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행정조직 개편안을 놓고 충남 서천군 행정부와 공직사회 및 외부 시민단체 등 간의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민선7기 노박래 군수 때부터 줄곧 거론됐던 ‘국 체제 전환’이 본격화 하면서 부서 간 통폐합 및 신규 부서까지 신설되는 등 대대적으로 조직개편에 따른 불협화음이 나오고 있다. 군에 따르면 행정조직 개편안은 3국· 2담당관·17과·2직속기관(5과)·1사업소·13읍면·1의회 등으로 구성된다. 3국 신설은 기존의 기획감사실, 사회복지실 등 2실을 폐지되고 행정복지국, 경제산업국, 안전건설국 등으로 개편된다. 기획예산담당관, 홍보감사담당관 등 2담당관이 신설, 교육체육과 1과를 폐지되고 가족행복과, 복지증진과, 시설관리과, 해양산업과 등 4과도 신설된다. 농업정책과는 농업기술센터와 통합돼 농업진흥과, 농업지도과, 기술보급과 등 3과로 구성되며 해양수산과는 해양산업과와 수산자원과 등으로 바뀐다. 하지만, 한 시민단체는 농업정책과와 농업기술센터가 통폐합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지난 3일 성명서를 내고 “농업정책과는 농림축산식품부 관할이고, 농업기술센터는 농업진흥청 관할로써, 중앙부서의 관할이 다르고, 국·도비의 성격도 매우 다르다”라고 지적했다. 또 “농업기술센터는 서천군청의 외청(外廳)에 해당돼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는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서천군의 농업생산 규모가 연간 7,000억 원(자가 소비 제외)을 상향하는 서천군의 주요 경제산업인 농업과 관련된 정책을 본청이 아닌 외청에서 관할한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말인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농업과 관련된 중요한 조직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농업인 단체 등과 어떠한 교감이나 의견수렴이 없었고, 농업인 단체 등의 의견을 무시한 졸속, 밀실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김기웅 군수의 입장은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단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김기웅 군수가 그동안 지켜본 농업정책과는 농업기술센터의 업무는 중복된 업무 등 농정 체제가 이원화됨에 따라 농민에 대한 밀착형 원스톱 농정서비스 제공이 실질적으로 어려운 문제점이 발생했고 특히 신규 청년 농업인과 귀농인에게는 더욱 혼란을 가중하는 결과를 초래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본다”라고 전했다. 여기에 “농업직과 농촌지도사 간의 상호 순환보직 등의 교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동일한 농업 분야에 근무하면서도 서천군의 농정 발전을 위한 공통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도 한몫했다”라고 말했다. 또 대군민 설명회나 군민토론회 등 군민 의사 반영을 위한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과업 수행 내용이 확정되는 최종보고회 이후에 20일간의 입법 예고 기간을 통해 군민의 의사를 반영하고자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여러 차례 조직개편을 하면서 군민 설명회나 토론회 등을 개최한 경우는 충남도 내 지자체에서도 그러한 절차는 거치지 않았다”라고 반박하면서 “오히려 충남도나 부여군과 같이 일부 지자체의 경우 민선8기 조직개편 관련 조례 입법 예고를 20일이 아닌 5일로 단축한 사례로 있다”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 서천군농민회 등 관련 단체가 통합 반대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는 등 지역 및 공직사회가 행정조직개편안을 두고 술렁이고 있어 추후 개편안 결정에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2007년 옥외광고물법 전면 개정으로 공공목적 광고물도 법 제3조(허가·신고) 및 제4조(금지광고물)를 준수하도록 강제했다. 이에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권력을 빙자하여 무분별하게 내걸었던 정당 현수막들이 불법광고물화 되자, 지난해 5월 민주당이 발의하고 국민의힘이 동조하여 여·야 합의로 옥외광고물법을 개정했다.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내거는 현수막은 법 제3조와 제4를 적용·배제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정치권이 내건 명분은 정당의 정치활동 자유 보장이었다. 국회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입법권을 남용한 전형적인 입법권 악용사례이다. 국회가 입법권 남용으로 옥외광고물법을 개정하면서 정당의 정치 목적 현수막들의 난립은 꼴불견 그 자체였다. 도시경관이나 시설물의 안전은 아랑곳없이 도시 곳곳이 정당 현수막으로 물결쳐 사회적 비난이 극에 달했다. 현수막이 운전자 시야를 가려 교통사고의 원인을 제공하고 행인이 현수막 줄에 걸려 넘어지면서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는 한편, 정당들이 상대 정당을 극도로 비방하는 메시지를 내며 정치 혐오 문화를 키우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이 있던 지난 한 달간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노골적인 문구가 전국적으로 도배되는 등 민주당의 표현 수위가 도를 넘고 있다는 비판이 더 많았다. ‘독도가 일본 땅? 이게 국익입니까?’ 등 한·일 정상회담을 독도 포기로 연결 짓는 비약적 문구도 등장했다. 국회 관계자도 “여야가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현수막 규제를 풀어 일어난 일로 정치권이나 국회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서천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정 정치인이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해서인지, 정당의 정책도 아닌 단순 상대 정당 비방의 목소리를 현수막에 담아 곳곳에 게시함으로써 군민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정당 현수막 문제로 언론 및 사회 각층으로부터 비난이 쇄도하자, 인제 와서 여·야는 정당의 자유로운 정치활동 보장을 명분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정했던 옥외광고물법을 재개정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정치권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한발 물러서는 형국이지만 정치권과 국회의 입법권 남용에 대한 국민의 반발은 이미 극에 달해 법률개정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유턴’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당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도시경관을 해쳐 국민의 주거환경을 침해하고, 운전자의 시야를 가려 교통사고의 원인을 제공하며, 공공시설물에 무분별하게 게시된 현수막으로 공공시설물이 훼손 위험에 처한다면 그것이 과연 ‘자유’인 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와 방종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정당이나 국회가 가지고 있는 입법권을 남용하며 방종을 자유라는 억지 논리로 무분별하게 법령을 개정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정치권에 대하여 국민이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제라도 여·야가 무분별한 정치 현수막의 난립으로 인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법령의 재개정을 통하여 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간의 사례를 볼 때, 정치권이 과연 제대로 옥외광고물법령의 입법 취지에 부합한 개선안을 내놓을지는 미지수이다. 이제는 정치권은 한발 물러나고, 옥외광고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도시경관 유지와 건전한 옥외광고 문화의 정착을 위한 공정한 법 개정이 이행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적시하고 있다. 지자체별로 현수막 지정 게시대 등을 통하여 표현의 자유를 펼칠 공간은 얼마든지 제공하고 있다. 특히 지자체별로 정당의 정치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하여 ‘정치 목적 우선 현수막 게시대 제도’까지 시행하고 있는 마당에 정치권만 예외 규정을 두어 셀프 특혜를 부여받고자 한 것이다. 그동안 국회의 입법권 남용을 악용하여 정치적 혐오와 상대 정당 비방을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게시한 정치 현수막은 게시한 본인 스스로 조속히 철거하는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 여·야가 옥외광고물법 개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재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법령을 악용한 사례는 법 개정 이전에 정치인 스스로가 자정 노력을 기울여 제거해야 한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라는 점을 정치인들이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의 자중을 촉구한다.
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4) 상륙을 결의하다 7월 13일 아침, 야스다는 조선관사에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 아무리 배에 침수가 심해도 조선측의 지시에 따라 선상 생활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히다카나 가와카미의 병세를 보면 이미 한계에 가깝다. 해변가 공터에 작은 가옥을 하나 지어 상륙시켜 줬으면 한다. 히다카, 가와카미, 야스다와 세 명의 종자 가운데 7명, 합해 10명, 관물 다섯 상자와 신변의 도구만 가지고 이주하게 해줬으면 한다고 요구했다. 전날부터 바람도 파도도 더욱 심해져 있었다. 14일 아침이 되어 도착한 역관 조행윤(趙行倫)의 서찰은 기묘했다. 이에 대한 대답도 야스다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공의 곤란한 상황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만, 상륙은 우리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지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조정에서 지시도 올 것입니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상륙을 용인한다면, 우리들이 사형에 처해집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5) 비인현감 결정 조선의 배로 옮기다 야스다는 일각이라도 빨리 선내의 곤란한 상황을 봐주었으면 하는 세 통째를 보냈다. 실제로 보고나서도 상륙을 거부한다면, 우리들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상륙을 감행한다. 그 때에 이르러 지도는 받지 않는다라고도 적었다. 드디어 마량진 첨사 이동형, 절충장군 이종길, 하급관사인 김기방과 장천규 무리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서 비인현감 윤영규와 역관 조명오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선내의 참상을 목격한 현감은 말했다. 야만적인 이민족이 이런 고난에 처한 경우라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귀국과 우리나라는 수호를 맺은 사이이다.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기에 우리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는 것도 있으나, 그러나 이 광경을 보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자가 있을까고. 야스다는 태수의 따듯한 정에 깊이 감사했고, ‘수호’의 의의의 깊음도 알고 있었다 ◯ 합법적인 방안모색 태수는 서면을 바라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김기방과 장천규가 옆에서 서면을 들여다봤다. 조금 있다 침묵에 잠겨있던 현감은 붓을 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표류선에 머물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상륙을 허용할 권한은 없다. 새로운 조선 배 몇 척을 계류시켜 표류선 옆을 지켜 선원들을 안전한 조선 배에 이주시켜 주겠다 하며, 작은 조선 배 두 척이 바로 준비되어, 표류선을 양쪽에서 끼는 형태로 횡으로 연결하려고 왔다. 이는 표류선을 풍파에서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으나, 야스다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현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전한 배로 이동이 일단 우선되어야 하며, 배를 좋다 싫다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느냐. 작은 배도 두 척 있으면 큰 배와 마찬가지 기능을 할 수 있다. 작은 배의 흔들림이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 준비한 조선배가 병자가 견딜 수 있을 정도 흔들리는지 자신들이 확인해 보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선 배 두 척이 즉시 표류선을 좌우에서 연결하여 배의 자세를 다시 세워 뒤집어지는 걸 막았다. 서둘러 망루 위의 화물을 조선 배에 옮겨 실어 한숨 돌렸다 ◯ 계속되는 보살핌 비인현감은 조정의 귀환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마량진에 표류한 야스다 일행의 불편함이 없도록 식량과 땔감 등을 제공하고 보살핌이 계속되었다. ◯ 조선의 큰 인물 비인현감 윤영규는 이날 “당신들 일은 제가 마음을 다해 어떻게든 하겠다”고 말했다. 야스다는 그 진심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었다. 조금 전 현감은 조선배로의 옮기는 안을 제시했을 때 야스다는 현감 윤영규를 그야말로 조선의 큰 인물 이라고 깊이 탄복했다. 그 사람 됨됨이는 엄숙하고 굳세어 방정하고, 예의를 갖춰 스스로 겸손하며, 잘 용서하여 충실하고, 잘 화목하여 너그럽다, 뜨거운 정은 얼굴에 나타난다며 전면적으로 칭찬하였다. ◯새끼 염소 선물 거절 표류선에서는 애완용으로 검은 아기염소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며칠에 걸친 태수의 후의에 대해 야스다는 이 새끼염소를 보내어 사의를 표하고 싶었다. 배 바닥 가까이에서 키워왔으나, 배의 침수가 진행되었기에 키울 장소 때문에도 고민이었다. 표류의 고난을 함께한 만큼 쉽사리 익사시키는 것도 가여웠다. 그래서 새끼염소를 태수에게 보내, 그 아래서 키워주면 다행이기도 했다. 만약 받아주지 않는다면 들판에 풀어줬으면 한다. 그러면 굶어죽지 않을 것이라고 현감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현감은 말했다. 아무리 금수라고는 하나, 표류할 때 생사를 같이 한 새끼염소를 타국에 버리고 가는 것도 가엽다. 먹이는 준비할테니 함께 데리고 돌아가는 게 좋다고. 조금 지나자 한 다발의 풀이 배에 도착했다. 현감은 먹이가 도착하는 걸 보고 나서야 배를 떠났다. 2. 관리와 선비의 교류 야스다는 마량포구에서 체류하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조선의 관리들과 지역의 선비들과 시(詩)를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의 실력을 엿보면서 마음의 감정을 자연스럽표출하기도 하였다 체류하는 동안 72수란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귀국시 호송관 이였던 송흠재(宋欽載-서천사람)이별의 시를 보면, 정들어 떠나보내기 아쉬워하는 마음 간절하다. 계곡물 앞에 두고 헤어지나 애석해라 대마도 구름 만리 가장 예의바른 일본인 세 사람 세상에서 빼어난 남자 야스다의 답의 차운에서... 동북의 먼 길 이별을 재촉 하네 물안개 자욱한 길 실로 천리만리 기우로 만난 위엄과 외로움을 갖춘 문채 좋은 이 남자 이렇듯 야스다는 본국으로 귀국하는 자신의 마음을 구름 한 점 흐르는 맑은 하늘에 비유하였고, 송흠재는 야스다의 돌아갈 뱃길을 염려하였다. 그들은 기우(奇遇)로 만났지만 서로의 깊은 우정을 느낄 수 있다. 송흠재가 예의 바르고 세상에서 기발(奇拔)한 사람이라고 한 것에 야스다는 차운하여 의롭고 문채 좋은 남자로 화답의 시를 보냈다. 두 사람의 이별시에 표현이 근사하고 이별의 정은 모두 깊고 진실하였다. Ⅲ. 본국의 귀환 길 1. 귀환 소식 24일은 아침부터 바람이 강하고, 파도가 높아 화물을 옮긴 조선 배가 침수되었다. 배에 남아있던 조선인 2, 3명 모두 열심히 물을 퍼냈다. 큰 바람이 불면 간간히 이렇게 큰 파도가 되는 일도 있다고 한탄했다. 점심이 지나 현감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조선 배에 의한 송환이 조정 명령으로 정식으로 정했다고 하며, 축하주를 지참했다고도 했다. 야스다는 이렇게 귀로가 열린 것은 오직 현감의 간곡한 정 때문이며 엎드려 감사한다고 응하여, 히다카, 가와카미 모두 현감의 술을 받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2. 송환준비와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 송환준비를 마치고 송환선인 조선배에 화물을 모두 옮기자 마지막으로 야스다를 포함한 세 명의 상관은 표류선을 내렸다. 앞바다의 송환선까지는 작은 배에 탔으나, 비인현감 윤영규와 첨사도 동승했다. 한편 이전에 투하한 돗자리는 배의 착연재로 표류선의 중앙에 쌓아올려졌다. 나카스케, 젠노스케, 센스케에게 명하여 풀 다발에 불을 붙여 표류선의 옆에 대기시키고 야스다 일행이 멀리 떨어지고 나서 점화시켰다. 드디어 조금씩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작은 배가 송환선에 도착하여 현감, 첨사와 헤어질 때가 왔다. 야스다 일행이 송환선의 현 쪽에 서자, 현감은 세 명의 손을 한 명씩 잡았다. 모두 이별이 슬퍼 말을 하지 못했다. 현감은 세 명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빈다고 말하며, 야스다도 또 현감의 앞날이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무사히 돌아간다고 맹세하기에 바빴다. 모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이별을 주저했으나 마침내 작은 배는 떠나갔다. 가슴이 막힌 것 같은 마음으로 선상에서 바라보니 해변으로 향하는 작은 배의 현감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표류선에서 검은 연기와 큰 불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감도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스다에게 있어 이것이 비인현감 윤영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송환선 선원 선주 겸 사공(沙工 배를 부리는 사람. 선장에 해당됨) 박흥복(朴興福) 63세. 거주지 경강(京江) 마포(麻浦). 격꾼(格軍) 김치원(金致遠) 46세. 거주지 농암(農巖). 김인관(金仁官) 42세. 거주지 별영(別營). 한대악(韓大惡) 40세. 거주지 마포. 임복득(林福得) 40세. 거주지 마포. 김여심(金汝深) 30세. 거주지 동막(東幕). 박장복(朴長福) 30세. 거주지 마포. 박득손(朴得孫) 22세. 거주지 수철리(水鐵里). 김인성(金仁成) 20세. 거주지 마포. ◯ 송환선 호송책임자 서천포만호 박태무(朴泰茂) 마량진을 떠나 부산만 우암포의 귀환노정이 정해졌다. 관할구역의 소환책임자를 지정하였다. 서천군 송환책임자는 서천만호 박태무, 인계지역은 고군산진까지 임무를 맡아 호송을 완료하였다. 야스다 일행이 지난 7월3일 마량포구에 표류된 이후 7월26일 귀국길에 올라 부산만 우암포에 머물었다. ◯귀환길 수로(水路)와 이수(里數) 마량진부터 서천군 개야소도(介也召島)까지 30리. 개야소도부터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고군산진(古群山鎭)까지 70리. 고군산진에서 부안현(扶安縣) 위도진(蝟島鎭)까지 60리. 위도진부터 영광군(靈光郡) 법성진(法聖鎭)까지 70리. 법성진부터 나주목(羅州牧) 지도진(芝島鎭)까지 110리. 지도진부터 영암군(靈巖郡) 완도진(莞島鎭)까지 80리. 완도진부터 강진현(康津縣) 마도진(馬島鎭)까지 50리. 마도진부터 장흥부(長興府) 녹도진(鹿島鎭)까지 110리. 녹도진부터 낙안군(樂安郡) 사도진(蛇島鎭)까지 80리. 사도진부터 순천부(順天府) 방답진(方踏鎭)까지 1백 리. 방답진부터 경상도 고성현(固城縣) 통영(統營)까지 1백 리. 통영부터 동래부(東萊府)까지 110리. 자료 : 충청병영장계록 1819년 7월 29일 3. 본국으로 귀국 (부산 다대포 도착 8월 30일) 12월 28일, 부산왜관에서 귀국 지시가 내려왔다. 정월 6일에 쓰시마로 가는 배에 탄다고 한다. Ⅳ. 일기의 가치와 활용방안 1. 일기의 작성 시점 1) 첫 번째 기록 -1819년 조선표류일기 내용중에 야스다가 틈틈이 일기를 작성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첫 번째 기록은 조선에 표착한 1819년(순조19년, 일본 분세2년) 7월3일의 기록으로 조선에 도착하여 이틀이 자났다고 하였다. 야스다는 조선역관 조행윤과 필담을 하고 그 내용을 옮겨 적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산포에 체류하면서 비인에서 필담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일기 사이에 맞추어 넣었다고 하였다. 2) 두 번째 기록 -1820년 두 번째 기록은 1820년(순조20년, 일본 분세3년) 봄,5월18일 대마도 하내포에서, 에라부지마를 출발한 1820년 6월14일부터 조선에 표착하여 지낸7월17일까지의 기록을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3) 세 번째 기록 – 1819년 세 번째 기록은 1819년(순조19년, 분세2년) 12월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4) 네 번째 기록 –1819년 네 번째 기록은 1819년(순조19년,분세2년) 12월16일에 기록으로 이 책에는 그 기록이 없지만, 일본에서 번역한 책에서 나타난다. 5) 다섯 번째 기록 – 1820년 다섯 번째 기록에 대한 기록은 1820년 9월 15일부터 24일까지의 기록은 후편에 자세히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대마도에서 조사받은 내용으로 추측이 되는데 조선에 대한 문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표류기 7권의 후서를 쓴 니이로 토키마스 햣코오(新納時升伯剛)는 야스다가 일본의 금제에 의하여 “표류기의 기록들을 태웠다”고 말했다. 2. 표류일기의 가치 역사적으로 일본인 등 각국의 표류선이 국내에 많이 표류한 사건이 많지만 대부분 지식인이 아니고 어부 등 하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여서 당시의 표류상황을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본 조선표류일기는 일본의 관공선으로 관리자인 지식인으로 특히 한자로 필답을 주고 받고 기록으로 남겨놓아 19세기 조선의 문화를 확인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새로운 콘텐츠개발로 활용할 가치가 크다고 생각한다. 3. 서천군의 그간 콘텐츠개발의 추진상황 1) 표류일기의 완역 활용 홍보 2019년 7월-2020년6월 완역출간--- 부경대학교 2) 마량포구 관광활성화를 위한 학술세미나 개최 — 서천문화원, 2020년 6월25일 3) 마량포구 관광시설확충 (조선표류관 설치 ) 마량 성경최초 전래관내에 검토 중 4 표류일기속의 콘텐츠개발 검토(방안) 1) 오페라 무대연출 – 전문극단과 협의 작품 창작연출 2) 에니메이션 및 만화 – 전문예술고, 대학과 협의 창작 3) 영화감독 작가 등 협의 제작 검토 4) 표류일기속의 인물 후손과의 만남 행사추진- 문중과 협의 5) 일본 지자체와 서천군과의 자매결연 문화교류추진 Ⅴ. 마무리하면서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우리 고장 비인면 마량진에서 폭풍우와의 사투를 벌이며 25명의 일본 관공선 표류인과 비인현감 윤영규와 첨사 이동형, 종사관과 함께했던 우리고자 선비와 일분 무사 야스다 사이에서 기록에서 본 오간 대화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한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다시 생각하는 울림이 크다. 표류하는 동안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에서 찰라에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는 절박함을 일기 속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당시 비인현감 윤영규와 야스다가 이별을 앞두고 아쉬워 하는 모습에서 과거 한 때는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불편한 관계였지만 당시 수교를 통해 가까워진 관계로 각자의 정든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현재는 정치적으로 먼 관계지만 향후 조선표류관설치로 일본인의 관광이 많이 유치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오는 6월 서천군청의 신청사 이전에 맞추어 그동안 청사 협소 등 다양한 이유로 군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했던 서천군청 행정조직을 개편하고자 하는 ‘서천군청 신청사 이전에 따른 행정조직 개편안’이 발표되었다. 지난 3. 29일 공개된 조직개편안은 공개되자마자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직 내부에서조차 행정 수요자인 군민을 위한 행정조직이라기보다는 행정서비스 공급자인 공직사회의 편익을 위한 조직개편안이라는 볼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민선7기 노박래 군수 때부터 줄곧 거론됐던 ‘국체제 전환’은 그나마 오랜 공론화를 통하여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협소한 군청사 문제 등으로 신청사 이전 이후로 그 시기를 미뤄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농업정책과의 농업기술센터 이전과 공공시설사업소 및 교육체육과 폐지 등의 개편안은 사회적 공감대 형성 없이 군 행정의 편익만을 위하여 공급자 중심의 행정조직 개편안이라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신청사 이전에 따른 군 행정조직개편안이 발표되자마자, 일부 시민단체에서 성명서를 통하여 서천군의 행정조직개편안을 ‘졸속(拙速)’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반대하고 나섰다. 농업정책과와 축산팀의 기술센터 이관과 관련하여 농민단체와 축산인들의 반발도 거세게 일고 있다. 전통적인 농업 기반 경제사회인 우리 서천군이 농업정책과를 외청(外廳)인 기술센터로 이관한다는 것은 군 인구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하는 서천군이 농업정책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군수 면담과 기자회견 등을 통하여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서천군이 국체제 전환으로 산업경제국을 신설한다면 서천군의 주요 산업 경제부서인 농업정책과는 당연히 산업경제국에 포함되어 본청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천군이 농업인구의 고령화와 농산물 가격폭락 등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농축산업 분야에 대하여 새로운 농축산 정책개발과 농축산 생산품 유통 및 6차산업과의 연계 등을 통하여 인구의 절반이 넘는 농축산 종사 군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지는 못할망정, 농업정책과를 기술센터에 통폐합시키는 방법으로 외청(外廳)으로 쫓아내는 것이 군민을 위한 정책이냐며 반대 의사를 표하며 대규모 반대 시위 등을 예고하고 있어 군정에 부담을 지우고 있다. 특히 이처럼 중차대한 정책(조직개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주민 의견 수렴이나 주민설명회 과정 없이 밀실에서 공직자들이 독단적으로 정책을 수립함으로써 정작 행정서비스를 받아야 할 수요자의 입장은 외면한 채, 행정서비스의 공급자 편의만 도모하려는 처사라는 비난과 함께, 500억 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여하여 새롭게 건립된 군 신청사가 공무원의 근무환경 개선목적이나 군민의 행정서비스 편의 제공 목적이냐며 신청사 건립의 본질 목적까지 들고나와 서천 군정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서천군이 3개월여간 조직개편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주민설명회나 주민 의견 수렴 과정 없이 공직 내부에서만 그들만의 리그를 펼쳤다는 점에서 이번 조직개편안이 명분을 잃게 되었다는 점에 대부분 군민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 조직개편안을 마련하고 있는 서천 군정에 큰 부담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천군의 주장대로 시기가 촉박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농업정책과를 외청(外廳)으로 내모는 조직개편안을 굳이 시간이 한정된 이 타임에, 행정서비스 수요자인 군민들의 의견 수렴 없이 강행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기가 부담스러워 보인다. 김 군수가 농민단체 대표와의 면담에서 밝힌 바대로 ‘농업 담당 부서’가 군수의 령(令)이 미치지 못한다면 군수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이용하여 충분히 조직을 장악하고 군정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군정에 활력을 불어넣었어야 했다. 행정조직의 개편 권한은 군민들에게서 선거를 통하여 위임된 군수의 고유권한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위임된 권한은 위임권자의 동의를 전제로 한 권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행정조직이 공급자보다는 수요자의 편익을 우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장항항 항만구역 관리청인 군산지방해양수산청이 항만 인근 토지를 대기업에 특혜 임대해 수년간 직원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지난 25일 경찰서로부터 집회신고를 하고 수년간 직원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해당 토지에 ‘항만시설 용도에 맞지 않는 특혜 허가’라는 현수막을 게시하는 등 본격적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 시민단체에 따르면 서천군 장항읍 신창리 420-15번지 외 1필지의 해당 토지는 항만법에 따라 해양수산부 장관이 육상 항만구역으로 지정 고시한 항만구역 내 시설이다. 하지만, 이 시민단체는 “수년간 항만구역의 사용 용도와 목적에 부합하지 않게 인근 대기업에 주차장으로 임대 사용하도록 허가해 국유재산 관리상 특혜를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이곳은 지난 2017년 군산지방해양수산청이 국비 111억 원을 투입해 장항항 호안 정비공사를 마친 구역”이라면서 “이 구역은 호안 정비공사에 포함된 주민 편의시설 등이 설치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시민단체는 “관광객 등의 방문이 빈번하나, 항만시설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근 대기업에 주차장으로 항만시설 사용을 허가하는 등 국유재산 관리에 허점을 내보이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국유지인 장항항 육상 항만구역 내 3,644㎡(약 1,000여 평)에 대해 사용 연장 허가를 철회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이 시민단체는 “군산해양수산청이 항만구역 인근에 있는 대기업 직원용 주차장으로 항만시설의 사용을 허가한 것은 항만시설의 용도 등 국유지 관리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특혜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유지를 군민의 손으로 돌려달라며 이 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해당 항만구역에서 현수막을 게시하고 시위에 나설 것을 강조했다. 한편 장항항 항만시설은 국유지 관리청인 군산해양수산청이 연간 약 1,200만 원의 임대료를 받고 매년 1년 단위로 항만시설 사용 허가를 내주고 있어 내달 40일 군산해양수산청의 사용 허가 연장에 지역 사회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민선8기 김기웅 호가 출범한 지 10개월도 채 안 되어 위기 앞에 흔들리고 있다. 시스템적으로 움직여야 할 행정력은 독단에 좌지우지하는 가운데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직자의 음주 교통사고까지 발생하여 공직기강 해이에 대한 책임론까지 거세게 일고 있다. 지난해 10월 연이은 공직자 음주 사고로 자정 결의대회를 통해 음주운전 무관용 원칙을 밝혔던 김 군수가 사건 발생 10여 일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후속 조치가 없어 군정 신뢰는 군수의 책임론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군은 음주운전 엄중 대응책으로 성과상여금 감액, 복지혜택 제한 등의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대책검토조차 이뤄지지 않아 전형적인 책임 회피성 행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480억이 넘는 순수 군민의 혈세로 건축되는 신청사의 준공을 앞둔 시점에서 칼자루를 쥔 충남개발공사의 갑질과 부실 설계, 부실시공 의혹이 제기되지만, 발 빠른 행정력을 보이지 못하고 그저 끌려다니는 형국에 사로잡힌 인상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사실상 처음 열리는 지역축제인 ‘동백꽃 주꾸미 축제’에 연일 관광객들이 밀려오지만, 진입로 도로공사로 교통체증을 야기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신서천화력발전소가 상업 발전을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동백정 리조트 사업 등 신서천협약 사업은 첫 삽도 뜨지 못하고 공전만 되풀이하고 있다. 관내에서 연이어 산불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군은 손을 놓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영농부산물 소각금지’조치로 고춧대 등 영농부산물 소각에 따른 산불위험은 일찍부터 예고됐지만, 군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앉아서 산불피해를 보고 있다. 이미 타 지자체에서 봄철 산불 예방과 미세먼지 절감을 위한 정부의 영농부산물 소각금지 조치에 능동적 대처로 ‘영농부산물 파쇄지원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지만, 군은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다. 도대체 서천군에는 ‘행정력’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지 묻는 군민들의 목소리가 거세어지고 있다. 군수의 지도력은 오가는 데 없고, 부서 간 협조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를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들리는 등 공직사회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보다는 탄식의 목소리가 높게 터져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공직기강 해이와 행정력 부재, 시스템 미가동 등 산적한 난제를 앞에 두고도 공직사회는 앞으로 다가올 신청사 이전에 따른 대규모 조직개편과 승진 인사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출범 10개월여만에 난항에 부딪힌 민선8기의 위기는 안중에 없고, 벌써 지난해 조직개편 후로 미루어 왔던 서기관 및 조직개편에 따른 사무관 인사에 대한 설왕설래만 난무한다. 민선8기 김기웅 호의 최대 난제는 행정 경험 부족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행정 경험의 부족은 시스템 가동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행정은 한두 사람의 독단으로 움직여서는 안 되며 시스템적으로 가동되어야만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군수의 행정 경험 부족을 보완해 줄 것이고 강력한 지도력이 가동될 것이다. 기대감 속에 출범한 민선8기 군정은 출범 1년도 못 되어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군정 경영혁신’을 통해 피폐해진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는 김 군수의 지도력에 거는 군민들의 기대는 컸다. 낙후된 행정 시스템을 혁신하고 창조경영을 통하여 군정을 활기차게 이끌어 나가겠다는 김 군수의 포부를 군민들은 기대했었다. 이제 민선8기가 1년을 내다보는 시점에서 김 군수가 군민의 기대에 답변할 때가 온 것 같다. 정체되고 답보 상태가 된 서천군정에 혁신과 창조의 새바람을 신선하게 일으킬 수 있는 지도자의 리더십을 이 시대는 요구한다. 구태의연하고 탁상공론적인 독단행정 마인드를 버리고, 행정력이 시스템적으로 가동될 수 있도록 군정에 새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한다. 아직도 몇몇 측근들의 손에 밀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구태의연한 행정을 답습하려는 안일한 태도와 책임회피는 과감히 끊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 군수의 강력한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은 몇 번이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 그러나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아픈 상처는 도려내야 할 때 도려내야만 상처가 곪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김 군수의 리더십을 기대하는 군민들의 목소리이다.
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문정 후 첫 보고(충청병영장계록) 이 표착에 관련된 <충청도병영장계등록> 순조(純祖)19년(1819년) 7월 초5일에, “이달 초5일 오시(午時)에 도부(到付)한 마량진 첨사(馬梁鎭僉使) 이동형(李東馨)의 첩정(牒呈)에, “이달 초3일 묘시(卯時)쯤 도부한 본진 갈곶(葛串-마량리) 후망군(候望軍) 방(方)과 김(金)의 치고(馳告-급보)에, ‘이양선(異樣船-다른나라배) 1척이 표도(漂到-표류)하여 연도(烟島)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므로, 첨사가 듣고 매우 놀라 장리(將吏)와 진졸(鎭卒)을 조발(調發-조사를 위하여 출발)하고 이양선이 표도한 곳에 달려가니 과연 이국선(異國船-다른나라배)이었습니다. 글로 물으니 답하기를, ‘일본(日本) 살마(薩摩) 선척이고 이죽선(二竹船-2개의돛배)이며 해인(海人)은 25명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인은 바로 선인(船人)을 이르는 말이며, 동풍이 급하게 불어 배를 제어하여 끌어들일 길이 없어서 인선(人船)을 많이 징발하여 반드시 끌어당겨 들여와 정박시킬 계획입니다. 선상 집물 또한 허다하지만 창황한 중에 갑자기 수효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막중한 변경(邊警 국경에서 일어나는 적의 침입 따위의 사변(事變)에 대한 경계)을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기에 지방관인 비인현(庇仁縣)에 급히 공문을 보내는 한편 연유를 우선 첩보(牒報-보고)합니다. 들여와 정박시킨 다음에 하나하나 적간(摘奸-부정여부확인)하고 연속하여 치보(馳報-급보)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양선이 표도하였다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문정(問情-정황을 물음)에 관한 여러 가지를 각별히 신중하게 살피게 하고 방수(防守-지킴) 등의 일도 엄히 신칙하여 제송(題送)하였습니다. 문정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차례로 치계할 계획입니다. 연유를 잘 아뢰어 주소서”라고 하는 첫 보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비인현감과 첫 만남 교유 비인현 마량진 안파포에 표류선 야스다의 배가 들어온 저녁, 포구 쪽에서 무언가 음악이 들려왔다. 선상에서 내다보니 그것은 의장단을 거느린 행렬이었다. 파란 덮개가 있는 가마를 탄 사람을 중심으로 한 5, 60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윽고 가마에 탄 사람이 배에 옮겨 타더니 총소리와 음악을 신호로 표류선박에 다가 왔다. 야스다는 여복을 단정히 하고 동자에게 패도(佩刀)를 들려 위의를 갖춰 선상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렸다. 찾아온 것은 비인현 태수(현감) 윤영규였다. 통통한 볼에 단정하고 또렷한 눈동자, 온화하고 신중하며 느긋하고 엄격한 느낌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윤영규가 처음 꺼낸 말은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왜 여기에 표착하게 되었는가?” 첨사의 첫 질문과 같았다. 그러나 먼 바다에서 겪은 고초를 위로하고 표류자의 부상을 염려하며 정박지를 연안 근처의 더 편한 곳으로 옮길 것을 권하는 말투는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관리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나 그런 호감도 잠시, 윤영규의 질문과 지시가 야스다에게는 몹시 집요하게 느껴졌다. 표착 첫째 날인 이날 비인현감 윤형규의 문정이 끝나고 표류선을 떠난 것은 결국 밤 10시를 넘어서였다. 그 후 정박위치를 변경하기로 하고 만조가 되는 새벽을 기다려 포구 바깥의 앞바다로 배를 이동시켰다. 비인현 태수 윤영규와 마량진 첨사 이동형이 함께 나타났다. 야스다는 얼른 얕은 곳에 배를 대면 배가 손상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수심이 깊은 곳에 정박하기를 청하는 한편, 물과 식량도 요청했다. 비인현감 윤영규는 요구를 받아들인 뒤 자신들의 원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국과 본국은 이미 수호관계를 맺었으니, 귀국의 배가 해난사고를 만나 고초를 겪는 것을 그대로 좌시하는 일은 있을 수 없소이다.” 그리고 “국법에 따라, 선내의 화물을 하나하나 점검하고자 하오”라고 말하며 신중히 방문의 목적을 설명했다. 이에 대해 야스다는 일본어 통역의 파견을 요구했다. 필담으로도 점검에는 응할 수 있지만, 통역이 있는 편이 아무래도 안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인현감 윤영규는 통역 파견은 화물의 점검을 끝낸 뒤 중앙정부에 신청하겠다고 했다. 점검 후가 아니면 통역 파견은 불가능한 것이냐며 물고 늘어지는 야스다에게 윤영규는 표착선 내의 점검은 국법이며, 우선 이를 끝내지 않으면 관리는 처벌받는다며 응하지 않았다. 3) 수군우후(崔華男)의 도착 다음날인 5일도 태수 윤영규는 아침부터 왔다. 해안가에는 비인만내의 표류선을 볼 목적으로 모인 조선인이 시장처럼 붐비고 있었다. 이날도 점심시간을 두고 점검 작업이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해가 졌을 때 악대와 함께 관인의 행렬이 해안 위에 나타나 드디어 배에 올랐다. 매의 눈과 흰 수염, 갓끈에는 흰 구슬이 나란히 달려 있었다. 태수가 자리를 양보했기에 지위가 높은 인물로 보였다. 관인은 수영집사관(수군우후- 수군 부사령관)인 최화남이었다. 수군우후의 품계는 정4품, 비인현감이 종6품이니 윤영규가 상관인 최화남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최화남이 근무하는 충청도 수영은 비인현에서 북쪽으로 30리를 사이에 둔 보령현 오천에 있었기에 표착 소식을 받고 나서 현지에 도착하는 데 조금 시간이 소요되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최화남은 이미 행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표류경과를 다시 질문했다. Ⅱ. 체류기간 보호 1. 상호배려와 신뢰구축 밤새도록 필담을 끝낸 새벽, 야스다는 싸우는 목소리 때문에 잠들지 못한 채로 6일 아침을 맞이했다. 소란은 배의 침수였다. 전방에 설치된 창고가 물에 잠겼다는 것이다. 지쳐있었기 때문인지 배의 상태를 물어본 감시자인 김기방에게 야스다는 조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얕은 여울에서는 배가 손상을 입을 수 있기에 정박 위치를 바꿔달라 요구하였다. 옆에 있던 장천규는 불뚝거리며 얼굴색을 바꾸어 ‘가령 1,000일이 걸리더라도 점검이 끝나지 않으면 상사에게 보고할 수 없다’라고 내뱉듯이 말했다. 책망하는 것 같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스다는 '필요하다면 가령 천만일이 걸리더라도 상관없다.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고 따졌다 연이은 가시 돋친 말과 연상 작용은 망상을 불러일으켰다. 우선은 장천규를 단숨에 베어 쓰러뜨리고 잇따라서 조선인을 모조리 도륙해 버리자고. 순간 야스다는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최근 3일 다 제대로 잔적이 없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느끼고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 것 뿐이 아닐까. 딱히 조선 관리인 장천규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 1) 의사와 술, 담배 점심을 지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의사가 왔다. 실은 어제 아침 비인현감이 침의와 함께 배를 찾아왔으나, 히다카도 가와카미도 침의에게 진찰을 받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야스다가 한 꾸러미만 남겨둔 광동인삼을 아침저녁 얇게 잘라서 달여 복용하고, 가능한 한 안정을 취한 채로 약의를 계속 기다렸다. 가와카미는 10일 이상이나 설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의사는 가와카미의 맥을 짚어보더니 배 상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진찰해주지 않는 거냐고 야스다가 묻자 약의는 맥을 짚으면 충분하다며 익원산과 지유탕을 처방했다. 야스다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어서 의사와 현감에게 술을 권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비인현감은 품에서 천천히 담배주머니를 꺼내서 야스다에게 한 모금 권했다. 지난번보다 맛있고 향이 훨씬 향기롭다고 칭찬하자 현감은 그것보다 조금 떨어지는 물건인데 라며 고개를 기울이며 아마 연관의 기울기가 좋은 맛을 끌어내는 것이겠지 라고 보충했다. 야스다가 사례로 담배쌈지(다바코이레)를 보내자, 비인현감은 그 ‘다바코이레’라는 일본 이름을 몇 번이고 소리 내어 말했다. 필담은 담배쌈지 등의 신변관련 물품에서 활, 총까지 화제가 확대되었다. 2) 후의와 제도 10일 오후가 지나온 비인현감은 1인 1되 기준으로 매일 세 끼의 식량을 표류민에게 지급할 규정이라고 말했다. 선내의 쌀 상태는 꼭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다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햇볕에 말리거나, 찌거나 하면 계속 이어서 먹을 분량 정도는 있었다. 현감의 후의는 감사했으나 야스다는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식량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선내의 쌀을 다 먹고 나서 받을 수 없는지 물었다. 현감은 이는 ‘국조교린성덕의 의의’이며 받아주지 않으면 자신이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국법’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지나자 김달수가 작은 배에 실어 7월 6일부터 10일까지의 5일분으로 쌀 2석 7말 5되 외에 장 2말, 고수 3개, 조기 한 묶음을 가져왔다. 이날 야스다는 ‘이웃나라 수호의 후의’에 기대겠다고 말하고, 표류민에 대한 식량의 정액 지급을 ‘국법’이라고도 표현했다. 이는 개인적인 선의를 넘은 조선국의 은혜였다. 3) 도둑질 범인 국법에 의한 처분 전날 어느 조선인이 일본의 빗을 담배쌈지에 숨겨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각됐다. 야스다는 훔치려고 훔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빗이 드물어서 손에 가지고 있는 사이에 우연히 담배쌈지 안에 들어간 것이겠지, 처벌을 할 것까지는 없다고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빗의 주인 입장에서 보면 용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범인’은 조선관사의 하인이었다. 이날, 표류인 세 명이 ‘범인’을 찾아 바닷가까지 쫓아가서 잡아왔다. 마량첨사 이동형이 봐 달라 청했으나 3명은 승낙하지 않고, 배에 데리고 돌아와서 수발을 묶어 결박한 후 배의 안팎을 끌어들인 분쟁이 되었다. ‘범인’은 야스다에게 머리를 때리며 도와 달라 빌었다. 조선하사 김기방이 해변과 표류선과의 사이를 문자 그대로 달려와 국법에 따라 범인’을 처벌한다고 전해왔다. 하인을 넘겨줬으면 한다고 한다. 야스다는 여전히 처분할 정도의 일도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으나, 선원들의 기분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김기방이 처분한다면, 굳이 그만두라고 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범인’의 신병은 즉시 조선관사 손으로 넘어가, 첨사 이동형이 바닷가에 무릎을 꿇게 하고 따져 물었다. 좌우에 서 있는 형사가 ‘범인’의 옷을 벗겼다. 드러난 궁둥이를 오른쪽 남자가 장으로 치고, 왼쪽 남자가 채찍으로 때렸다. 세 번 네 번 때리자 ‘범인’은 도둑질을 자백했다. 또 세 번 네 번 때리자, 그밖에도 옷감 2, 3폭을 훔쳤다고 털어놨다. 여기에 세 대 네 대 때리고 끝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이 ‘가결 같은 부결’로 끝난 이후, 거대 야당에서 벌어지는 정치팬덤 행태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소위 ‘개딸(개혁의 딸)’로 표현되는 이 대표 강성 지지층의 소동에 정치권은 물론 더불어민주당 당내에서도 정치 양극화를 부추기는 팬덤정치에 대한 폐단의 목소리가 높다. 팬덤의 뜻은 영어로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의 ‘팬(Fan)'과 영지(領地)를 뜻하는 ’덤(-dom)'의 합성어이다. 팬덤의 뜻은 쉽게 말하면 특정한 인물이나 브랜드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깊이 빠져드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팬덤문화는 연예인 팬클럽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팬덤은 사회학적으로 소수 매니아들이 즐기는 일종의 ‘은밀한 유희’의 셩격이 강하며, 상대를 알고, 좋아하며 완전히 빠져드는 것이 팬덤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최근 인터넷, SNS 등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정보의 공유와 확산이 빨라지면서 팬덤의 집단이거대화되고, 강성으로 변질되면서 대립과 갈등을 넘어 혐오의 수준에까지 이르러 사회적 문제로 급격히 대두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전 연예인을 대상으로 했던 ‘팬클럽’ 형태의 팬덤문화가 정치인을 대상으로 확산하면서 팬덤정치라는 신종어를 만들어 냈으며, 우리나라 팬덤정치의 시초는 ‘노사모’가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대선 당시 열풍을 몰고 왔던 노사모의 ‘노란풍선’은 고 노무현 대통령을 열렬히 따르는 지지자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에 그쳤다. 그러나 노사모 이후 박사모, 문빠를 거쳐 개딸에까지 이르면서 ‘팬덤속의 팬덤’이라는 극단적 강성지지자들이 정치세력화했다. 노사모의 뒤를 이은 박사모, 문빠 같은 정치팬덤은 자발적 정치 참여를 넘어 대규모 정당 가입을 통하여 당내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정당의 정책 노선이 이들 강성 팬덤들에 좌지우지했고, 당심과 민심의 괴리를 자아내면서 심각한 정치문제가 일어난 것도 이때부터이다. 문 전 대통령에 반대하는 당내 세력에 대한 ‘문자폭탄’ 공격이 적극성을 띠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1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부터 상대 후보에 대한 비난 댓글이 이어졌고, 일부이지만 팬덤을 이용하려는 듯한 정치인들의 부추김 현상마저 일어났다. 팬덤정치는 정치의 양극화를 부추겼고, 자발적 정치 참여를 넘어 ‘갈라치기’라는 부정적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이재명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 후 무더기 이탈표 색출 소동 등 거센 후폭풍을 나타내고 있는 ‘개딸’ 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개딸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젠더 갈라치기에 대한 반발로 2030세대 여성들이 지난해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당시 후보를 지지한 게 시작이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에 대거 입당한 이들은 당내에서 정치 현안에 강성 목소리를 내고 있다. 초기 팬덤은 정치인과 정당이 설립을 주도하고 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팬덤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부추김 속에 극한 대립과 갈등은 물론 자기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와 상대 비난 등으로 사회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팬덤정치가 자신이 흠모하는 정치인에 대한 절대적 지지 속에 그를 ‘오류 없는 절대자’로 신격화하며, 지지 대상자가 큰 잘못을 저질러도 너무도 쉽게 내로남불로 덮어 버리거나 반대파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퍼붓는 공격으로 치닫고 있다. 팬덤 정치에는 양면성이 있다. 유권자의 정치적 관심을 촉진하고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는 맹신화로 흐를 위험성도 크다. 팬덤이 인터넷상 도배성 댓글이나 퍼나르기를 통하여 여론을 호도하고, 정당의 정치 현안이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정당정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테러에 가까운 응징을 가함으로써 정당의 순기능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여기에 확고한 지지층 없이 선거판의 바람과 열기에 편승하여 당선된 일부 초선 정치인들이 이들 팬덤속에 끼어들어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불안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팬덤은 비록 특정 정당과 특정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야 모두에 존재한다. 달콤한 효과에 취해 정치적으로 팬덤을 활용하고 부정적 측면을 외면하다가는 부메랑을 맞을 수도 있다. 팬덤은 일종의 군중이다. 군중은 자기 동력을 갖고 있다. 일단 불이 붙으면 통제가 안 된다. 그들을 세뇌해 써먹는 이들은 결국 그 군중에 잡아먹히게 된다. 2021년 1월 발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의 연방의회 의사당 난입 사건은 팬덤 정치에서 비롯된 참사다. 강성 지지층의 맹목적 추종과 이를 이용한 정치 지도자가 어떻게 국가를 분열시키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리는지 잘 보여줬다. 지난 1월 브라질에서 일어난 대통령궁 등의 점거 사태도 이 사건의 판박이다. ‘남미의 트럼프’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을 지지하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수도 브라질리아 의회·대통령궁·대법원에 난입해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최악의 폭력시위를 벌였다. 우리라고 이런 폭력 사태를 빚지 말라는 법이 없다. 팬덤정치의 순수성과 긍정적 측면은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팬덤정치가 강성화되면서 나타나는 혐오와 분열 조장은 경계해야 한다. 더더욱 팬덤정치의 내부에 숨어 극렬을 부추기는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는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sbn뉴스==서천] 조혜림 기자 = 최근 서천군 관내에서 잇따른 산불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봄철 산불 발생의 주요 원인인 고춧대 등 영농부산물 파쇄기 보급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올해부터 산림청의 미세먼지 절감을 위한 영농부산물 소각금지가 시행됐지만, 안일한 행정 대처로 봄철 산불 발생을 키운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림보호법 시행령 개정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5일 이후부터는 논·밭두렁 태우기, 영농부산물 및 쓰레기 소각 등 인화물질 사전 제거를 위한 불놓기 허가를 금지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고춧대 등 영농부산물은 읍면에 신고하고 산불 감시원 입회해 소각시켰으나, 이 시행령으로 영농부산물을 마땅히 처리할 수 없는 노년층 농가 등에서 부득이 자체 소각하고 있다. 실제로 영농부산물을 자체 소각하다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으로 인해 산불이 발생했다. 소방서에 따르면 지난 20일 오후 2시경 마산면 요곡리에서 쓰레기 영농부산물 소각으로 추정되는 산불로 산림 12㏊를 소실됐다. 이날 산불은 산림 진화를 위해 군 공무원 450명, 산불 감시원·진화대 55명, 산림청 118명, 소방대원 100명 등 720여 명과 진화차 6대·소방차 12대 등을 포함하여 헬기 13대도 투입됐다. 이에 타 지자체처럼 봄철 산불 예방과 미세먼지 절감을 위한 영농부산물 파쇄기 보급이 시급해 보인다. 앞서 지난해 화양면은 자체 사업으로 영농부산물 파쇄기를 도입해 시범 운영해 고령 또는 여성농업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서천지역은 인구 고령화로 대부분의 밭농사 인구가 70세 이상 고령 또는 여성농업인을 주축으로 하고 있어 고춧대 등 영농부산물을 자체 소각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영농부산물 소각과정에서 다량의 미세먼지가 발생할 우려가 매우 커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차원에서 볼 때 발 빠른 대처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화양면처럼 영농부산물 파쇄기를 도입해 산불 예방과 미세먼지 발생을 감소하는 정책을 확대 시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농업인들의 바람”이라며 “우리 서천군과 같이 낙후된 농촌지역 고령·여성화 농업인의 비중이 큰 만큼 적극적인 영농부산물 파쇄기 도입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남 서천군지회(이하 서천 예총)가 지난 21일 문예의 전당 소강당에서 이취임식을 열고 제4대 강정남 회장 이임과 제5대 강석화 신임회장 취임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에서 강석화 신임회장은 그동안 서천 예총을 이끈 강정남 전 회장에게 노고를 위로하는 공로패를 수여했다. 공로패를 받은 강정남 전 회장은 이임사를 통해 “지역 내 수많은 예술문화인이 코로나 정국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맞이하는 기나긴 시련을 겪었지만, 이젠 그 시기가 끝나 다행이다”라며 “앞으로 오늘 취임하는 강석화 신임회장을 중심으로 우리 서천 예총이 꽃이 만발하는 봄날을 맞이하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예술문화를 사랑하는 김기웅 군수와 새로운 예술의전당의 건립 등으로 지역 내 예술문화인들의 새로운 도약과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라며 “저 역시 미력하나마 예술문화 도시 서천을 만드는 데 강석화 신임회장을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어 취임하는 강석화 신임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예술문화가 곧 복지인 시대가 오는 것은 예술문화의 수준이 삶의 질을 좌우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며 “어떤 이들은 예술을 관광이나 IT산업 같은 굴뚝 없는 산업 중에 하나라고 미래의 먹거리라고 말하기도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서천 예총은 서천에서 유일한, 그리고 가장 큰 전문예술가집단으로 4년의 임기 동안 예총의 저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라며 “그래서 우리 서천이 음악과 미술과 노래와 무용이 늘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 꿈을 향해 벽돌 한 장 더 올려놓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김기웅 군수를 비롯해 내빈 여러분들이 뜻을 합치면 어떤 일도 할 수 있고 아무리 험난한 길도 한 걸음씩 가면 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덧붙이며 “앞으로 예총 회장으로 해야 할 일,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했다. 오태근 예총 충남연합회 회장은 축사를 통해 “4차 산업 혁명은 결국 인간이 하는 부분을 기계가 대체한다는 것으로, 인간이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며 “인생을 즐기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술문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우리 예총은 다른 단체와 달리 전문성이 있어 직업을 택한 예술문화인들이 활동하는 단체로 앞으로 서천지역에 예술문화 생태계를 만들어 가 지역 내 예술문화인들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해당 지자체의 적극적 지원을 부탁한다”라며 “우리 예총 충남연합회 역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라고 강조했다. 또 김기웅 군수는 축사를 통해 “어떠한 예술문화 행사장이던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릴 일어난 적이 없을 만큼 예술문화를 사랑한다”라며 “하지만, 현재 5만 인구 감소로 인해 예술문화 행사가 많이 줄어 매우 마음이 아프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기업 유치와 공공기관 유치로 인해 서천 인구는 증가할 것으로 보여 이에 발맞춰 도약할 수 있는 예술문화의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행복한 서천’ ‘잘사는 서천’을 조성을 앞당기겠다”라며 “서천 예총 회원들 역시 이에 대한 책임성을 가지고 예술문화를 이끌어가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이어 가진 김명수 충남문인협회 회장과 최명규 서천문화원 원장의 격려사와 함께 강정남 전 회장이 강석화 신임회장의 정기 전달식 등의 식순으로 모든 행사가 마무리됐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김기웅 군수를 비롯해 전익현 도의회 의원, 오태근 예총 충남연합회장, 김명수 문협 충남지회장, 신동우 서천예총 초대 회장, 최명규 서천문화원장, 조남호 서천신협 이사장, 유승광 박사, 조동준 전 군의회 의장, 군산 예총 황대욱 회장·김정숙 수석부회장·신성호 부회장, 서천 예총 임원, 예술인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sbn뉴스=서천] 문재원 기자 = 충남 서천군 동백꽃·주꾸미 축제가 지난 18일 서면 마량진항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4월 2일까지 개최되는 가운데 sbn뉴스는 지난 26일 행사장을 찾아 축제 분위기를 살펴봤다. 이날 축제장에는 따뜻한 날씨 탓인지 봄철 별미 주꾸미를 즐기기 위해 주말 동안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축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축제장에는 싱싱함은 물론 제철을 맞아 알이 꽉 차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봄철 보양식 주꾸미를 주재료로 만들어진 볶음, 샤브샤브 등 다양한 요리로 말 그대로 주꾸미의 향연이 펼쳐졌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서천군지회(이하 서천 예총)가 지난 21일 문예의 전당 소강당에서 이취임식을 열고 제4대 강정남 회장 이임과 제5대 강석화 신임회장 취임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기웅 군수를 비롯해 전익현 도의회 의원, 오태근 예총 충남연합회장, 김명수 한국문협 충남지회장, 신동우 서천예총 초대 회장, 최명규 서천문화원장, 조남호 서천신협 이사장, 유승광 박사, 조동준 전 군의회 의장, 군산 예총 황대욱 회장·김정숙 수석부회장·신성호 부회장, 서천 예총 임원, 예술인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2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서면 마량진에 25명이 탑승한 일본관공선 선박이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통신사를 통해 수교가 이루어져 자국의 국민이 표류가 발생할 경우 상호 인도주의 입장에서 보호하다가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하였기에 조선에 표류한 자의 보호 과정 등을 표류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Ⅰ. 사건의 발단 우리고장 서천군 마량포구는 지정학적으로 옛날이나 현재도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외국 선박들이 무단, 또는 폭풍우등으로 표류되어 표착되는 사건들이 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하여 10차례의 표류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량포구는 1655년 조선시대에는 수군첨사진영으로 군영이 설치되었다.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에도시대에 일본인 조선반도에 표착한 사건은 92건에 1,235명이었다. 그 중 마량포구에 표착한 중요사건들은 순조16년(1816년) 영국의 함선Alceste호(함장 Murry Maxwell)와 Lyra호(함장 Basil Hall) 해도를 작성하기 위해 포구에 정박하고, 최초 성경을 전달한 사건과, 그 후 순조19년(1819년)7월3일 일본 규수 남단에 위치한 시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에 속한 부속도서 에라부지마에 1817년 봄부터 다이칸 보좌로 부임한 야스다는 임무를 마치고 다이칸 히다카 및 동료 다이칸 보좌 카와카미와 등 25명이 함께 고향에 돌아가게 되어, 1819년 6월 14일 낮, 동남풍을 타고 에라부지마를 출항했다가 갑작스런 폭풍우를 만나 파도에 밀려 표류가 시작되어 사선을 넘나들며 난파직전으로 가까스로 표류하다 마량진과 연도앞 해상에 정박한 사건이다. 표착한 야스다 일행이 비인현감 등 조선관료들의 조사등을 마치고 7월26일 마량진을 떠나 일본으로 귀환하는 동안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일기로 남겼다. 본 자료는 일본 고베대학 부속도서관에 『朝鮮漂流日記』 총7권 표지포함 315페이지 그중에 비인현의 관리와 주민의 생활모습 등을 남긴 37장의 화첩이 있다. 본 일기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 등을 본고를 통하여 살펴보고 일기의 가치에 대한 활용방안 제안하고자 한다. 1. 표류의 과정 문화14년(1817년) 봄부터 에라부지마 다이칸 보좌로 부임한 야스다는 武士(사무라이)로 나이는30세 엘리트였다. 다이칸 히다카 및 동료 다이칸 보좌 카와카미와 함께 고향에 돌아가게 되어, 문정2년(1819년) 6월 14일 낮, 동남풍을 타고 에라부지마를 출항했다. 잠시 뒤 토쿠노시마가 북쪽으로 보였고 그 서쪽의 바다를 밤새 북상했다. 보통 에라부지마를 출발하면 먼저 아마미오오시마로 향했다. 아마미오오시마의 항구에서 짐을 싣거나 바람을 기다린 뒤 사쓰마반도의 야마카와 항을 향해 북상했다. 즉, 에라부지마에서 곧장 야마카와항으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6월 15일 아침, 아마미오오시마에 근접했을 때 갑자기 바람이 바뀌고 폭우가 내려 서쪽으로 떠내려가는 바람에 오오시마에 도착하지 못했다. 16, 17일도 계속 서쪽으로 떠내려갔다. 18일에 남풍이 불어 오오시마를 향했지만, 해류는 반대 방향. 19일 밤 이후, 배는 서쪽으로 떠내려갔다. 야스다는 선장과 둘이서 선수에 앉아 진행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날 선장과 야스다는 앞으로의 항해에 대해 논의했다. 선장은 계속 바람이 동쪽에서 오기 때문에 이대로는 오오시마에 도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돛을 충분히 펴고 야마카와 항으로 직행하자는 제안이다. 야스다는 어쨌든 오오시마로 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야마카와항으로 가자고 반론했다. 20일 저녁의 하늘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색과 빛에 덮여 있었다. 6월 21일의 일기에는 ‘망망한 적류, 풍랑은 다소 노여움을 품다’고 쓰여 있다. 배는 계속 조류에 떠밀려가고 바람과 파도는 거듭 거칠어지고 있었다. 야스다는 지금 어디를 향해하고 있는 건지 점점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나나시마(토카라열도) 주변을 통과하는 중일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사공들은 ‘나나시마 근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나시마의 서쪽을 지나고 있는지 동쪽을 지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석에 의지하여 계속 북쪽을 향했다. 1) 폭풍우 속의 사투 22일, 폭풍으로 돛을 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큰 파도에 떠밀려 화살처럼 질주했다. 23일, 맹렬한 바람이 판자를 날리고, 격렬한 파도는 선미를 부술 것 같았다. 언제 전복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에 짐을 가볍게 해서 침몰을 막았다. 야스다는 ’개인의 짐은 모두 버려라. 번주어용 화물은 버려서는 안 된다‘고 배의 전원에게 명령했다. 배는 계속해서 큰 파도에 시달렸다. 거룻배를 배 쪽에 고정하는 3개의 밧줄 중 2개가 끊어지고 수십 척의 널판지가 새의 날개처럼 선상을 날아 바다로 사라져갔다. 뱃머리와 선미 주위의 복판이 부서져서 돗자리를 펼쳐 바람과 파도를 막았다. 야스다는 품속의 부적을 대야의 물에 띄워 기도하고, 선장에게 명령하여 대야의 물과 함께 바다에 던지게 했다. 부적은 번주로부터 받은 것으로, 바다에 던지면 수난을 피할 수 있다고 들은 것이었다. 야스다가 선실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니, 바다는 ‘둥근 산’을 이루고 배는 ‘구천의 바닥’에 있는 것 같았다. 구천이란 ‘저세상’을 말한다. 이미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선장과 사공 5, 6명이 달려들어 서로 큰 소리로 말하며 배의 키를 조작했지만, 전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상투를 잘라 평안을 빌었고, 부처의 이름을 몇 번이고 읊조리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윽고 돛대를 밑동부터 베어내기로 결단을 내렸는데, 이는 중심을 낮춰 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애초에 둘레가 몇 미터나 되는 돛대를 쓰러뜨리는 것은 평소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큰 파도에 휩쓸리고 있는 배는 상하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도 어려웠다. 히다카 요이치자에몬이 도끼로 베어 넘어뜨리려 했지만 손끝이 안정되지 않아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때 배 안에서도 강력하다고 알려진 지란쵸(知覧村)의 산시로가 골절도를 손에 들고 돛대로 향했다. 베어낸 돛대는 우현 방향으로 쓰러져 바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크게 세 번 울려 퍼졌다. 선체도 크게 손상되어 큰 파도가 닥칠 때마다 선내로 바닷물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장소에 따라서는 목 언저리까지 물이 차 있었다. 야스다는 ‘살아남고 싶다면, 전원, 물을 퍼내라. 따르지 않는 자는 베겠다.’고 외치고 열심히 물을 퍼내는 작업을 시켰다. ◯ 바닷물 끓여 식수 얻다 목숨을 건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야스다는 24일, 25일 동안 파도에 모든 것을 맡겼다. 거센 파도가 이제는 잔잔해지고 남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선미에 작은 돛을 걸어보았다. 사공들은 그 작게 펄럭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부자재로 임시키와 돛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완성된 것은 작았지만 이것으로 바람을 받아 북상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이 며칠간 4개 실었던 물통 중 3개가 쓸려가고 남은 1개도 넘어져서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에 대량으로 퍼 올린 바닷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고 그 증기를 식혀 순수한 물을 얻었다. 계속해서 남풍을 타고 북상한 28일, 낮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선상에서 빗물을 한 말 이상 모아 다 같이 벌컥벌컥 마셨다. 그 탓에 승선자의 반이 복통과 설사를 겪게 되었다. 29일, 햇볕이 처음으로 밝게 내리쬐고 바다의 색이 깨끗하게 보였다. 선상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일본 바다 같다’고 했다. 야스다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2) 기대와 불안 7월 1일 새벽, 10리 정도 앞에 확실히 섬이 두 개 보였다. 사공들은 일본 비센(肥前)의 5섬일 것이라고 말했다. 섬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선장은 술을 꺼내 신에게 바친다며 희색이 만면하여 마셔댔다. 두 개의 섬이 차츰 가까워지자 각각의 섬은 둘레 1리 정도의 암초로, 섬 사이의 거리는 수백 보였다. 5도 열도의 앞에 있는 오시마(男島), 메시마(女島)가 아닐까 하는 자도 있는 한편, 뱃사람 중 가장 연장자인 쇼에몬은 신중한 어조로 산의 형태가 일본의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2일 이른 아침에는 동쪽에 봉우리가 2개, 남쪽에 큰 섬이 보였다. 5도 열도가 아닐까 하는 자가 있고, 남동쪽에도 섬이 두 개 보였다. 선장은 5도 중 탄가시마(男鹿島)(오지카지마(小値賀島))가 아닐까 하고 말했다. 이날의 해 질 녘, 동북쪽으로 구름을 휘감고 하늘을 뚫는 큰 산이 보였다. 이때 쇼에몬은 조용히 “일본의 서북쪽 바다에서 이런 큰 산을 본 적은 지금까지 없다. 아마 여기는 조선국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선원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지며 두려움에 떨었다. 야스다는 선원들에게 “두려울 것 없다. 똑바로 나가자” 하고 배는 계속해서 동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2. 마량진 표착(漂着)과 문정(問情) 1) 마량진 첨사의 문정 7월 3일 이른 아침, 커다란 포구에 도착했다. 돛을 내리고 닻을 내린 곳은 주위를 에워싸듯 산이 이어지는 장대한 땅이었다. 그러나 흉노의 땅일 수도 있기 때문에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활과 총을 준비하고 주변의 기색을 신중히 살폈다. 잠시 후 동서쪽 해안에서 두 개의 돛을 단 배가 20여척 나타나 수백 보 거리에서 사쓰마 선박을 둘러쌌다. 전혀 모르는 만이(蛮夷), 흉노의 땅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선상은 환희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윽고 둘러싼 배중에서 2 척의 작은 배가 다가왔다. 히다카 요이치자에몬과 카와카미 히코쥬로 두 명은 병석에 누워있어 도저히 협상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야스다가 혼자 이방인과의 필담을 각오했다. 문사에 익숙지 않은 자신이 필담을 맡다니 남들이 비웃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라부지마를 떠난 뒤 선상에서도 계속 한자를 공부해서 한문으로 여행기를 써왔다. 어쩌면 어구의 배치가 바뀌어 의미가 없는 문장을 거듭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조선인도 의도는 알아줄 것이다. 두 척의 작은 배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흰 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야스다는 그 모습과 용모를 보고 바로 조선인임을 알았다. 조선의 두 척의 배는 마량진 첨사 이동형(李東馨)의 조사단이었다. 야스다와 조사단이 사쓰마 선상에서의 기념할 만한 첫 필담 응답은 다음과 같다. 문) : 그대는 어느 나라 어느 땅의 사람이며, 어쩐 일로 바다에 나와 표류하고 있었는가? 답) : 일본 국의 배로, 역풍을 만나 오랫동안 바다에서 고초를 겪다 오늘 천운을 얻어 귀공의 나라에 도착하였다. 귀공의 나라가 어디인지는 모르나, 배 안의 물이 고갈되었으니 불쌍히 여겨 자혜를 베푼다면 머리 숙여 감 사 하오리다. 야스다가 요구한 물은 잠시 뒤 여러 척의 배가 실어 날랐다. 배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그릇을 손에 들고 목을 축였다. 수질이 매우 뛰어난 ‘천하제일의 물’이라고 모두가 호평일색이었다. 지금까지 바닷물을 증류한 물만 마셔왔으니 천연수가 분명 더 맛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 도착한 안도감이 물을 더 맛있게 느끼게 했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이곳은 조선국 충청도(忠淸道) 비인(庇仁)이라고 알려주었다. ◯ 선상의 소란 선상으로 찾아온 일행 중에 보기에도 의관이 다른 인물이 있었다. 충청도 비인현 마량진 첨사 이동형(李東馨)이다. 이동형(李東馨)은 사쓰마 선박을 조선의 작은 배로 견인하여 파도가 잔잔한 곳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선내에서는 제안에 찬성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송하여 키와 돛대를 다시 만들고, 배의 수선을 부탁하고 물을 채운 뒤 일본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달라고 해서 자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선상에 찾아온 사람 중에는 관리가 아닌 자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은 마치 시장 한복판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중 야스다의 벼루함을 들여다보는 자들이 있었는데, 붉은 먹이 신기했는지, 손짓으로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야스다는 주묵(붉은먹)을 3개로 나누어 3명에게 나누어주었다. 뒤늦게 온 자는 그런 혜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도 벼루함 안에서 인주를 찾아내더니 조금씩 떼어내서 가지고 돌아갔다. 야스다가 문득 보니 인주가 반 정도로 줄어있어 ‘독’이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주자, 당황하여 돌려주는 자도 있었다. 야스다는 김시기라는 하급 관리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충청도 비인이라는 곳은 조선국의 동과 서중 어느 쪽에 위치하는가? 아니면 북쪽인가?”,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여기서 일본은 어느 방향에 있는가?”, “귀국에는 일본어 통역이 있는가?” 오후 2시가 지났을 즈음일까, 풍향은 어쨌든 조류는 배를 만 안쪽으로 이끌기에 좋은 상태였다. 즉시 조선의 작은 배와 사쓰마 선박을 이어 양쪽의 ‘격군(格軍)’이 힘을 합쳐, 만(灣) 안으로 이동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최근 발생한 충남 서천군청 공무원의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취임 후 8개월이 되어가는 군수에 대한 행정장악력과 통솔력 부재가 도마 위로 오르고 있다. 김 군수 취임 후 알려진 것만 벌써 5번째 음주운전으로, 음주운전 행위를 뿌리 뽑기 위한 지속적인 사회적 관심을 무색하게 하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직기강 해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특히 이번 사고는 개인적 일탈을 넘어 근무의 연장이라는 부서 회식 후 만취 상태에서 사고를 냈다는 점에서 그간의 여타 공직자 음주운전과는 그 유형이 매우 다르다. 제8회 지방선거에서 서천군수에 당선된 김기웅 군수가 취임한 후 미처 3개월도 안 돼 공직자들의 음주운전 사고 및 적발 4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이에 서천군은 지난해 10월 김기웅 군수를 비롯해 부군수, 각급 부서장과 읍·면장이 참석한 가운데 ‘음주운전 근절 자정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행사 후 ‘음주운전을 반사회적 비위행위로 인식하고 음주운전 시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며 결의문을 채택하여 군수에게 제출했다. 서천군청 공직자들도 음주운전이 반사회적 비위행위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부서 회식 후 만취 상태에서 운전한 행위는 공직자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없는지를 보여주는 일 단면이다. 이 사고로 김기웅 군수의 통솔력 부재론까지 확산하면서 군수 책임론이 거론되고 있다. 김 군수는 지난해 10월 공직자 음주운전 근절 자정 결의대회에서 “공직자의 음주운전은 본인뿐만 아니라 직장동료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파괴하는 비위행위”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무관용 원칙으로 엄중 처벌할 것이고, 음주 운전자는 물론 소속 부서장과 부서에도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또한 서천군은 음주운전 엄중 대응책으로 음주운전 징계에 따른 법적제재 외에 성과상여금 감액, 복지혜택 제한 등 사후제재 강화방안을 검토해 근절대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결의대회 이후 이렇다 할 사후제재 및 근절대책을 수립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 전형적인 책임 회피성이라는 비난을 받아오던 차에 또다시 공직자 음주운전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늑대가 나타났다”라며 자정 결의대회를 열기에는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일 것 같다. 최소한 군수가 확대 간부회의 석상 등을 통해 군수의 통솔력 부재에 대한 책임 통감의 의지를 군민 앞에 표명해야 한다. 또한,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관련 부서장들에게 물어 흐트러진 공직기강을 바로 세우고 군수의 강력한 통솔력을 군민 앞에 보여주어야 한다. 공직자들의 공직기강 해이는 기관장의 통솔력 부재에서 시작된다. 공직사회는 조직의 특성상 항상 긴장감의 연속성이 필요하다. 나태하고 안일한 사고로 일관하는 공직사회의 복무 자세에 일침을 가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김 군수가 나서야 한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취임 후 8개월여가 지난 지금에도 군수의 령(令)이 서지 않는다는 볼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온다. 이번 공직자의 음주 교통사고를 계기로 김 군수가 군청 내 흐트러진 공직기강을 바로잡고 강력한 통솔력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군민의 바램일 것이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지난해 치러진 제8회 지방선거 충남 서천군수 경선에서 갈등이 빚어진 노박래 전 군수와 김기웅 현 군수가 화해의 회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화재다. 이 회동은 경선 후 8개월 만이다. 김기웅 군수는 지난 11일 김성광 부군수와 함께 기산면 내동에 있는 노박래 전 군수의 자택을 방문하고 그동안 마음속에 뒀던 이야기를 풀어 놓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만남은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 측에서 주선한 것으로, 김 군수가 사전에 노 전 군수 측근에게 자택 방문을 전한 후 승낙하에 이뤄졌으며 지역발전을 위한 미래 지향적인 의견을 나눴다. 이날 노 전 군수 부부는 김성관 부군수와 함께 자택을 방문한 김 군수를 마당 앞까지 나와 반갑게 맞이하고 뜨거운 악수와 반가운 인사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였다. 자택 안으로 들어선 노 전 군수는 김 군수에게 “친분이 있는 선친의 도움으로 당시 담당 공무원 시절 하굿둑 관광지 조성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됐다”라며 가족 간의 인연을 회상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노 전 군수는 “8년간 군수로서 재임 기간 중 성과와 예산 부족 등으로 미처 이루지 못했던 군민 생활 안정과 직결되는 현안 사업이 남았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현안 사업을 김 군수가 관심을 가지고 지속해 추진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당부하면서 “민선7기 군정 계승을 발전시켜 민선8기의 군정 목표를 삼아 고맙다”라고 전했다. 이에 김 군수는 “늦게 찾아봬 죄송하다”라며 “행정 경험이 미숙해 경륜이 높은 노 군수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라고 화답했다. 이어 “전 현직 군수가 합심해 군정을 잘 이끌어감으로써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선배 정치인으로 남아 달라”라며 “노 군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라고 당부했다. 또 김 군수는 “오는 6월 12일 새 청사로 이전을 잠정 확정했다”라고 설명하고 “군청사 준공식에 노 군수 내외분을 초청하고 싶다”라고 요청했다. 요청에 승낙한 노 전 군수는 “군청 신청사 공사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끝까지 김 군수께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또한 김 군수가 가까운 시일 내에 노 전 군수 부부를 초청해 식사 회동 자리 마련을 약속하고 다시 한번 노 전 군수의 행정 경험과 경륜을 빌려달라 말해 화해의 웃음꽃이 피었다. 이에 노 전 군수는 가까운 시일 내에 군 청사를 방문해 반가운 공직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군정을 격려하고 싶으시다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군정을 8년간 책임졌던 원로 정치인으로서 후배 정치인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사심을 버리고 군정 발전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나서겠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전 현직 군수 간의 회동은 그동안 선거라는 ‘프레임 덕’을 걷어내고, 세간의 온갖 추측과 우려를 불식시키는 화합이라는 크나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리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