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
1923년 1월 9일에 서울 응암동에서 태어났으며 1947년 봄에 보스톤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35분 39초로 일등을 했다. 고려 대학교 상대를 마치고 1961년부터 1977년 2월까지 서울운동장장의 일을 맡았다. 지금은 주식회사 동양실업의 판매 이사로 있다. 주소는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525 번지 28.
손수레 타이어 고무를 오려 밑창을 댄 낡은 구두를 신고 우리들이 보스톤 마라톤 대회의 장도에 오른 날은 사월 삼일이었다. 우리들이란 손 기정, 남 승룡 그리고 나였다. 대마지 양복을 걸치고 광목 와이샤쓰를 입고 넥타이는 손 기정 씨가 매던 것을 나누어 매었다. 그런대로 국제 신사 티를 낸 셈이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나라 대표라는 체면이나 외국으로 간다는 자랑도 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다는 자랑도 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다는 그 사실이 우리들을 들뜨게 했다.
김포 비행장에서 우리들은 미군정청에서 주선해 준 군용기를 탔다. 창 바깥으로 서울을 내려다 보았을 때에 콧날이 시큰했다. 떠나기까지 겪은 일들이 눈 앞에 스쳐 갔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보스톤 국제 마라톤 대회가 있는지조차 몰랐었지만 말이다.
나는 고려 대학교 예과 이학년 학생이었다. 손 기정 씨, 남 승룡 씨와 같은 분들이 만든 조선 마라톤 보급회에
서 선수들을 뽑을 때에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손 기정 씨 집에서 묵으며 연습했다. 밤낮 없이 뛰고 있는 우리들을 발견한 한 미국인이 미국의 보스톤시에서 해마다 국제 마라톤 대회가 열리니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기회만을 찾고 있던 우리들은 나갈 뜻을 굳히고 참가 절차를 알아 보았다. 보스톤 체육회에서 초청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와 같이 발전하자 조선 육상 경기 연맹에서도 발을 벗고 나서서 일이 되도록 주선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미군정청의 체육과 과장이던 스메들리 여사와 줄을 대었다. 그는 마흔살쯤 된 아주머니였다. 그때에는 한국인이 달러를 가지는 것이 불법이었다. 물론 미군이 있던 군정 시절이라 암시장에서 달러를 사고 팔 수도 있었으나 공식으로는 가질 수도, 쓸 수도 없었다.
돈이 원수라더니 보스톤으로 가려고 해도 돈이 없었다. 그놈의 달러를 구할 재간도 없었다. 그러나 군정청에서는 보스톤에 사는 한국 교포가 재정 보증만 서면 출국을 허용하겠다고 했다. 수소문했더니 보스톤에는 재정 보증을 설 만한 두 사람의 한국 교포들이 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한 사람이 조선 육상 경기 연맹 이사장이던 정 상희 씨의 먼 친척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백 남룡이었다. 이천 달러 쯤이면 여비를 뺀 보스톤 체제비가 될 듯 하였으므로, 우리는 국제 전화로 그와 상의하여 그와 보스톤에 사는 또 한 사람의 한국 교포, 김 태슬 씨가 재정보증을 서기로 하고 미군정청과 협의하여 참가 수속을 밟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스톤 교포로부터 재정 확인서가 오지를 않아 못 가는 것으로 단념을 했는데 며칠 뒤 미군정청에서 가게 됐으니 출국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준비를 서둘러 김포 비행장에 나갔으나 재정 보증이 확인이 아니되어 출국 중지 명령이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도 알리지 않고 심통이 나서 손 기정 씨의 집에 드러누워 버렸다.
보스톤이 있다는 동쪽 하늘마저 쳐다보지 싫을 지경이었다.
일이 이렇게 번지자 하지 장군이 신문 기자들과 우리들을 모아 놓고 "당신네 교포들의 무성의로 선수들이 못 간다" 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목이 메어 말도 할 수 없었다. 땅만 쳐다보고 하릴없이 중앙청 정문을 나서는데 스메들리 여사가 뒤쫓아 와서 우리들을 부등켜 안고 울었다. 우리들은 참았던 울음을 끝내 참지 못하고 터뜨리며 통곡을 했다. 스메들리 여사가 자기에게 모아 놓은 돈이 육백 달러가 있으니 그것을 토대로 삼아 성사시키자고 했다. 그리고는 우리들을 끌고 러치 장군에게 갔다. 착잡한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으나 달리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들을 대회에 꼭 내보내야만 한다는 이유를 들며 그의 주장을 내세웠다.
군정 장교 구락부에서 천오백 달러가 걷혔다. 그리고 그 여자는 선교사 언더우드 씨에게 모아 놓은 한국돈이 있으니 미국 수표를 끊으라고 강요하다시피 했다. 참으로 낯이 뜨거운 노릇이었으나 조선 육상 경기 연맹이 모아 놓은 현금이 몇푼 되지 않아서 실제로는 수표와 맞바꿀 돈이 없었다. 국내 유지들은 입으로만 낸다고 해 놓고는 뒤로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내 동포들이 차마 이럴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야속하기 그지 없었다.
도꾜의 하네다 비행장에 내려 다른 군용기로 갈아 탔다. 다음에는 구암도의 군용 비행장에 내렸다. 여기에서 밥을 먹게 되었는데 통을 한개씩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먹어야 할 지를 몰랐다.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병아리들처럼 우리는 통 한 번 쳐다보고 서로 얼굴 한 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훔쳐보고 난 뒤에야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뜨자마자 곧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였다. 같이 타고 있던 미군들이 눈에 둥그레지며 무엇인가를 덮어 쓰기 시작했다. 길을 떠날 때에 우리들은 눈치만 믿을 수 밖에 없다고 작정한 처지였다.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젓갈을 얻어 먹는다는 말이 헛되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우리들도 그들을 따라 재빨리 낙하산을 걸치기 시작했다. 좀 뒤에 또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들은 등에 걸쳤던 것을 풀어 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들의 눈치가 그들의 눈치에 주눅이 들었던지 도무지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등에 걸쳤던 것이 벗어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입을 때와는 달리 벗을 때에는 여유있게 우리들의 행동까지 살피고 있었다. 앞이 캄캄해 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입이 세개가 있다고 한들 별 수가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뿐이었다. 땀이 굵은 빗방울처럼 등줄기를 타고 내려 나는 물에 빠진 새앙쥐같이 되어 갔다. 그들은 우리들을 보고 박장 대소 할 뿐이지, 도와 줄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리가 없음을 알고 우리는 차라리 마음이나 느슨하게 가져 안달 때문에 나오는 땀이나 줄이자는 생각으로 손을 놓아 버렸다. 구암도에서 하와이로 가는 항로는 바로 열대 위에 걸쳐 있었다.
게다가 우리들이 떠나던 때는 겨울 날씨가 완전히 풀리지 않던 사월 초순이었으므로 우리들은 속에 내복까지 끼어 있었던 겨울 차림이었다. 군인 한 사람이 다가와 무어라고 지껄이며 손으로 우리들의 몸을 툭툭 쳤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천근만근같이 무겁게 지워져 있던 것이 벗겨졌다.
열대 지방을 나는 한증탕 속 같은 비행기 안에서 그것도 여덟 시간을 그렇게 견디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며 그 때와는 달리 오한이 들 지경이다.
이윽고 하와이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들 때문에 같이 탔던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여행이었겠으나 우리들에게는 지옥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국가 대표 선수 답게 비행기에서 당당하게 내렸다.
염라 대왕은 이제 세관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 여기에서도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졌다. 우리들이 주역이 되었고 세관원이 조역이 되었다. 그도 별 수 없이 우리들의 손짓 발짓에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들의 여권을 뺏은 뒤에 가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한국을 떠날 때에 스메들리 여사가 써 준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이 사람들이 한국의 대표 선수로서 보스톤 국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니 도와 달라는 내용이다. 그에게 그것을 내밀었으나 그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든 가방들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것을 재생한 것들이었다. 그 속에는 속옷과 유니폼과 스파이크 같은 것과 쌀, 고추장, 된장, 간장, 고추가루 같은 것을 넣은 깡통들이 들어 있었다. 세관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그것들을 나꾸어 챘다. 잡아두겠다는 수작인 것 같았다. 우리들은 얼굴을 붉히며 가방을 잡고 늘어졌다. 우리들로서는 필사의 줄다리기였으나 뺏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연신 시계를 쳐다보며 마이크를 잡고 꼭 같은 말로 몇차례나 되풀이하여 방송했다. 어떤 노인이 달려왔는데 그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찾는다는 방송을 듣고 달려온 한국 교포 민 목사였다. 우리들은 민 목사의 힘을 빌어 빼앗겼던 가방들까지 찾아 들고 공항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와이 섬이 점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여기에서도 여비가 들지 않는 군용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민 목사의 은혜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밥과 하룻밤의 잠자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민국장을 설득하여 여권까지 새로 만들어 주었다. 우리들이 가지고 간 군정청의 여권은 맥아더 사령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쓰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일요일을 철저히 지키는 미국 사람들이었으나 이민국장은 교회에서 예배를 보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와 다른 직원들까지 호출하여 여권을 만들어 주고 수속을 밟아 주었다.
산 뒤에 또 산이라더니 비행기는 집도 보이지 않는 허허 벌판의 비행장에 우리들을 내려 놓았다. 막상 비행장 문을 나섰으나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는 우리들은 어두워 가는 하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가 샌프란시스코 군용 비행장이었다.
그런데 산 사람은 죽으라는 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군용 지프가 지나가다 말고 뒷걸음을 쳐서 우리들 앞에 섰다. 하와이 세관원에게 했듯이 스메들리 여사의 소개장을 군인에게 보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타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눈치로써 그가 한국에 있었던 적이 있는 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리들을 그의 막사로 데리고 가서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그가 아는 임 목사라는 한국 교포에게 연락을 했다. 임 목사의 배려로 우리들은 호텔에서 쉬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호텔에서 묵는 첫 경험이었다. 대회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보스톤에 갈 수 있는 비행기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표도 일주일 뒤의 것이었다.
임 목사는 비행기 회사에 마다 우리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가까스로 손님들의 양해를 얻어 두장을 구했다. 한 사람은 뒤에 처지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측간에 갈 때에도 서로 손을 잡고 가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그런 제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카고 비행장에서 비행기가 쉬는 동안에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한 구석에서 요절복통할 큰 일을 하고 있었다. 구두 밑바닥에 댄 타이어 고무가 열대 지방을 지나 오는 동안 녹아서 복중의 개 혓바닥처럼 앞으로 비어져 나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것을 떼어내는 작업을 시카고 비행장에서 했다. 찰떡처럼 딱 붙어있는 것을 떼자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칼이나 다른 기구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 사람은 구두를 움켜쥐고 또 한 사람은 비어져 나온 고무를 잡고 서로 당길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붙었던 고무가 떨어지는 서슬에 뒤로 벌렁 나자빠지기도 했다. 엉덩이를 털며 먼 이역의 하늘 아래서 껄껄거리고 웃었으나 곧 눈에 눈물이 괴어 올랐다.
뉴욕을 거쳐 보스톤 비행장에 도착했다. 김포 비행장을 떠나서 이곳에 오기까지의 나들이는 능히 희극 영화 한편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이었으나 트랩을 내려서는 우리들은 개선 장군보다 더 기운이 났다. 그 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었다.
신문사 기자들인 것 같았다. 우리들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으나 특히 손 기정 씨가 취재의 촛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자 사진만을 찍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는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는 백 남룡 씨를 찾았으나 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무턱대로 그를 기다릴 수도 없어 비행장 바깥으로 나왔다. 거리에서 서성대고 있자니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얼굴 하나가 비어져 나오더니 우리 보고 손 기정 씨 일행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가 바로 백 남룡 씨였다.
우리들은 그에게 보스톤에 있는 동안에 자취를 하겠으니 방을 구해 달라고 했으나 그는 오늘 밤은 지내고 보자며 호텔로 우리들을 데리고 갔다. 잇단 방들이 없어 우리들은 저마다 다른 층에 방을 잡았다. 잠이 오지 않아 나는 침상에서 몸을 뒤척였다. 손 기정 씨나 남 승룡 씨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른 아침에 나와 남 승룡 씨는 가까스로 손 기정 씨 방을 찾아 거기에서 호텔 밖으로 나와 연습을 했다. 승강기를 탈 줄을 몰라 무턱대고 걸어 내려왔다. 현지에서 맞는 첫 아침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이겨서 한국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내 사명일 것 같았다. 물론 내 이름이 드러나 나쁠 것도 없었다. 나라 없는 설움도 크지만 나라가 있어도 알려져 있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진배 없다. 연습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 사람들을 뒤따라 승강기를 타기는 탔으나 그것을 조작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남들이 내리면 눈치를 살피면서 우리들도 따라 내려 복도를 기웃거렸으나 방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어려움을 맞을 때마다 말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쉽게 해결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일들이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차례나 말썽이 되었는지 모른다. 승강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양식 변기를 사용하는 법을 민 목사 집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변기 위에 올라가서 뒤를 보았다.
그런데 불편한 것은 고사하고 뒤가 당겨도 대체 일을 볼 수가 업었다. 민 목사에게 도대체 변기가 왜 그렇게 높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껄껄거리고 웃으며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생활 방법이 더 낫고 어떤 기구를 쓰는 나라가 더 발달된 나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게는 서양의 생활 방법과 기구들이 불편스럽기만 했다.
보스톤은 미국에서 유서가 깊은 도시였다. 보스톤 체육회 사무소에 등록하러 갈 때에는 마음을 놓고 사방을 둘러 볼 여유도 생겼다. 우리들은 낯선 거리나 집들이나 사람들을 구경할 마음의 여유는 있었으나 불행히도 제 꼬락서니를 살펴 볼 겨를은 없었던 것 같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더니 정말 이 말은 이때의 우리들을 두고 쓸 말이었다.
우리들은 체육회 사무실에서 등록을 한 뒤에 어제 비행장에서 본 얼굴도 끼여 있는 기자들과 백 남룡 씨를 통역으로 내세워 이른 바 기자 회견이라는 것을 했다. 그들은 우리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껌을 짝짝 씹어대며 거침없이 물어댔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가리키며 치는 시늉을 하라는 것이었다. 포즈를 잡으라는 모양이었으나 우리들은 배알이 꼴려 참을 수가 없었다. 개수작도 분수가 있지, 완전히 야만인을 다루는 소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손 기정 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고, 나도 대학을 다닌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저까짓 피아노 쯤은 흔하다고 했다. 너희들 중에 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쳐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입술을 씰룩이며 꼴사납게 어깨만을 으쓱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꼬락서니가 유죄인 것 같았다.
거지들도 우리들 차림새보다 나았다. 대마 양복이나 광목 와이샤쓰는 거의 걸레나 다름없이 되어 있었다. 와이샤쓰 깃에는 땀이 밴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우리들은 속옷 말고는 떠날 때에 입은 그대로였다. 게다가 늘 볕을 받고 연습을 했던 우리들의 얼굴은 검붉게 타고 수염은 자랄대로 자라 있었다. 백 남룡 씨의 도움으로 우리들은 가게에서 양복과 와이샤쓰를 한벌씩 사서 걸쳤다.
백 남룡 씨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사람들의 눈치나 먹는 방법이나 풍습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은 것이 한결 다행스러웠다. 대회가 열리기까지 남은 열흘 동안에 우리들은 마음 놓고 연습도 하고 작전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숨을 돌리게 되자 재정 보증서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백 남룡 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잃어버렸던 나라에서 국제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므로 처음에는 두 사람이 재정 보증에 동의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곧 하찮은 일에 묵은 감정의 둑이 터졌다고 한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일제의 사슬에 묶여 있을 때에도 나라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그들대로 파벌 싸움을 하였다. 미국에 온 사람들은 그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미국에는 이 승만 씨 중심의 '동지회'가 있었고, 안 창호 씨 중심의 '국민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백 남룡 씨와 김 태술 씨는 서로 조직이 달랐다. 이와 같은 하찮은 감정의 실마리가 나라의 큰 일을 그르칠 뻔 했다고 생각되자 분노하기에 앞서 절망 같은 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대회가 있기 전날 밤에는 보스톤에 사는 두 홀아비와 유학온 한 여학생, 그리고 임 영신 씨와 다른 두 사람의 교포들이 백 남룡 씨의 집에 모였다. 여기에 재정 보증을 서기로 했던 또 한 사람인 김 태술 씨도 참석했으나 감정을 죽이고 시비는 벌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지 몰랐다.
손 기정 씨도 뛰려고 했으나 나와 남 승룡 씨는 그가 코치의 일을 해 주기를 바랐다. 모인 사람들로 응원단이 조직되어 저마다 코스 중간 중간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보통 마라톤 코스는 한 지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왕복코스였으나 보스톤 대회에서는 보스톤 시청에서 42.195 킬로미터가 떨어진 시골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덟 나라에서 152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유럽 선수권을 가진 핀란드의 훼테넨, 보스톤 대회에서 1945년에 우승한 카나다의 코틴, 1946년에 우승한 그리스의 가이자르가 있었다. 선수들은 키가 컸으므로 나와 남 선수는 뒤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뒤에 처졌으나 곧 나는 핀란드의 훼테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앞자리에 서게 되었다. 25킬로미터 지점에서 구경꾼들을 밀칙 나온 손 기정 씨의 "됐다, 그렇게만 뛰면 우승한다" 는 한 마디에 나는 왈칵 눈물이 나왔다. 수십만리 떨어진 먼 이역에서 존경하는 스승의 격려는 그 무엇보다도 내게 큰 힘을 주었다.
뛰는 동안에 이제까지의 연습 과정이 눈 앞을 스쳐갔다. 1941년 가을에 교내 마라톤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우승하자 육상부에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할 심산으로 마다 했다. 그러자 육상부 주장이 나를 끌어다가 몽둥이 찜질을 했다. 나는 매에 못 이겨 연습을 시작했다.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 기정 씨가 우승을 했을 때에 나라의 방방곡곡에는 온통 마라톤 바람이 불었다. 나도 손 기정 씨 같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매에 못 이겨 들어간 육상부였지만 뛰는 연습만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일본 사람 회사에서 낮에는 급사 노릇을 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가 끝나면 가방과 옷은 전차를 타고 가는 친구에게 맡기고 어두운 밤거리를 금호동에서 동대문과 종로와 서대문을 거쳐 영천까지의 20킬로미터의 거리를 한 시간 반쯤에 뛰었다. 가게나 집에서 희미하게 흘러 나오는 불빛만을 의지하고 길바닥이 터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에서 상대도 없이 오직 나 자신과의 싸움을 이태나 했던 것이다.
그 외로움은 누구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 전차 정거장에 도착하여 나보다 느린 전차를 기다렸다가 거기에서는 집앞까지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뛰었다. 몸을 씻고 밥을 먹으면 시계는 열두점을 치기 마련이었다. 새벽 다섯시에는 어김없이 눈을 뜨고 홍제동 뒷산에 올라가 또 혼자 연습을 했다. 뛰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개 한 마리가 불시에 뛰어나와 나를 물려고 덤벼 들었다.
여기까지 와 서양 개새끼한테 당한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에서 우리들이 낮에 연습을 할 때에 짖궂고 못 된 어떤 미군은 스리쿼타를 타고 가며 우리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 끌고 가기도 했다. 악의 없는 장난이었으나 너무 심한 것 같았다. 나는 물리기만 하면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된다고 생각하며 인정사정 없이 개새끼의 대가리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나동그라진 것은 개가 아니라 나였다. 헛발길질을 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더니 다리만 약간 다치고 큰 탈은 없었다.
드디어 임 영신 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나는 물을 받아 먹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웬걸. 바가지가 비어있었다. 그는 내가 맨 앞에 달린다는 얘기를 듣고 하도 기뻐서 뭇사람들 앞인 것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바가지에 떠온 물을 다 엎지른 것이었다.
나는 1947년 4월 19일에 그때로서는 세계 신기록인 2시간 25분 39초로 테이프를 끊었다. 마라톤에 뜻을 두고 두번째의 손 기정을 꿈꾸기 열한해 만에 드디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갈 때와는 달리 느긋한 마음으로 곳곳에서 베푸는 환대를 받았다. 인상에 남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백 남룡 씨 집에 이웃 사람들이 나의 우승을 축하하러 몰려왔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그들 내외는 우리들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그들이 이 마을에 산 지 서른해가 되었으나 이웃 사람들은 그들의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애들이 바깥에 나가면 모여 놀던 마을 애들도 흩어졌다고 한다. 이제 우리들 덕택에 사람 대접을 받게 되어서 그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임 영신 씨의 청을 좇아 우리들은 유엔에 들러 우리들의 '명성' 으로 그의 외교 활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은 미국 서부 지방에서 한국에서 이민간 농부들을 만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삼사십년 동안 그곳에서 남의 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주인들은 그들이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깔보았다. 그런데 내가 우승한 기사가 신문에 나가고, 내 얼굴이 텔리비젼과 뉴스에 나가자 그들의 주인들도 한국을 인정하기에 이르러 내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부러 그들에게 휴가를 주어 나를 만나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내 손바닥에는 그 농부들의 손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다.[출처] 혓바닥이 나온 구두를 신고 - 육상선수 서윤복|작성자 홍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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