위원장 전영수/이하 대책위)가 지난 27일 신청사 앞에서 마서면 소재 공덕산 토석 채취 인허가 반대를 위한 집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책위은 “공덕산의 토석 채취 인허가는 아무런 명문도 없다”라며 “주민 갈등만 조장하는 토석 채취 인허가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자연훼손과 주민 생활 및 환경 파괴를 불러올 토석 채취를 결사반대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덕마을 최용혁 이장의 사회로 진행된 집회에는 나소열 전 군수를 비롯해 전익현 도의원, 김아진·홍성희·이강선 군의원들이 참석해 공덕산 토석 채취 저지에 대해 지지했다. 박병문 서천군동학농민계승회장은 “이번에 토사 채취 인허가를 막지 못하면 마을에 큰 피해를 볼 것이다”라며 “서천에도 동학농민군이 있었듯이 동학혁명군들의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정신을 이어받아 꼭 지켜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공덕산에 천연기념물인 수리부엉이가 서식하는 환경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대책위는 신청사 앞에 먹고 자면서 트랙터·콤바인 등 농기계를 대동하더라도 토사 채취 인허가를 막을 것이며 1인 시위를 포함해 반대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한편 대책위가 이날 김기웅 군수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일정상 관계로 참석하지 못해 집회에 나선 주민들의 아쉬움을 남겼다.
서천 언론의 큰 별이 졌다. 평생을 지역 언론발전에 헌신해 오던 <서천신문사> 강신설 발행인이 지난 27일 오후 7:35경, 향년 70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급서(急逝)한 것이다. 심야에 갑자기 날아든 비보로 지역 언론인들은 물론 서천군민 모두가 비통함에 잠겼다. <서천신문사> 강신설 사장은 서천군 비인면에서 태어나 평생을 지역 선도언론인 <서천신문사>에 몸담았으며 열악한 풍토와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역 언론발전에 혼신을 기울였다. 고인은 평소 ‘주민이 주인이 되는 언론, 소통하는 언론’을 강조했으며, 특히 고향을 떠난 출향 인사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고향 소식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쳐 헌신적으로 일했다. 특히 미국, 중국, 일본 등 해외 이민자들에게도 고향 소식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고인은 21세기 지방자치 시대의 참된 언론사 인식을 강조했으며,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을 경영철학으로 하며 언론인으로서의 고고한 지조를 후배 언론인들에게 몸소 실천했다. 특히 고 강신설 사장은 1998년 일본 <오사끼 타임즈>와 <서천신문사> 간 자매 결연을 맺고 매년 교차 방문을 통하여 한일 우호 관계 증진에도 이바지했으며 서래야 쌀, 한산소곡주 등 지역특산품 홍보에도 평생 심혈을 기울이셨던 서천지역 언론의 큰 별이었다. 고인은 사단법인 세종·충남 지역신문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지방자치 시대에 부합하는 지역 언론의 역할과 지역 언론의 당위성을 주창하셨고 풀뿌리 언론의 선봉장으로 지역 언론인들의 귀감이 됐다. 특히 고인께서 지역 향토 문화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지대하다. 매년 동백 사생 백일장 서예대회를 개최해 어린이 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했고 지역인재 육성과 장학재단 사업에 쏟으신 열정은 후학들에게 높이 평가받을 발자취를 남겼다. 고인은 지난 2019년 <서천신문사> 30주년 기념식에서 “제시간에 맞춰 신문을 발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서천군민이 있어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데드라인을 지키지 않으면 신문을 발간할 수 없다는 압박감이 때로는 좌절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서천군민과 출향인사 그리고 애독자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뜻깊은 30주년을 맞는 일이 가능했다”라며 과거 원고지를 들고 충무로로 신문 편집과 인쇄를 위해 뛰어다녀야 했던 어려웠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감회를 밝힌 바 있다. 고인은 평생을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과 대쪽 같은 성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언제 어디서든 언론인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후배 언론인들에게도 항상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정론·직필의 바른길을 인도해 주시며 후배 언론인들을 격려했다. 칠십 평생을 오로지 한 길 지역 언론에만 매진하며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판 적 없이 외길을 걸어오신 고인의 언론 철학은 남달랐다. 고인은 언론의 비판 기능 이면에는 긍정적인 대안 제시를 강조했고 언론은 권력기관과 힘 있는 사람들의 불편부당함과 부조리를 감시하고 비판, 견제하여 지역사회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평생을 오로지 지역 언론발전에 헌신했던 서천 언론의 큰 별이 온 서천군민과 후배 지역 언론인들의 오열과 추모 속에 이제 영면에 들어갔다. 고인이 떠난 빈자리가 너무 크지만, 이제 후배 언론인들이 그 큰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삐를 조여야 한다. 고인이 앞서가신 발자취는 너무나 크지만, 누군가는 따라가야 할 길이기에 후배 언론인들이 고인이 못다 이룬 지역 언론의 꽃을 피우기 위해 고인이 뿌려 두신 씨앗을 키워 나가야 한다. 정보의 홍수라 일컫는 인터넷의 시대에서도 종이신문이 가진 사명은 있다. 활자가 가지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주는 울림이 다르다. 순간의 정보전달에 불과한 인터넷 정보와 비교하여 종이신문이 가진 언론의 사명은 사뭇 다르다. 고인이 평생 강조했던 것처럼 언론은 시대의 반영상이고 시대의 발자취를 활자에 담는 예술이며 역사의 단편이다. 오늘도 많은 언론인이 활자에 매료되어 원고지에 펜을 들어 기사를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밤을 새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비록 고인은 갔지만 고인이 남긴 고귀한 언론 혼(魂)은 후배 언론인들의 가슴속에 남아 찬란히 빛날 것이다. 고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발길이 무겁다. 하지만 고인이 후배 언론인들에게 남겨 준 사명감은 고인을 애써 떠나보내야 하는 사명감보다 더욱 무겁다. 고인의 영정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며, 고인과 영원한 이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동안 함께해서 행복했었노라고, 그리고 사랑했다는 말을 애써 다하지 못한 여운으로 남기고 싶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한국중부발전 신서천발전본부이 지난 14일 충남 서천군 서면 소재 본부 강당 동백홀에서 ‘지역 학생들의 꿈과 희망을 응원하는 초여름힐링음악회’를 개최했다. (사)한국예총 서천지회와 협업을 통해 진행된 이번 음악회는 지역의 학생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악기를 통해 꿈과 끼를 펼칠 수 있는 기회 제공과 전문예술단체에는 일자리 창출과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마련됐다. 이에 앞서 신서천반전본부는 지난 4월부터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전문 강사를 통해 악기연주 교습을 진행했다. 이들은 이날 음악회를 통해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고 저마다 그동안 닦은 기량을 맘껏 펼쳤다. 이날 음악회는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Frühlingsstimmen, Op. 410 봄의 소리 왈츠’ 연주로 아름다운 무대의 첫 시작을 알렸다. 이어 이희정 국악인이 보컬로 나서 새타령, 꽃 타령 등 민요가 선보였으며 별주부전의 ‘난감하네’, 희망아리랑 등의 흥겨운 우리 가락으로 음악회장의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또 빅맨 싱어즈의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투우사의 노래’, ‘바람의 노래’ 등과 서천청소년오케스트라의 ‘어벤져스’, ‘각설탕’ OST, ‘캐리비안의 해적’ OST 등의 영화음악 연주로 관람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붉은 노을’ 연주를 통해 직장인들과 지역 학부모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 정서적 편안함과 마음을 정화하는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서남석 신서천발전본부장은 행사 말미에 “일터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마음과 정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라며 참여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또 “앞으로 신서천발전본부는 지역 주민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천군민이 행복한 시간과 풍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ESG 경영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전했다.
충청권 4개 시도지사와 국민의힘 원내지도부가 지난 26일 국회에서 만났다. 그들이 저마다 약속한 충청권 주요 현안 사업 해결방안 논의를 위한 이른바 ‘충청권 지역 민생 예산정책협의회’란 이름으로 말이다. 국민의힘 소속 이장우 대전시장과 최민호 세종시장, 김태흠 충남지사,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그리고 당에서는 윤재옥 원내대표, 박대출 정책위의장, 송언석 예결위 간사가 나왔다. 협의회는 시도지사들이 취임한 지 꼭 1년으로 이제 2년 차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시도지사들은 임기 4년 중 꿀맛 같은 1년이 어느새, 지나고 앞으로 주어진 임기 3년간 본격적으로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고난의 행군으로 접어든다. 더구나 오는 2026년 6월 지방선거와 2027년 3월 3일 치를 차기 대선을 앞두고, 이들은 그간 글(書)로, 말(言) 약속한 정책과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선 분주할 수밖에 없는 터다. 이장우 시장은 15년간 착공하지 못했던 2호선 트램 착공 현실화, 나노 반도체 국가산단 160만 평 지정, 우주 클러스터 3각 체제 구축, 방위사업청 이전 및 2027년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유치, 대기업 유치 등 많은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들 사업과 지역 현안, 국비 사업이 원활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될 수 있게 각별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했다. 충청의 미래라는 김태흠 지사 역시 국민의힘 원내지도부의 충남도에 관심을 요청했다. 그는 서산 군 비행장 민항 설치, 충남혁신도시 복합혁신센터 건립, 충남혁신도시 칩·모빌리티(Chip&Mobility) 영재학교 설립, 2027 유니버시아드대회 경기장 신설·확충, 국방 AI·로봇·군용전지 등 5개 국방 연구시설 건립 지원을 요구했다. 최민호 세종시장과 김영환 충북지사도 각각 지역 현안과 내년도 국비 사업지원 등을 언급하며, 중앙당의 성원과 지원을 촉구했다. 이들이 각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나선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이런 노력은 당연하기에 큰 감동을 얻기는 아쉬움이 있었다. 시도 지사중 일부 시도지사의 노력이 빛난 곳도 있지만, 1년간 대체 광역단체장으로 제대로 한 것이 없는 이도 있었다. 까놓고 말하면, 일부 현 시도지사가 1년간 제대로 역량과 미래희망을 보이지 못한 곳도 적지 않았다. 수년째 전임 4개 지역 시도지사가 더불어민주당 소속 인사들이 맡아왔던 터라, 분위기와 정책 방향을 바꾸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은 간다. 또한 취임한 지 1년간 광역 지자체장이 무엇을 했느냐고 평가받기는 어폐가 있다는 항변도 있다. 그러나 이제 내달 취임 2년 차로 접어드는 만큼 전임 시도지사 정책의 미흡만 홍보하는 것도, 전임 시도지사 때 시·도청 조직이 말을 안 듣는다고 뒷말만 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과를 내왔던 충청 4곳의 시도지사를 지난해 6.1 지방선거에서 교체하지 않았나. 지금의 충청 시도지사는 지난해 6.1 지방선거 때 뭐라고 외쳐왔나. 현 시도지사는 당시 시도지사를 겨냥해 해당 시·도정 심판과 함께 자신이 시·도정을 맡아 충청인의 여망을 실현해줄 것처럼 외쳐온 사실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일부 지역에서는 현 지자체장이 이렇게 엉터리일 것이라면, 전임 지자체장을 잘 못 바꿨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측근들, 심지어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일부 인사들이 특정인을 내세워 금품수수행위나, 이권에 개입하고 다닌다는 제보도 여러 건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도지사 중에는 순수하고 지향점이 건실한 시민단체들도 멀리하고 있다. 선거 때 상대 후보와 가까웠다고 스스로 낙인을 찍어 거리를 두는 바람에 불협화음만 낳고 있다. 일부 시도지사의 행패를 대다수 언론뿐만 아니라, 지방의회, 시민단체가 24시간 주시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꼴이다. 그래서 이제 취임 1년을 맞은 지자체장들은 겸허하게 시민들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지자체장들은, 선거 때만 머슴을 외치고, 당선 후엔 왕(王) 노릇을 한 바람에 ‘다시는 안 찍겠다’라는 유권자의 호된 꾸지람을 듣는 일부 국회의원의 모습을 답습해선 안 된다. 먼저 시도 행정조직에서 내 편, 네 편을 갈라 인사 불이익을 행사하는 일부터 멈춰야 한다. 그 공무원은 시도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시도지사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취임 1년을 맡은 단체장들은 다시 한번 위민(爲民)의 뜻을 새겨, 진실하게 일해야 옳다. 시도지사라는 권력에 취하고, 즐비한 아부꾼들의 달콤한 말에 빠져 그 자리를 즐기기보다 애정 있는 쓴소리를 들어야 한다. 탐욕에 취한 그 주변 아부꾼을 당장 멀리해야, 선량한 주민들이 보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은 제대로 실력을 주민에게 보여달라.
우리고장 옛 한산군의 진산인 건지산을 중심으로 조상들이 살아가면서 어떠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역사적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책무이다.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한산 건지산은 서천군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이며 한산군의 고을의 상징인 진산이다. 옛사람들은 고을의 진산은 삶을 살아가는데 위안을 얻고 수호신으로 믿으며 삶의 풍요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곳으로 여겼다. 이러한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배경으로 옛 선조들이 살아온 한산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살다가 남겨 놓은 것 들은 무엇이 있나 살펴보자. 1. 한산지역의 역사 한산지역은 고대 원삼국인 마한시대에는 54개국 중 소국으로 치리국국(致利鞠國)으로 오늘날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의 지역으로 한 부족국가 시대였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후 마산현(馬山縣), 또는 마읍(馬邑)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건지산(乾止山)은 우두산(牛頭山)으로 불렀다.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산성을 쌓고 우두산성(牛頭山城)이라 하였고, 동성왕은 이곳으로 자주 사냥을 나오기도 하였다. 동성왕 23년(501년) 11월 이곳 건지산성에 사냥을 나왔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혀 도읍지 공주왕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포촌(馬浦村-당시의 치소) 즉 지금의 마산면 벽오리에서 유숙하다가 부여 임천, 당시 가림성(현 성흥산성) 성주인 제자백가는 인사의 불만을 품고 마포촌에서 유숙하던 동성왕을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다음 해(502년)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군사를 이끌고 우두산성(지금의 건지산성)에 진을 치고 장수 해명(解明)을 보내 백가를 잡아 오도록 하여 건지산성에서 목을 베어 白江(백강), 지금의 금강(錦江)에 버린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출처:대동지지-1865년 사례 편] 건지산의 옛 지명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백제 무왕 30년(629년)에 고쳐서 마산성(馬山城)이라고 하였으며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15년(655년)까지도 마산성을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지산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으나 이곳 건지산성(즉 마산성), 고려 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주류성이라고 하였고 3년간의 백제의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를 걸쳐 고려시대에는 한산현(韓山縣), 또는 아성(鵝城)이라고도 하였다. 한산군의 읍성은 지금도 문화유적으로 남아있다. 2. 한산이 낳은 인물 고을의 진산인 건지산을 배경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인재가 태어나 명성을 낳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산 이씨(韓山 李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고령 신씨(高靈 申氏) 등이 있다. 한산이씨 시조(始祖)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건지산맥을 따라 안장된 시조 이윤경의 묘지는 전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다. 그러나 시조라 할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당대의 대 문장가이며, 우탁 역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 이씨는 조선시대 상신(相臣)이 4명, 대제학(大提學)이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 개국 후 141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다.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간신들에 의해 배안에서 운명하였다. 건지산 자락인 한산면 고촌리 이곡과 이색의 옛 집터에 1610년 문헌서원을 창건하고 1611년에 사액을 받고 많은 인재를 양성해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도에 훼철되었다가 1969년도에 이색의 묘역 옛 효정사 경내에 서원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한산팔경을 노래하다.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중심으로 한산팔경을 낳기도 하였다. 숭정사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숭정산에 있던 사찰이였다. 이곳 崇井山(숭정산)은 옛 고려시대에 사찰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폐사된 사찰지만, 확인이 가능하다. 그 당시 사찰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숭정사 불리오다가 폐찰 되었다. 팔영시의 기록을 보면 사찰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목은 이색 선생은 1335년 8세 때 이곳 사찰에서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출처:독서처가서(讀書處歌序)> 목은 이색이 지은 한산팔경을 읊은 팔영(八詠)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숭정암송(崇井巖松) “8.9세 때를 생각하니/ 학당에서 놀았는데/ 환하게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나/ 쉬지 않고 이치를 찾아 외우기만 하였네.” 이곳 숭정산 정상에는 흰색의 차돌 바위가 솟아 있고 틈사에 분재 같은 소나무가 자랐음 50년 전 산림이 욱어지지 않았을 때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소풍장소로 즐기던 곳이다. 2) 일광석벽(日光石壁) 이곳 일광산(日光山)은 동·서로 두 봉우리로 자리하고 동쪽 봉오리는 중턱에는 일광사란 사찰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먼 곳에서 보면 벼슬아치의 관모 같아 일명. 관두봉(감투봉)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곳 관두봉 서쪽 편에는 이색 선생이 독서하던 독서당의 자리가 있다. - 독서처가서 3) 고석심동(孤石深洞) 마산면 마명리 마을 안쪽으로 일명 고석굴(골)이라 하였다. 이곳 마을 입구에는 자연석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보호각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하고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시는 고석사(孤石寺)라는 사찰이 있었고 아마도 사찰에서 모셨던 미륵불로 폐찰 된 후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일화로는 일제강점기 때 술 취한 공사 인부가 곡괭이로 미륵을 내려찍은 뒤 급사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영험이 있는 미륵불로 여기고 있다. 4) 회사고봉(回寺高峰) 마산면 안민리 마을 뒷산으로 회사(回寺)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곳의 의미를 팔영에서 설명하듯이 한산군의 사적으로 앞산 건지산은 국방의 중요시설인 건지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쌓은 고대 우두산성(牛頭山城)으로 백제 의자왕 때 마산성(馬山城)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5) 원산수고(圓山戍鼓) 화양면사무소 뒷산 금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작고 둥근 산이 원산(圓山)이다. 고려 때부터 봉화를 올리던 곳. 산 아래 강변포구에는 군사 주둔지인 수자리 있었다. 이곳 원산은 조선시대 한산군지(韓山郡誌)의 기록을 보면 기이(奇異)한 산으로 신령스러운 조짐이 있어 나무꾼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고 한다. 6) 진포귀범(鎭浦歸帆) 진포(鎭浦)는 오늘날 금강으로 백제 때는 기벌포(伎伐浦) 또는 백강(白江), 고려시대에는 진강(鎭江). 진포(鎭浦), 장암포(長巖浦), 이곳 금강은 백제 의자왕 때 충신 성충, 흥수가 유배지에서 백제를 지키려면 백제의 관문인 금강 입구 즉 기벌포를 막아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인 백강전투, 백제부흥군, 왜의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 장소로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부흥운동이 실패하였다.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나세(羅世) 장군이 왜구 500척의 선단을 수장시킨 진포대첩(鎭浦大捷)의 장소는 장암진성(長巖鎭城)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천포(舒川浦), 금강(錦江)이라 하여오고 있다. 옛 어부들은 만선의 기쁨을 채우고 포구로 돌아오는 모습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7) 압야권농(鴨野勸農) 이곳은 한산 건지산에서 동쪽 들판을 지칭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에 나타는 지명으로 한산면 동산리, 단상리, 송곡리. 성외리(오라리 들) 앞 들판으로 풍요로운 곳으로 백성의 생활 터전을 정립한 곳이다. 건지산 정상에 주변을 바라보면 서해와 남쪽으로 금강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멀리 부여 임천(林川-가림)의 성흥산성(옛 가림성)이 보인다. 8) 웅진관조(熊津觀釣) 지금 신성리 갈대밭인 금강변에 자리한 옛 나루터로, 전북 익산시 웅포면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와 왕래하던 중요교통로인 나루터로 활용하였던 곳이다. 전라도 남쪽 지방에서 한양 도성으로 가려면 이곳 나루터를 이용하고 한산-마산-홍산-외산-청양-공주-유구-천안삼거리로 이어지는 중요교통로 활용하였다. 1894년 전북 지역동학군이 이곳 신성포 나루를 건너서 한산군청과 서천군청을 함락시키기 위해 이용하던 교통로 금강하구둑이 막히기 전에 바닷물의 조수가 들어오던 시기에는 이곳 나루터 주변에서 일명 황색 조기잡이 배들이 많은 조업하던 곳으로 젓갈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였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자 들판에 새로운 마을이 들어섬 따라서 마을 이름이 새로 생겼다 하여 신성리(新城里)라 부른다. 4, 효자 맹사성이의 고향 축동리 한산면 축동리 마을의 옛 지명은 축산리(杻山里)였는데. 일제가 행정지명을 바꿔 축동리로 하였다. 축동리에는 고불 맹사성(孟思誠)의 옛 고향이다 맹씨 3대가 이곳에서 살았으나 묘지는 실전되고 단을 설치하였다. 축동리는 맹씨가 살았다 하여 맹동(孟洞)이라 부른다. 맹사성이 10살 때 모친이 돌아가시니 묘역을 매일 살펴보고 주변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멧돼지가 나무를 훼손한 것으로 보고 슬피 울었다. 그 후 그 멧돼지는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 그는 효심이 지극하였고 하였다. 그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최고의 효자로 칭송하고 효자정려가 내려지고 마을 입구에 효자리(孝子里)라는 표석을 세워주었다. 또한 그의 부친도 효성이 지극하여 함께 효자리(孝子里) 표석이 나란히 서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한 세종 때 만든 삼강행실(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모친을 따라 아산 신창으로 이사 갔다. 그러나 축동리는 맹사성이를 낳은 고향이기도 하다. 5. 학자를 낳은 어성산(漁城山)과 일광산(日光山) 건지산의 자락이 흘러 남쪽으로 내려오면 한산모시관 앞산이 높이 솟아있다. 이산은 화양면 활동리 마을의 터를 잡은 어성산(漁城山)이다. 고령 신씨(高靈 申氏)가 세거하고 있다. 신담(申湛)의 부친 신영원(申永源)이 이곳에 자리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이기에 숭문동(崇文洞)이라고도 한다. 신담을 비롯하여 석북 신광수와 그의 아우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숭문8문장이 배출되었다. 이곳 어성산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신담의 호(號)가 어성(漁城)이기에 관련된 것으로 본다. 어성 신담의 외손자는 과묵당 홍미, 복천 강학년(姜鶴年)으로 한산지역의 4군자의 한사람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한산이씨 죽창한화(竹窓閑話)의 저자인 이덕형(李德泂)을 사위로 삼았다. 이와 같이 이곳 어성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고령신씨들은 한산지역의 쟁쟁한 가문들과 인맥, 혼맥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문이 번성하였다. 어성산의 맥이 동쪽으로 이어지면서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들었다. 즉 주산인 일광산이다. 일광산은 관두봉(官頭峰)을 두고 있다. 관두봉은 고려 때 일광사(日光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광사 아래에는 목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다. 지금도 그 사찰 터와 독서당의 자리가 있다. 이곳 일광산은 한산8경인 일광석벽(日光石壁) 하나이다. 또한 일광산 관두봉 아래 구동리에는 1908년 기독교 구동교회(基督敎 九洞敎會) 교인들이 신학문의 도장인 사립숭광의숙(私立崇光義塾)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일광산을 주산으로 바로 아래 마을은 안동 권씨(安東 權氏)가 세거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다. 일광산 관두봉 아래에는 수초당 권변(權忭)과 아우 제월재 권성을 배향하였던 향현사(鄕賢祠)가 있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그 자리만 남아있다. 권변은 기산면 화산리의 화산사(華山祠)에 복설 배향된 우리 고장 인물로 효종 2년(1651년)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서 태어났다. 숙종 15년(1689년) 4월 증광전시에 급제하였으나 그 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후궁인 장소의(張昭儀-장희빈)를 중전으로 봉하면서 이를 축하하는 과거였음을 알고 수차례에 걸쳐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국모(國母-중전)를 폐출하는 날에 과거를 응시하였음을 부끄러워하여 절의를 지키고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권성(1653∼17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제월재(霽月齋). 아버지는 양(讓)이며, 어머니는 한극겸(韓克謙)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지평·장령·집의·헌납·사간 등을 지냈다. 그 후 평안·황해·강원·함경·경상·충청도 등의 관찰사를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이름이 났다. 1721년(경종1) 한성부판윤으로 신임사화를 맞아 사직 되었다가, 1725년(영조1) 노론이 집권하자 부총관·판윤·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물러났다가 형조판서·참찬 등에 여러 차례 기용되었으나, 사퇴하고 전원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한산지역은 인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한산모시와 한산소곡주로 그 명성을 낳고 있다. 한산지역은 신교육의 발상지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에 남다른 고장으로 일찍이 교육으로 인재를 배출하였다. 구한말 우리 고장 화양면 와초리에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김인전 선생이 가르치던 한영학교가 1906년 설립(1909년 인가)해 운영되었고 그곳 출신들이 마산 3.1운동을 주도 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한산지역은 면 단위로서 초·중·고등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김기웅 서천군수가 57년 만에 현청사의 시대를 마감하고 지난 19일부터 서천읍 서림로 19 신청사에서 본격적인 ‘잘사는 군민, 살고 싶은 서천’의 시대를 알리는 첫 공식 업무에 들어갔다. 김 군수는 “신청사 시대의 개막은, 웅비하는 서천의 미래 100년을 견인할 원동력”이라며, “더 나은 행정서비스 제공함은 물론, 군민들과 더 가까이에서 소통하는 군정을 펼치겠다”라고 새 출발의 각오를 다졌다. 총사업비 475억 원을 투입, 지난 3월 준공된 신청사는 지난 13일부터 행정업무 공백과 방문 민원인의 불편을 최소화하고자 일주일간 단계적으로 부서별 이전을 진행했다. 따라서 신청사에는 3개 국·2개 담당관·17개 과에 5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게 된다. 옛 서천역 주변에 연면적 1만 5,670㎡,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를 갖춘 신청사는 민원, 문화, 교육 등의 열린 복합 공간을 갖추고 있다. 지하 1층에는 지하주차장, 기록관, 지적서고, 재해구호물자보관창고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층에는 인구정책과, 복지증진과, 민원지적과, NH농협출장소, 특산물 홍보/판매장, 꿈앤카페, 식당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시설정보과, 드림스타트, 체력단련실, 열린도서관, 북카페, 문화강좌실 1~4곳, 대회의실, 정보화 교육장 등으로 이뤄졌다. 3층에는 경제산업국장, 재무과, 투자활력과, 경제진흥과, 해양산업과, 수산자원과, 주민소통실 등이 있으며 4층에는 군수실, 부군수실, 행정복지국장실, 기획예산담당관, 홍보감사담당관, 자치행정과, 상황실, 주민소통실 등이 들어섰다. 5층에는 문화체육과, 관광진흥과, 건설과, 도시건축과, 환경보호과, 발간실 등이 있으며 6층에는 안전건설국장실, 안전관리과, 산림공원과, 전산통신실, 재난안전상황실, CCTV관제센터, 산불상황실 등이 입실했다. 특히 군은 군민이 자주 이용할 수 있는 민원실, 문화 강좌실, 열린 도서관, 북카페 등을 저층부에 배치했으며, 엘리베이터·완만한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마련해 노약자와 장애인의 이용 편의를 고려했다. 아울러, 사회복지실, 문화예술과, 관광축제과 등 사무공간이 부족해 외부로 분산됐던 부서를 신청사로 입주시켜 업무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엘리베이터, 완만한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마련해 노약자와 장애인의 이용 편의를 고려했다. 한편, 군은 추후 각계각층의 군민들을 초청한 가운데 신청사 개청의 취지와 민선8기 서천군의 미래 비전을 알리는 개청식을 가질 계획이다.
서천군이 새로운 100년 시대를 맞이할 신청사 시대를 열었다. 지난 2020년 착공 후 3년 만에 연면적 1만5,670㎡ 지하 1층 지상 6층의 웅장한 서천군 신청사를 완공하고 지난 7일 서고(書庫)이전을 시작으로 19일 신청사로의 이전을 끝내, 서천군 신청사 시대를 맞이했다. 서천군 옛 청사는 1966년에 건립되어 내구연한이 50년을 초과, 노후로 인한 안전 위협은 물론 청사 협소로 인한 민원인과 공무원들의 불편을 초래했다. 특히 2014년 실시한 옛 청사 정밀 안전진단에서는 별관동과 후별관동이 안전 위험등급인 D등급을 판정받아 신청사 건립이 시급했다. 신청사 건립과 관련해 현청사부지에 재건축론과 새로운 부지로의 신축 이전론 등 격렬한 논쟁이 이어져 왔으나, 주민공청회를 거쳐 신청사 후보지를 옛 서천역 인근인 현 신청사 부지로 확정하였다. 총공사비 486억 원이 소요된 신청사 건립 이전은 기존 청사 주변의 도심공동화 우려 속에 옛 청사 주변 도시 재구조화 사업을 통한 도심공동화 대책 마련이라는 무거운 숙제도 안고 있다. 그동안 청사 공간협소로 외청으로 자리를 옮겼던 사회복지실과 문화예술과 등이 신청사로 입주하게 되어 행정업무의 효율성이 증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신청사는 행정업무 공간 외에 문화강좌실, 열린도서관, 북카페 등 문화·여가 기능도 갖춘 복합청사로 설계되어 군민들이 함께 애용할 수 있는 열린 문화공간의 기능에 대한 군민들의 기대도 높다. 이와 함께 서천군의회도 신청사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군의회는 지난 2일 제311회 군의회 제1차 본회의를 끝으로 12일 신청사로 이전함으로써 32년 더부살이 의회의 시대를 마감하고 의회 단독청사를 갖게 됐다. 따라서 군의회는 민선8기 출범 1주년 및 청사 이전 기념식과 함께 임시본회의를 개최하여 단독청사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제 서천군 서천읍 군청로 57번지의 서천군 옛 청사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동안 군청사 내구연한 도래에 따른 안전 위험은 물론 지속해서 요구되는 새로운 행정서비스에 대처에 대하여 전임 군수들이 소요 예산 문제와 정치적 부담감 등으로 청사 이전을 방치해 왔다. 그러던 것을 민선7기 노박래 군정에서 힘든 결정으로 신청사 건립을 추진됐다. 신청사 개청은 쾌적한 근무환경 개선이라는 단순한 논리 이전에 서천군의 100년 미래 청사진을 군민들 앞에 제시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신청사 이전은 단순 행정기관을 옮기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서천군이 신청사 시대를 맞으면서 그동안 구태의연하게 답습해 왔던 행정의 적폐를 일소하고 서천군의 새로운 정체성과 행정의 효율성을 군민 앞에 내보여야 한다. 변화는 개혁을 요구하고 개혁은 창조를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적 발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군은 신청사 시대를 맞으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도 함께 가져야 한다. 신청사가 미래 성장의 동력이 되고 새로운 견인역할을 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장밋빛 청사진만 내보여서는 안 된다. 실천이 가능한 군민이 신뢰할 수 있는 서천의 미래상을 군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서천군은 신청사 이전과 함께 3국 2담당관제라는 새로운 행정체계를 구축했다. 이 조직개편은 행정의 효율성 증대뿐 아니라, 군민의 행정서비스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견인차 구실도 함께 해야 한다. 신청사 시대를 맞이한 서천군을 향한 군민의 기대감에 김기웅 군수는 물론 군청 공직자 모두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간 수많은 우여곡절과 갑론을박을 겪으며 서천군은 신청사 시대를 맞아 청사 이전을 단행했다. 이제 서천군은 새 옷에 걸맞은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기를 군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김기웅 군수는 민선 8기 출범 1주년과 함께 신청사 개청에 따른 새로운 비전을 군민 앞에 선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막연하게 쾌적한 신청사로 옮겨 근무 여건이 개선되었다고 흥분하고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권한에는 책임이 뒤따르듯 신청사 이전에 따른 새로운 각오 또한 남달라야 한다. 신청사 시대를 맞이해 구시대의 구태의연했던 행정 권위주의를 답습하려는 태도는 옛 청사에 버려야 한다. 어찌 되었든, 공사 초반 기초공사 붕괴로 인한 부실 공사 우려 등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 신청사가 무사히 준공되어 서천군 신청사 시대의 화려한 서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새로운 서천의 100년 미래에 대한 초석을 쌓게 될 신청사 시대의 개막을 온 군민과 함께 자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청사 이전과 함께 새로운 100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해 본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제11회 서천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지난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간 충남 서천군 문예의 전당 대강당에서 개최했다. 이번 경연대회는 서천군, 서천 국창 이동백·김창룡 선생 중고제 판소리 예술 선양회가 주최하는 충남을 대표하는 전통예술 경연대회이다. 서천 국창 이동백·김창룡 선생 중고제 판소리 예술 선양회는 이 대회를 통해 유능한 신인 국악인 발굴 및 등용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등 국악의 보존과 체계적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경연대회는 총 450여 명의 참가자를 상대로 지난 17일 예선을 시작으로 18일 본선과 결선을 통해 치러졌다. 신인부와 명인부를 대상으로 판소리, 고법, 민요, 기악 및 병창 총 5개 분야로 70여 명의 수상자가 선정됐다. 경연대회 결과, 종합대상은 명인부 성지숙(판소리) 앙사블 ‘여울’ 대표가 수상해 상금 1,000만 원을 거머쥐었다. 학생부에서 김범준(고법) 학생이 수상해 상금 200만 원을 받았다. 명인부 종합대상을 받은 성지숙 대표는 원광대 국악과를 졸업해 국악실내악단 ‘끌림’ 대표를 역임했으며 2018년 보성전국국악경연대회 문화체육부 장관상과 2023년 서천전국국악경연대회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다. 학생부 종합대상을 수상한 김범준 학생은 전주 신흥중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한국전통문과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또한, 이번 행사에서 입체창극, 뺑파전타루비, 동래학춤, 남도민요, 서천을 대표하는 명창 이동백 선생 중고제 판소리 시연회 등 다채로운 축하공연이 열려 대회장 열기를 더했다. 군 관계자는 “이번 치러진 전국국악경연대회는 국악의 위상을 드높이고 전통예술의 참된 가치를 실현하는 공정한 대회였다”라며 “이를 계기로 경연대회가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겠다”라고 밝혔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재정을 일본의 재정에 예속시키고 식민지건설을 위한 작업을 4차례에 걸쳐 1,300여만 원이라는 거액을 조선정부에 차관을 제공하였다. 조선정부는 빈약한 재정으로 상환하지 못하자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1907년 나라의 빚인 국채를 국민이 상환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주변에는 나라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는 목숨을 건 애국지사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일부는 우리 주변에서 잊혀가고 묻혀버린 애국지사들이 많다. 필자는 우리 고장에서 애국 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가는 애국계몽운동가이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 하였던 송당(松堂) 김성희(金成喜) 애국지사를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1. 구한말 조선에 열강의 군대 상륙 1894년은 우리 역사에 큰 의미를 지닌 한 해이다. 신분 질서에 맞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썩고 무능한 조정은 이를 진압을 위해 청(淸)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군은 ‘텐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상륙했다. 동학군의 봉기로 청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긴 했으나, 동학군이 조정과 화약(和約)을 맺고 해산하자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다. 주둔한 양국 군대를 공동 철수하자고 청나라가 주장하자, 일본은 되레 양국이 함께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改革)하자고 제안했다. 청이 거절하자 그걸 구실로 일본이 청나라 군대를 공격 일본의 승리한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승리한 일본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온건개화파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으로 내정간섭에 이르렀다. 2. 조선정부에 1,300여만 원의 차관제공과 내정간섭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의 재정을 일본의 재정에 예속시키고 식민지건설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4차례에 걸쳐 1,300여만 원이라는 거액을 조선정부에 차관을 제공하였다. 조선정부는 빈약한 재정으로 이를 상환하지 못하자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시 국내 지식인들은 빚진 상태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燉)이 나라의 빚인 국채를 국민이 대신 상환하자는 취지로 단연회(斷煙會-금연회) 설립 동맹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고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했다. 3. 민간 주도 국채 보상 운동 전국적으로 전개 때를 같이해 우리 고장 판교면 출신 애국계몽운동가 김성희(金成喜)는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유문상(劉文相), 오영근(吳榮根) 등 24명의 인사가 발기해 국채보상운동의 집행조직체인 국채보상기성회(國債補償期成會)를 조직했다. 한편 국채보상기성회는 의연금을 수합하는 7개소 수전소를 지정하고, 각 지방 도, 군, 면, 단위로 찬동 지지하는 취지서를 발표하고 3월 말까지 27소의 국채보상소를 설립하였다. 충남에는 공주, 예산, 한산, 금산군 4개소로, 우리 고장 한산호서국채보상 기성의무사(韓山湖西國債補償 期成義務社)는 3월 17일 설립했다. 국채보상기성회의 취지서에는 ‘멀리 동래, 대구의 제공으로 더불어 단합해 한 몸이 되고자 하여 이 회를 조직하고 이름하여 ‘국채보상기성회’라 한다. 이에 우리 동포에게 널리 고하여 우리 국민의 의무를 다하게 하려는 바이다. 아아, 나라가 망하면 인민이 망하는 것이니 힘쓸지어다. 우리 국민이여’라고 하여 조직의 취지를 밝혔다. 또 기성회 회칙에서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보상함을 목적’으로 하며, ‘보상 방법은 국민의 의금을 모집함. 단, 금액은 다소를 불구한다’라고 정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등 언론들도 각 지방의 모금 상황 및 취지서, 의연금 납부 명단 등을 연일 게재하며 운동을 독려했다. 보상 운동은 국내를 비롯하여 국외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운동이 시작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에 달했고 1907년 3월 이후 1908년 7월까지 의연금 총액은 20만 원에 이르렀다. 이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배일 운동으로 규정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언론을 탄압했다. 또 양기탁(梁起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언론인 베덜(Ernest Thomas Bethell) 등 운동 주도 인물들을 의연금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다. 하지만, 다섯 차례의 재판 결과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은 계속됐고, 이로 인해 보상 운동은 상당 부분 위축됐다. 이에 따라 국채보상운동 지도부는 모금보다는 모금액의 관리와 감독에 치중하였고, 1909년 11월에는 의연금 처리를 위해 유길준(兪吉濬)을 회장으로 국채보상금처리회를 조직했다. 처리회는 은행이나 학교설립, 식산 진흥 등 다양한 방안을 논의한 끝에 1910년 9월 모금액을 교육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직후 모금액 전부를 경무총감부에 빼앗기면서 이 같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전국으로 확산한 국채보상운동은 나라의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시민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지난 2017년 10월 30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송당 김성희, 국권 회복을 위해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 전개 일제의 조직적 방해로 결과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지만,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실력양성을 통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송당 김성희는 이러한 국권의 수호를 위하여 정치, 사회단체에 참여하고 학교의 교육 통해 국민의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애국계몽운동가 송당 김성희는 1847년 8월 14일생으로 부친 김노규(金魯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호적으로는 애초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 149번지였으나 흥림저수지 조성공사로 수몰되는 관계로 지석리 228번지로 이거를 하였고, 1925년 7월 21일 사망 후, 장남 김상찬(金商燦)은 판교면 현암리로 전적하고 거주지를 옮겼다. 1893년 교보통상사무아문 주사(9품)의 공직을 시작으로 1895년 9월 홍주부 주사를, 경북 관찰부 주사, 1902년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정3품) 역임하였다. 그는 또 1907년 1월 한성덕어학교(독일어) 부교관으로, 1907년 5월에는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후 자강회 및 대한협회 회원으로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사회 활동하면서 협회 월간지에 애국계몽운동에 따른 많은 30여 건의 논설을 남겼다. 송당 김성희는 각종 논설을 통하여 당시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보고,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국권을 상실하여 보호국 상태에 처한 원인은 외국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라 실력양성, 자강 실현에 힘쓰지 않는 한국 자체에 있다는 자기반성의 입장에서, 실력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 독립의 실현은 실력의 양성, 자강의 실현에서 가능하다는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선자강(先自强) 후독립(後獨立)론을 주장하였다. 아무리 기회가 있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므로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장차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첫째로 교육 진흥에 의한 실력양성론 폈다. 국가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 여하에 있을 뿐이며 자강의 방법은 국민교육을 통하여 실력을 쌓고, 산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부강해져야 한다며 교육자강론을 주장하였다. 학교 교육은 물론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교육과 의무교육 및 노동야학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둘째로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국권 회복은 농공상업의 발달에 있고 한국이 일본의 보호 국민으로 전락한 주요 원인은 식산의 부진에 따른 국가의 빈약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셋째로 정치개혁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지배자가 국가를 사유(私有)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 등 민권보장이 불가능하여 백성의 힘이 쇠잔해지고, 국민에 대한 정치참여를 불허하여 국민이 국가의 일을 남의 일보듯이 하므로 애국심이 생길 수 없고, 국민에 대한 가혹한 압제와 수탈로 국민의 생산 의욕이 감퇴해 산업이 피폐해지고 국력이 쇠퇴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정치발전은 국민교육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여 무단통치로 통제하고 반민주적인 방법으로 인권탄압을 더욱 강화하자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5. 송당 김성희 조선총독부에 12가지 정객 개선책을 건의 많은 인사가 구속되며 피해가 극심해지자, 송당 김성희는 조선총독부에 12가지의 의견서를 만들어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건의서 기록을 보면, “나는 구한국민의 한사람입니다. 일본 천황폐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73세의 노인으로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지금 미충하지만, 한마디의 건의함으로 다른 날을 기대합니다. 현재 학생계에 예사롭지 않은 소요가 발발한다고 합니다. 전에 교육자였던 자신으로서는 안심하기 전에 조선인 학생의 활동적인 성질과 일본정치의 평원적(平元的) 처치에 대해 12의 의견을 말하고 참고로 일본 천황폐하의 은혜를 본인도 보답하겠습니다. 저 국민의 정치사상은 즉시 독립을 구조하고 보전하는 것입니다. 근세동서각국의 국민은 헌법에 의하여 활동하고 입법권, 자치권과 같은 참정의 기관을 이용, 분명한 복리를 누려야 하는 것은 모든 다 아는 바입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사상으로 국민의 자격을 없애고 국가를 포기하고 사람의 도를 멸절시키는 것은 백만인이 있어도 국가에 어찌 이롭고, 통치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비록 국민의 권리의 사상은 사실이지만 어떤 이는 정부에 대해 얕은 지혜로 격렬하게 논쟁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열심히 애절하게 고소의 정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전자는 옛 영국 중세기에 여러 번 나타나는 일이고 후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분리 시 때의 현상입니다. 이를 총괄해서 말하자면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소요를 일으켜 정치사상을 알게 하고 이 정의 애정하게 하소연하고 마치 굶주린 자의 음식을 구하는 것과 같이 지금 어린 아이가(미성숙한 아동)이 음식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적당히 경계하여 타일러 서서히 멈추게 하고 슬프게 울며 벽 구석에 이를 숨어서 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조선인의 정치적 사상은 무엇보다 유래가 있고 이는 지난 총독부 10여 년의 교도의 은덕이다. 공자가 말하길 천하평[天下平]하다 또 말하기를 천하국가는 균일하다. 공자가 말하길, 적은 것을 근심하고 균일치 못한 것을 근심하고 가난한 것을 근심하고 편안하지 않을 것을 근심하고 편안하지 않고 균일하지 않으면 천하가 안녕하지 않음은 당연합니다. 통치권을 가지고서 천하를 평안하고, 균일하지 않은 것은 법률의 집행을 균일하게 교육의 시설을 동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평의 종자를 융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인의 타 종족 식민지에 압력으로 이와 같이 불평등의 조치를 했다면 장차 동화되지 못할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인의 성질은 역사의 관념, 풍속습관을 4천년 전래이고 물론 도덕성 재식성에도 결여, 인내성 결여이기 때문에 동기를 이용도를 넘어 생명상의 해를 볼 뿐 아니라 후일에 이 같은 행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특히 동화책 억압을 한다면 일본 정부의 명예상 누가 되고 정의 인도상 정당한 행동으로 진화, 오늘날과 같이 애절하게 호소하오니 인자 군자의 마음으로 이 억압을 오늘날 적당한 처치방법을 연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건의 하였다. 송당 김성희는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하다가 1925년 7월 21일 향연 78세 나이로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 자택에서 졸하였다. 묘소는 판교면 현암리에 있다.
올해 6.10 민주항쟁 36주년을 맞이합니다. 1987년 6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목숨 바쳐 항거한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 고개 숙여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35년 전,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국에 울려 퍼졌던 국민의 함성과 박종철, 이한열 두 청년의 숭고한 희생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바탕으로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군부 정권에 맞서 싸웠던 많은 민주열사와 시민들의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뜨거웠을 당시에 저는 서대문구치소에 구속되어 재판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구속되었던 이유는 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을 맡고 있을 당시인 1986년 10월 28일 이른바 ‘건국대 항쟁’이 벌어졌을 때, 군사정권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남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구속되었습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건국대 항쟁은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서울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갖고 발대식을 벌이던 중 교내로 진입한 3,0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던 끝에 총 1,525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9명이 구속 송치된 사건을 말합니다. 구속자 수가 단일사건으로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던 민주항쟁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은 학생들이 북한의 주장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고 용공으로 몰며 강력한 대응을 했고, 농성의 와중이던 10월 30일에 정부가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 추진계획을 발표해 엄청난 물난리가 곧 밀어닥칠 것처럼 희대의 사기극을 펼쳤습니다. ‘북한은 수공(水攻) 위협을 하는데 북한 편을 들고 반정부 데모하는 학생을 모조리 잡아 들여라’라며 학생들을 용공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에 저는 성명서를 통해 “건국대 연합집회는 현 정권의 장기 집권 음모 분쇄와 대통령직선제에 의한 민주 정부 수립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용공·좌경적인 세력의 집회는 아니었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군사정권은 저를 국가보안법(이적 동조 행위) 등의 혐의로 구속(11월 8일)했습니다. 민추협 회원들은 저의 구속 구속에 항의해 1986년 11월 11일 2시부터 ‘민주단체 탄압 및 민주 인사 구속에 항의하는 48시간의 시한부 농성’에 돌입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저의 구속에 대하여 ‘감옥에 갇힌 민주화의 입’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대서특필했습니다. 당시 저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몸은 남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지만, 조사는 경찰이 아닌 당시 남산에 있는 안기부에서 조사받으며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저의 죄명이 국가보안법위반에서 ‘국가모독죄’로 변경되었습니다. 성명서를 외신 기자들에게 유포하여 외국인에게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987년 3월 30일, 검찰은 저에게 국가모독죄를 적용하여 징역 3년을 구형했습니다. 국가모독죄는 유신 정권 시절에 국회에서 날치기로 형법을 개정한 악법 중에서 악법으로 손꼽혔던 조항이었습니다. 당시 형법 제104조 2항 국가모독죄는 ‘내국인이 국내에서 외국인이나 외국 단체 등을 이용 혹은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기관을 모욕·비방하거나 사실 왜곡·허위 사실 유포 등을 하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라는 내용입니다. 국가모독죄는 정치적 반대파의 입막음 도구로 활용되어 저를 비롯해 당시 야당 정치인들이 국가모독죄로 고초를 겪었지만, 1987년 민주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시행된 1988년에 들어서야 대표적 악법으로 꼽히던 국가모독죄는 형법전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의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우리 역사를 한 걸음 앞으로 전진시켰고 비로소 대한민국은 산업화, 민주화를 모두 이뤄낸 자랑스러운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렵게 이룬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 책임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35년 전 뜨거운 가슴으로 외치고 지켜낸 민주주의를 더욱 꽃피울 수 있도록 하고, 위대한 국민의 뜻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고 후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역사의 사명을 다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목숨 바쳐 항거한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 고개 숙여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장동혁(국민의힘, 충남 보령·서천/사진) 의원은 19일, 석탄화력발전소 폐지지역을 지원하는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정부의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오는 2036년까지 탄소중립 실천을 위해 전국 석탄화력발전소 58기 중 28기가 단계적으로 폐지될 예정으로,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폐지지역의 경제적 손실은 약 6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발전소 폐지가 지역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장 의원은 지난 5월 석탄화력발전소 폐지지역인 충남도, 전남도, 경남도, 강원도, 인천시와 ‘화력발전소 소재 시·도 간담회’를 개최하고 지원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수렴하여 특별법을 마련했다. 특별법에는 △폐지지역 지원기금 조성, △대체산업 육성체계 마련, △경제진흥산업 실시, △한국탄소중립진흥원 설립, △지원 특례(조세감면·예비타당성조사 면제·교부세 확대·국고보조금 인상) 등 지역실정에 맞는 체계적인 지원책이 담겼다. 장 의원은 “특별법 제정은 5개 시·도 천만 국민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요구”라며 “지역소멸 위기를 막기 위한 골든타임 확보를 위해 올해 안에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시·도 공조의 최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태흠 충남지사는 “독일의 경우 별도의 법 체계와 50조 수준의 예산을 투입하여 성공적인 산업전환의 토대를 마련했다”면서 “특별법이 통과되면 위기가 기회로 전환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산업통상자원부가 장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5개 시·도에서 발생되는 석탄화력발전소 연간 온실가스 배출액(CO2 배출 시장가액)은 6조 8,588억 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장 의원은 “연간 7조 원 수준의 온실가스 피해금액은 석탄화력발전소 폐지 시 고스란히 기여금으로 전환될 것”이라면서 “특별법 제정 시 관계부처가 앞장서서 기금 조성에 힘써줄 것을 촉구한다”고 뜻을 밝혔다. 이번 특별법 발의에는 여야와 지역을 뛰어넘어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의원 35명이 참여하여 눈길을 끌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충남 서천지역에서 생산되는 한산모시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9일 제33회 한산모시문화제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는 개회식 축사를 통해 “우리는 한산모시의 그 위대한 전통을 계승하고,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한산모시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단순함 속에 숨어있는 깊이에 세계인들이 감동할 수 있게 저도 많이 노력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김 여사의 한산모시문화제 개회식 축사는 33회를 연 문화제 역사상 최초다. 또한, 한국방문의해위원회 명예위원장 추대 이후 김 여사의 첫 지역 일정이 서천군 방문이라는 점에서 한산모시의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데 고무적으로 볼 수 있다. 김 여사는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로 시작하는 가곡 ‘그네’ 속 세모시가 한산모시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라며 “이런 문화제를 계기로 아름다운 서천을 첫 번째로 방문할 수 있어 더욱 영광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자랑 한산모시는 이미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 위상을 갖고 있다”라며 “한산모시는 삼국시대부터 핵심 교역품으로 이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주요 옷감으로 사용되어 품위와 존귀함을 표현했다”러고 설명했다. 이어 “한 필의 모시가 탄생하기까지 수십 번의 고된 과정을 거치고, 특히 세모시는 그 결이 지극히 부드럽고 섬세하여 잠자리의 속 날개 같다는 찬사를 받아왔다”라고 덧붙였다. 또 김 여사는 “이제 세계 관광시장의 판도는 개인의 밀도 있는 문화 체험이 이끌고 있다”라며 “이곳 한산에서 경험하는 모시 체험은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들에게 독특한 감흥을 줄 것을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결과보다는 과정에서의 완성도와 깊은 성찰을 체험할 수 있는 모시짜기 체험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게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후 김 여사는 문화제 시작을 알리는 개막선언식에 참여해 김기웅 군수를 비롯해 김경제 서천군의회 의장, 방연옥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등과 함께 베틀 본질(손잡이)을 당기는 퍼포먼스를 했다. 개회식 축사에 앞서 김 여사는 국가무형문화재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인 방연옥 장인의 안내로 무형문화재 전승 교육사, 이수자 등과 간담회 시간을 갖기도 했다. 김 여사는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한산모시짜기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라며 감사를 표했다고 이도운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으로 전했다. 이어 김 여사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우리 한산모시 의상이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지도록 노력하겠다”라며 모시 원단 한 필을 현장에서 직접 구매하기도 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정법시대문화재단 설립자 천공이 충남 서천군 제33회 한산모시문화제 방문 시 김기웅 서천군수와의 면담을 놓고 지역사회와 각종 언론매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김건희 여사의 문화제 개막식 참석 후인 다음날 축제장에 천공이 방문한 것과 김기웅 군수와의 면담을 가진 상황을 두고 ‘영접 의전?’이라는 때아닌 지역정치권의 화두로 올랐다. 군과 시민단체에 따르면 지난 9일 김건희 여사가 제33회 한산모시문화제 개막식에 참석했고 10일에는 천공이 해당 행사장을 찾았다. 이에 <sbn뉴스>는 당일 천공과 동행한 한 시민단체 관계자를 만나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사실 확인을 위한 인터뷰를 가졌다. 이날 시민단체 관계자는 일부 인터넷 언론 등에서 사실과 다른 추측 기사와 교묘한 사진 기술을 이용한 편협된 사실이 왜곡되게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sbn뉴스> 취재진에게 “결론적으로 말하면 천공 선생이 정법문화재단 관계자 등 20여 명과 함께 한산모시문화제를 방문한 사실을 일부 인터넷 언론 등에서 사실과 다른 추측 기사와 교묘한 사진 기술을 이용한 편협된 사실이 왜곡되게 보도했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천공 선생이 지난 10일 오후 2시경, 한산모시문화제 축제장에 일행들과 함께 도착해 길쌈놀이 시연 행사 등을 관람하고, 한산모시관에서 일행분들의 한산모시 의상 등을 구매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산모시관 쪽(주 무대) 행사장을 모두 둘러본 천공 선생은 일행과 함께 길 건너 행사장으로 이동했고 저와 오후 4:20경 서천군 특산물 판매장 인근에서 만났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 고향을 방문한 천공 선생에게 서천군 ‘서래야’ 특산품인 수박과 블루베리 등을 안내하던 오후 5시 15경 식사할만한 곳을 찾아 ‘열무국수’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라고 전했다. 이어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중 축제장을 점검하던 김기웅 군수를 비롯해 부군수, 군 관계자, 경찰 관계자 등이 늦은 점심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오다 천공 선생을 만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신 것을 두고 ‘영접이니 의전이니…’하는 등 일부 인터넷 언론들이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오보들을 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또한, 김 군수와 논란의 중심에 선 천공의 차담회도 정치적으로 이용됐다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그는 “오후 5시 20~40분경까지 약 20분간 식사하는 중 인접한 보조무대에서 진행되는 공연으로 시끄러워 서로 대화를 못 나눠 5시 45분경, 천공 선생이 조용히 차(茶) 한 잔 마실 곳을 원해 조용한 카페로 안내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식사를 마치고 나온 김 군수에게 조용한 찻집에서 담소를 나누자고 권해 천공 선생과 좀 떨어져 이동하던 김 군수가 축제부서장에게 행사장의 문제점 해소를 주문했던 상황이었다”라며 “이를 두고 마치 김 군수가 천공 선생 뒤에서 ‘수행하는 듯한 순간’을 연출해 보도한 것은 명백한 가짜뉴스이다”라고 밝혔다. 또 그는 “오후 6시경부터 약 20분간 카페에서 천공 선생 일행과 김기웅 군수 일행이 차를 마시고 한산모시 관련 환담하신 후 헤어지게 전부인데도 여기에 무슨 의전이 있고, 영접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군수는 꼭 고위공무원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만 영접하고 의전을 해야 합니까? 과거에 유시민 씨나 김제동 씨가 서천에 특강을 왔을 때, 군수는 차도 안 마셨냐!”라며 일갈했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한 한산모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는 매년 오는 고객인데 무엇이 문제지 의아해했다. 한산모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는 “천공이 수년 전부터 매년 모시를 구매하기 위해 방문해 본인에게 맞는 의상을 주문하고 필 모시 등도 구매하는 VIP 단골손님이다”라면서 “이 분의 축제장 방문이 무슨 문제냐”라며 의아해했다. 또한, 김기웅 군수는 행사자에서 이뤄지는 통상적인 사례로 확대 해석을 우려했다. 김 군수는 “축제장에서 시민단체 관계자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소개받고 차 한잔 나눈 것은 통상적으로 많이 이뤄지는 사례이다”라며 정치권의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충남 서천군이 지난 13일 자로 후반기 정기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는 민선8기 김기웅 군수의 취임 1주년을 앞둔 본격적인 군정 추진의 시발점은 물론, 서천군 신청사 시대개막, 국(局)체제로의 변환에 따른 조직개편 등에 따른 인사이다. 또한, 개청 이래 최대 규모라는 단순 논리 외에도 김 군수의 군정 추진 방향에 대한 기대로 초미의 관심 속에 진행됐다. 인사 결과가 발표되고 대부분의 반응은 서천군의 이번 정기인사는 한마디로 조직안정을 선택한 인사로 단정하고 있다. 김기웅 군수가 민선8기 현안 사업의 효율적인 추진동력을 확보하고 친정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파격적인 인사 단행을 할 것이라는 일각의 추측에도 불구하고 조직안정에 무게중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초미의 관심이었던 4급 서기관에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업 유치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평가되는 노희랑 투자유치과장을 경제산업국장으로 승진 발탁했다는 점과 경제산업 관련 부서에 그동안 김 군수의 신임을 받던 인사를 전진 배치했다는 점에서 경제 군수를 표방한 군정 방향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새로 신설되는 군수의 핵심 핵심인 담당관 자리에 경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안정적인 인사를 발탁하여 보직한 점이 두드러진다. 그동안 전문성보다는 행정효율을 중시했던 행정편의주의를 탈피하여 조직의 전문성을 강조한 인사라는 점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행정직의 보직으로 전문성이 아쉬웠던 도시건축과장에 건축직인 김계환 건축팀장을 승진 발탁한 점이나 보건행정과장에 보건직인 나성구 건강증진팀장을 승진 보임한 것이 그것이다. 그동안 서천군청 조직이 구태의연한 행정 중심주의에 따라 전문성이 없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었다는 점에서 김 군수가 전문 경영인 출신답게 능동적인 효율성을 강조한 인사라는 점이 파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소통행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 군수가 홍보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한 한승교 자치행정팀장을 전격 발탁하여 초대 홍보 감사담당관 직에 임명한 것은 앞으로 보다 투명한 소통행정을 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인사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인사 청탁의 근절에 대한 인사권자의 의지이다. 김기웅 군수가 이번 인사의 큰 틀은 능력 있는 인재가 요직에 배치되고 불합리하고 낡은, 인사 관행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군수에게 와서 청탁하는 사람보다는 묵묵히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책임과 성과를 낸 직원들을 발탁해 배려하기 위해 신중히 처리했다고 밝힌 점이다. 그동안 인사 청탁의 소문이 돌았던 일부 인사들이 이번 인사에 배제되거나 불이익을 받는 등의 인사 결과를 놓고 볼 때, 능력이나 성과보다는 연공 서열을 중시하고 인사권자의 측근을 통한 청탁 인사의 관행을 청산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이 괄목할 만하다. 이번 인사의 또 다른 특징은 조직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위해 인사 규모를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개청 이래 최대 규모라며 시끌벅적했던 것과 달리 신설된 부서의 자리 배치 등 인사 규모를 최소화한 흔적이 보인다. 민선8기 김 군수의 인사 스타일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 인사에서도 퇴직 6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인사를 주요 보직에 발탁하거나, 읍장 등 안정을 필요한 자리에 보직한 것은 옥에 티로 남는다. 아무튼 기대와 우려 속에 하반기 정기인사는 끝났다. 당분간은 청사 이전 문제와 겹쳐 조직이 어수선하겠지만 조속히 안정을 찾아 이제 출범 1년을 앞둔 민선8기 김기웅호의 본격적인 군정 현안 사업 추진에 박차를 기해야 한다. 다행히 안정적인 인사를 택하여 인사 후유증이나 반발 등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여, 김기웅호의 본격적인 현안 역점사업 추진의 걸림돌은 제거된 상태여서 앞으로 김기웅 군수가 새로 구축된 행정조직을 어떻게 가동하여 군정 목표인 ‘잘사는 서천’을 만들어 나갈 지가 기대된다. 인사에 100%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인사가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에서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인사의 충격보다는 인사를 통한 군정 추진의 동력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또 인사는 단지 목표를 향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제 과정을 거쳤으니 목표를 향하여 운동화 끈을 조여 맬 시간이 다가왔다.
구한말 천민인 백정의 신분이 철폐되고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 일제강점기가 되었어도 여전히 백정에 대하여는 차별하는 사회가 지속되었다 1923년도부터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이 우리 고장 서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서천에서 일어났던 형평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형평운동의 배경 형평운동(衡平運動)이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25일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다. 진주의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分社)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하였다. 형평(衡平)이라고 한 것은 ‘형(衡)’이라는 글자가 저울을 뜻하는 것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저울과 같이 공평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했던 차별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형평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지만, 내부 분열과 일제의 압력으로 10여 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2. 백정에 대한 차별실태 백정(白丁)에 대하여 호적대장에서는 16세기 전반에 신백정, 17세기 전반에 백정, 17세기 후반 이후에 유기장(鍮器匠), 피장(皮匠), 대한제국기에 도한(屠漢), 수육상(獸肉商) 등의 이름으로 등재하였다. 도한은 도살업에 종사하던 백정을 직업적으로 멸시하면서 부르던 명칭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제적으로 폐지됨으로 천민 신분에서 해방되기는 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까지 없어지지는 않아서 대한제국기에도 관습적 사회적으로 차별받아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도살업에 종사하는 것이 고정화되면서 수탈의 대상이 되어 경제적으로도 몹시 열악한 처지였다. 1920년대까지도 이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들은 기와집에 살거나 명주옷을 입지 못하고 가죽신을 신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외출할 때도 상투를 틀지 못하고 패랭이를 써야만 했다. 또한 예법상에도 차별은 존재하여 장례 때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고, 묘지도 별도로 자리 잡아야 했고, 가묘도 만들 수 없었으며, 여자들도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름을 지을 때는 인(仁), 의(義), 효(孝), 충(忠) 같은 글자를 쓰지 못하였고, 항렬도 없었다. 또한 백정들은 어린아이에게조차 항상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해야 했으며, 상민(常民-일반백성)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일반교인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행정적으로도 차별받아 민적(民籍-호적)에 올라가지도 못하였고, 납세나 국방의 의무도 일반인들과 같지 않았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민적(호적부)에 기록하는데, 이때도 붉은 점 같은 표시를 하거나 ‘도한(屠漢)’이라는 글자를 적어서 백정 신분임을 알게 하였다. 그러면서 상민들이 누리는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하여 학교에 입학할 수도 없었으며, 입학하더라도 백정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3. 서천군 형평사의 설치와 조직 운영 형평운동이 전개되면서 중앙조직에서 이어 전국 곳곳에 분사를 설치하였다. 1923년 4월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시작되었고, 서천군의 경우는 1923년 7월 23일 서천형평분사(舒川衡平分社)가 설치되었다. 시대일보 1923년 7월 23일 자 기록을 보면 서천군 형평분사(衡平分社)를 서천읍내(舒川邑內-읍성 안)에 설치하였다고 했다. 또한, 1924년 4월 3일 백정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서천형평야학회(舒川衡平夜學會)를 설치하였다. 서천 공립보통학교장 출구태삼랑(出口太三郞), 훈도 백남진(白南振), 김천식(金天植), 김재곤(金在坤) 등은 어려운 가정으로 나이 많은 아동과 노동자를 위해 일어(日語), 지리(地理), 역사(歷史)를 가르쳤다. 입학생이 날로 증가는 등 많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시대일보 1924년 5월 4일 자 기록을 보면, 서천 형평사 분회는 2회 정기총회를 열었고, 회원들로부터 50원의 기탁 성금이 모였다. 기탁자는 김0달(金0達), 김0학(金0學), 조0년(趙0年)은 각각 8원, 이0용(李0用), 박0성(朴0聲)은 각각 5원 50전, 이0수(李0水) 5원, 그 외의 기탁자도 있었다. 서천 형평사의 활동은 날로 활발해지면서 1925년 10월 28일 임시회에서는 경성 중앙 형평 본부 이성(李星)이 참석하고 형평운동의 필요성을 강연하였으며, 이0(李0)을 서천형평분사 상무서기(常務書記)로 선정하였다. 임시회 결의사항으로는 그동안 경영 보고, 서천형평분사 야학회 부흥의 건, 상무서기의 급여의 건, 중앙본부건축비 부담과 충남지사 유지비 송금의 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1928년 7월 2일 서천형평분사는 그동안 사장제(社長制)를 위원제(委員制)로 개정하고 위원장 이0용(李0用), 후보위원 박0성(朴0聲), 경리 부장 김0준(金0俊) 부원(部員) 김0학(金0學), 서무부장 박0식(朴0植) 부원(部員) 이0운(李0云), 조사부장 조0봉(趙0奉) 부원(部員) 길0운(吉0云) 최0수(崔0洙)를 선출하였다. 이러한 전국적으로 형평운동의 발전을 가져왔다. 4. 형평운동 조직 내 노선 이념의 갈등과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중단 그러나 내분이 있었다. 전자가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지만, 후자는 형평운동을 인권운동으로써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2파의 노선 차이는 컸다. 1925년 4월 양파 합동으로 경성부에서 ‘전조선 형평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이후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1924년부터 조직된 형평 청년회·형평 학우 동맹의 구성원들이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 다른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나갔는데, 이러한 형평사의 조직과 운동의 확대에 힘입어 형편청년회는 조선 형평 청년 총동맹으로 발전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장지필은 ‘재경(在京) 사상단체 합동 신년간친회’에서 형평운동 부분을 보고하고, 조직강화와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의 진출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서광훈(徐光勳)·장지필(張志弼) 등 간부들이 구속되자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 대회에서 명칭을 조선 형평사 총본부로 바꾸고,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일본 수평사(水平社)와의 제휴를 정식으로 결정했다. 이 시기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평등 운동을 주장하는 구파 간의 대립이 다시 일어나 1929년 제7차 정기 대회에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후 신파는 형평사 해소론을 제기했으며, 해소론을 둘러싼 대립은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1934년 일반 사회운동의 저조 속에서 형평사 지부의 재정리가 단행되고 활동도 공제 활동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1935년 大同社(대동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러한 형평운동은 형평사 창립 초기부터 많은 시련에 부딪혔는데, 그중 하나는 봉건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반 농민들의 거부감에서 오는 반(反) 형평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평운동이 인권운동의 차원을 넘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속에서 다른 사회운동과 제휴하여 전개됨에 따른 일제의 탄압이었다. 이러한 2가지 시련에 대한 투쟁은 형평운동이 반제국주의적·반봉건적인 성격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인권운동인 동시에 다른 사회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진행된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