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나마 쪽지, 길게나마 편지. 글로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과정을, 그리하여 대상에 대한 마음을 곱씹는 과정을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편지가 무용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그는 편지로 인하여 마음이 동한 경험이 드물었을 겁니다. 만일 편지가 무용한 것이라면, 우편의 시대는 열리지도 못했을 겁니다.
가끔 편지를 쓸 때면 터무니없는 꿈을 꿉니다. 이 편지로 나의 진심이 전해지길, 적어도 내가 당신에게 들이는 정성을 느껴주길 하는 것이죠. 꿈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응원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중에 전하기 부끄러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애달파하지 말고 펜을 들라는 말을 어렴풋이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이상’은 일제강점기의 건축가이자, 문학가입니다. <날개>라는 소설과 <오감도>라는 시와 ‘제비 다방’의 멤버로 유명합니다.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작품이나 행적보다 제 마음에 아른거리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동생 옥희 보아라’로 알려지기도 한, 동생 옥희에게 쓴 편지입니다. 어떠한 겉치레도 없이 ‘이상’은 옥희의 오빠 ‘김해경’일 뿐입니다.
이 편지는, 8월 초하룻날 밤차로 애인과 도주한 동생에 대한 타박, 그 이상의 염려로 빼곡합니다. ‘이왕 나갔다. 나갔으니 집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너희들이 부끄럽지 않은 성공을 향하여 전심을 써라. 3년 아니라 10년이라도 좋다. 패잔한 꼴이거든 그 벌판에서 개밥이 되더라도 다시 고토(故土)를 밟을 생각을 마라.’며 엄하게 나무라는 듯하지요.
동생의 안위에 대한 걱정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원래가 포류지질(蒲柳之質)로 대륙의 혹독한 기후에 족히 견뎌낼는지 근심스럽구나. 특히 몸조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가난한 계급은 이 몸뚱이 하나가 유일 최후의 자산이니라.’ 자고로 손윗사람에게 동생은 늘 연약하게 느껴지는 법이지요.
하지만, 푸념 섞인 글들의 끝에는 동생에 대한 절대적인 응원과 사랑만이 남습니다.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넓다. 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거니와 또 배울 것도 많으리라.’ 그리고 ‘축복한다. 내가 화가를 꿈꾸던 시절 하루 5전 받고 모델 노릇 하여준 옥희, 방탕불효한 이 큰오빠의 단 하나 이해자인 옥희, 이제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그 애인과 함께 만리이역사람이 된 옥히, 네 장래를 축복한다.’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세상과 결국은 사랑으로 헤아리는 마음입니다. 요즘 들어 이 편지가 감돌았습니다. 종종 사람들과 가족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의 호칭을 떠올릴 때면 찡해집니다. 막연히 세상의 모든 풍파를 내가 막아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자신도 따라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호칭이 ‘어머니’나 ‘아버지’, ‘누이’나 ‘형님’, ‘부인’이나 ‘남편’ 혹은 ‘내 새끼’가 됩니다.
저에게 그 호칭은 ‘동생’입니다. 다른 호칭들이 저의 결계가 되어준다면, ‘동생’이란 호칭은 저의 틈이 되고야 맙니다.
틈인 이유는, 태어난 순간부터 제 무자비한 채근의 대상으로만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부단히 그 틈을 메우고자 하기에 복잡다단한 감정이 드는 것입니다.
대체로 그런 감정의 표현은 뭐하냐는 뻔한 서두와 밥 먹었냐는 뻔한 안부, 그리고 밥 먹으러 오라는 뻔한 제안으로만 드러냈습니다.
그간 써온 많은 자필 편지의 수신인이 ‘동생’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 틈을 더욱 크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는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는 말과 작은 누나의 ‘단 하나 이해자’ 이길 자처했던 호수, ‘네 장래를 축복한다.’”라는 말을 동봉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연말 누구에게 편지를 쓰시겠어요?
추신: 네가 걷는 모든 길이 꽃밭이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 그렇지만 네가 걸어온 모든 길에는 자취가 남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지표가 된다는 것, 그 하나는 분명해. 누나는 영영 네 이해 자일 수밖에 없어. 그러니 너는 너 이기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