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어떤 주제로 첫 글을 열어야 하나 고민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모두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제가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골똘한 상념을 헤집었습니다. 그러고는 그럴싸한 단어들을 수집하려다 말았습니다. 새로운 것이나 낯선 것 찾아 나서는 ‘발굴’의 의지보다는, 익숙한 것이나 낯익은 것을 들여다보는 ‘이입’의 노력이 ‘진솔한 글’에 가까운 듯했습니다. 누구나 표면은 번지르르하지만, 이면은 꾀죄죄합니다. 물론 그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꾀죄죄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꾀죄죄한 나를 인정하고, 나아가서 대우하는 것은 고단한 작업입니다. 며칠 전, 승은은 요즘의 우리는 이마에 “‘취급 주의’ 스티커를 붙여둔 유리병”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주변과 비교하며 스스로 갉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나 자체로 만족하기란 힘에 부치는 세상입니다. 다양한 매체에서는 건강한 나로 거듭나는 방법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스스로 인정하며 칭찬하는 것’, ‘감사 일기를 쓰는 것’ 등을 제안합니다. 밖에서부터 나를 채우려 하지 않고, 안에서부터 나를 채워가는 것이 ‘취급 주의’ 스티커를 떼어내는 단일한 방법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몇
간단하게나마 쪽지, 길게나마 편지. 글로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과정을, 그리하여 대상에 대한 마음을 곱씹는 과정을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편지가 무용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그는 편지로 인하여 마음이 동한 경험이 드물었을 겁니다. 만일 편지가 무용한 것이라면, 우편의 시대는 열리지도 못했을 겁니다. 가끔 편지를 쓸 때면 터무니없는 꿈을 꿉니다. 이 편지로 나의 진심이 전해지길, 적어도 내가 당신에게 들이는 정성을 느껴주길 하는 것이죠. 꿈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응원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중에 전하기 부끄러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애달파하지 말고 펜을 들라는 말을 어렴풋이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이상’은 일제강점기의 건축가이자, 문학가입니다. <날개>라는 소설과 <오감도>라는 시와 ‘제비 다방’의 멤버로 유명합니다.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작품이나 행적보다 제 마음에 아른거리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동생 옥희 보아라’로 알려지기도 한, 동생 옥희에게 쓴 편지입니
11월에 접어드니 늙은 초록, 맑은 노랑과 짙은 주황이 곳곳을 채워갑니다. 곳곳의 틈새에서는 바스락, 낙엽은 흙이 되고 있습니다. 가을, 단풍이 문 열고 들어오니 목엽은 나갈 채비를 하고야 맙니다. 가을은 이면을 고민하게 합니다. 단풍이 드는 앞면에는 신생이, 낙엽이 지는 뒷면에는 소멸이 있는 가을입니다. 신생이 곧 소멸이라는 것이 서글픕니다. 가을의 꽃이라는 코스모스마저 단순하지 않습니다. 휘청이며 올망졸망 길가에 버티고 선 그 자그마한 것은, 우주의 조화라는 자신보다 거대한 이름을 온몸으로 지고, 존재 가치를 증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꼭 우리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신생의 순간 부여받은 이름은 거대하기만 합니다. 원대한 이름인 탓에, 결코 나에 대한 정의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내 이름이라며 증명하고 쟁취해야만 합니다. 단풍과 낙엽, 코스모스(들꽃)와 코스모스(우주). 이렇듯, 가을은 이면을 고민하게 합니다. 가을은 생과 사의 교점인지라, 아름답다고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아름다워지는 것인가 봅니다. 아름다움은 금방 사그라들고야 맙니다. 절정의 아름다움은 찰나. 단풍도, 코스모스도, 노을도 모두 찰나. 그렇다
9월 중순을 지나는데도, 더위는 서늘함에 자리를 내어주지를 않았다. 예년에는 이 정도 욕심을 부리고는 미련도 없이 물러서는 법이었는데, 올해에는 무엇이 아쉬운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예년에는 분명 가을이라 부르던 시기였는데, 올해에는 9월 중순을 여름이라고 해야 할지 가을이라고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여름인가, 가을인가 긴가민가했던 생각을 다잡는 데에, 정확히는 여실히 뜨거움에도 가을이라고 해야 한다고 단정하는 데에 이번 보름이 큰 몫을 했다. 누군가는 가을의 정취를 새벽이슬에서 찾고, 누군가는 가을의 정취를 대낮에 물든 산에서 찾고, 누군가는 가을의 정취를 바다의 짠내나 석양에서 찾는다. 그리고 나는, 가을의 하늘에서 찾는다. 가을의 정체성은 하늘과 맞닿아있지 않은가. ‘하늘만 보면 가을인데…’라는 표현에 거리낌이 없을 만큼, 하늘로써 가을을 가늠하곤 한다. 밤낮없이 말갛고 높푸른 가을의 하늘. 한가위를 보낸 무렵에도 여전히 더웠다고는 해도, 밤공기와 바람은 꽤나 선선하여 가을의 초입인 듯했다. 눅진한 공기로 인해 장마철의 한때가 되살아나기도 했지만, 선선한 바람은 분명 가을로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을과 통하는 그윽한 밤이었다. 깊은 밤하늘은
어제의 델몬트 유리병에는 홍덕리 할머니가 우려낸 보리차가 담겨 있었다. 오늘의 델몬트 유리병에는 분위기 좋은 동네 카페의 생수가 담겨 있다. 오렌지 주스를 사면 그에 딸려 오던 델몬트 유리병이었지만, 지금은 제 가치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어제의 것은 촌스럽고, 내일의 것은 세련되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가 찾아낸 것은 ‘뉴트로’이다. 복고풍을 새롭게 만들어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델몬트 유리병의 가치는, 유리병이라는 물질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향수, 즉 레트로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어떤 것에는 희한한 힘이 있다.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당연한 이치에 ‘영원성’이라는 효용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종종 더 나아가서는, 그로부터 어떠한 ‘고유성’을 발견하기까지 한다. ‘캐딜락 엘도라도’나 ‘폭스바겐 카르만 기아’에서, 수동 타자기나 축음기에서 향수를 느낀다. 그 향수는 ‘레트로’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이상한 것은, 유행을 만드는 이들과 유행을 타는 이들은 민트색 ‘포드 썬더버드’의 시대에 살지도 못했고, 감히 그 시대를 구경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데에 비해
혜지와 만나기로 했다. 혜지는 키가 작은 나와 달리 키가 크다. 아니, 외형을 생각하면 크다는 말보다는 길쭉하다는 말에 더 가깝고, 내면을 생각하면 크다는 말보다는 넓다는 말에 더 가깝다. 더 잘 어울리는 친구이다. 웃음이 화사하고, 소리는 청아하고. 18년을 함께 하면서, 특히나 어른의 문턱을 넘고는 매번 만날 때마다 배울 점을 탐사하게 하는 친구이다. 추억이 유리 구슬이라도 되는 양 매만지고 닦아내기를 반복했다. 강아지가 무서워 친구의 집 소파 위에 둘이 같이 서 있었던 일, 꼭 읽어야 하는 책 소개하기 조별 과제를 위해 주말에 친구들과 모였던 일, 어리숙해서 후회되었던 일, 그럼에도 강단 있게 결정했던 일. 유리 구슬에는 어떠한 힘이 있어서 무더운 날씨조차도 만족스럽기만 했다. 오히려 담쟁이가 틈을 빼곡히 메워가는 초록의 여름을 빛내는 듯했고, 도리어 지상의 열기를 붉은 빛으로 뽐내고야 마는 능소화가 더욱 고개를 빳빳하게 들도록 하는 듯했다. 초록의 담쟁이와 주황의 능소화를 보라고 뜨겁나보다, 여길 정도였다. 추억을 야금야금 먹는 우리와 같이 햇살을 야금야금 먹는 하늘이었다. 두 볼은 채 삼키지 못한 햇살로 가득했다. 말갛던 볼은 분홍으로 물들었다. 저
5월 말, 교장 선생님과의 차담회가 있었다. 그 시간, 교장 선생님의 ‘마음의 근육’과 관련된 문장들이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누구나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고민은 갯벌과도 비슷해서, 방심하면 어느새 무릎까지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전시된 나의 모습과는 다르게, 마음과 정신은 개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련해서 얻어진다면 내게 꼭 필요한 것이 ‘마음의 근육’이었다. 보름 넘게 괴로움을 삼키고 있었다. 분노와 우울을 넘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괴로움은 결국 나를 향한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그 시기에 맞물리게 차담회를 갖게 되었고, 그때 들은 ‘마음의 근육’이라는 말이 판도를 뒤집었다. 근육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둥실 떠올랐다. 더 이상 괴롭고 싶지 않은, 정확히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무엇이든 하게끔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끊어내는 것이나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그 힘을 걱정 따위에 쏟아서 괴로웠지만, 거두절미하고 긍정적인 것에도 충분
아이유는 사계절을 ‘봄 한 송이, 여름 한 컵, 가을 한 장, 겨울 한 숨.’으로 표현했다. 박연준 산문집 ‘모월모일’의 <밤이 하도 깊어>에서는 사계절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여름밤은 익어가기 좋고, 겨울밤은 깊어지기 좋다. 봄밤은 취하기 좋고 가을밤은 오롯해지기 좋다. 당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엇이’ 익어가고 깊어지는지, 취하고 오롯해지는지 묻는다면? ‘무엇이든’이라 대답하겠다. 사랑, 미움, 한숨, 그리움, 희망, 불행. 진부하게 거론되지만 원래 그 의미가 무거운 말들은 밤에 한층 더 무거워진다.’ 마음이 계절을 타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계절마다 짙어지는 색도 향도 다른데, 어떻게 마음의 결이 매한가지일 수 있을까. 계절의 흐름에 따라 마음도 유영하는 것이지. 나의 마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봄에는 사랑을 헤매고, 여름에는 사랑에 잠기고, 가을에는 사랑을 그리고, 겨울에는 사랑에 묻힌다. 그리하여 이 봄, 사랑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헤매기를 반복했다. 사랑이란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사의 중심이 되는 것이나, 사랑이란 것으로 결국 세상을 품어내야 한다는 것이나, 사랑이란 것을 이상으로 되뇌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은 완벽한 사랑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흐른 이야기를 듣고 동그랗다보다 둥그스름하다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47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그중 2개가 동그라미에 가깝다는 내용과 함께 “회사 생활이란 것도 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라는 결론을 냅니다. 바야흐로 벚꽃이 풍성히 맺힌 4월, 둥그스름한 나날들을 보내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말간 꽃잎이 흩날리고 그 자리를 꿰차는 푸른 이파리의 향연. 꽃송이가 맺히고 터지고 떨어지는 보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은 찰나임에도 큰 울림으로 남습니다. 하루 사이에 야윈 가지에는 새살이 돋아나고, 하루 사이에 새살은 뽀얗게 물들고, 하루 사이에 초록이 무성히 자리하는 이 봄날. 생명의 신이는 소리도 없이 눈망울을 가득 채웁니다. 따스한 볕에 묻히는 조곤조곤한 말소리들과 유달리 찬란한 달의 모양새까지 아름다움을 찾아내지 않기란 더 어려운 봄날입니다. 가득 찬 개화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고, 흩날리는 낙화의 공간을 함께 채우고 싶은, 작은
우리 할머니, 정숙 씨는 시래기를 ‘시라구’라고 한다. 우리 할머니, 항희 씨는 달래 간장을 만들어 봄을 깨운다. 어느 한낮에라도 그들을 떠올릴 때면, 머리 위로 남창(南窓)이 큼직하게 생긴다. 고소한 냄새, 향긋한 냄새는 창을 넘어 사뿐히 코끝에 내려앉는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온다. 할머니들의 주방 한구석에는 꼭 깊고 얕은, 길고 짧은 빗금이 들어찬 비뚜름한 나무 도마가 있다. 빨간 대야는 또 화수분이라, 흙 묻은 감자며 고구마며, 헤진 망 속 양파며 대파며 그득하다. 할머니들의 주방은 시장에서 왔다. 어렸을 때면, 오일장이 열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달큰하고 바삭한 호떡을 사 먹는 재미, 귀를 막고 ‘뻥이요’ 소리를 기다리는 재미, 어른들로부터 받는 예쁨에 마음이 보드라워지는 재미, (분명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갖게 되면 좋을 것 같은) 이상한 마음을 불어넣는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 두터워지는 할머니의 장바구니를 지켜보는 재미, 코를 막고서는 비린내를 피하려 했음에도 온몸에 비릿한 바다 내음을 묻히고 돌아오는 재미. 나의 오감은 시장의 정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오감을 만들기만 해도 충분했을 시장은 내게 통각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12월을 보낸다는 것은 내게 단순히 ‘시간이나 세월을 지나가게 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 ‘보내다’ Ⅲ-2)이 아니다. 한 해의 마지막 무렵에서 정말이지 한 해를 ‘놓아주어 떠나게 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 보내다 Ⅲ-1)이다. 연말의 사전적 정의는 ‘한 해의 마지막 무렵’이지만, 여덟 글자로는 부족하다. 연말의 각종 행사들은 분명 싱글생글에 가깝지만, 행사를 제외하고 남은 순간들은 싱숭생숭에 가깝다. 올 한 해도 고생했다면 북돋우는 말들 사이에, 올 한 해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덕지덕지 붙어버린다. 그렇기에 나는 연말을 ‘과거를 곱씹어 완전히 소화시키(어야 하)는 시기, 그러나 과거를 좀먹으며 체해서는 안 되는 시기’라고 뜻매김하고 싶다. 연말이라면, 지난날을 충분히 떠올려야 한다. 순간에 대한 더 이상의 부정은 물려두고 더할 것 없는 수긍을 기하여야 한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사무치지도 파묻히지도 말아야 한다. 이는 나의 속 다짐이다. 시간은 애석하게도 반대로 흐른다. 기쁨에 가까운 때에는 시간에 머물고만 싶지만, 시간은 재빨리 움직이다. 슬픔에 가까운 때에는 시간을 벗어나고 싶지만, 시간은 더없이 머뭇거린다. 나는 연말이면 과거를 들이쑤셔가며 살펴보
2023년 11월 17일 금요일, 첫눈을 보았다. 몇몇은 첫눈은 그것보다 조금 전에 내렸다고도 하고, 또 몇몇은 첫눈은 2023년 1월에 내린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첫눈이라고 느낀 그 감상이 더욱 소중하기에 11월 17일의 눈을 첫눈이라고 하겠다. 3교시 3반 수업에 들어가서, ‘얘들아, 방금 눈이 오더라’라는 말을 건넸다. 커튼을 올려두고, 면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함박눈이 쏟아졌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방울이었다. 제각기 다른 결정의, 다른 크기의 눈방울을 보고 있자니 괜히 ‘사랑’이 떠올랐다. 단어가 아닌, 감정이 몽글몽글 끓어올랐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인생은 꽃, 사랑은 그 꽃의 꿀’이라 했고, 시인 장수양은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커다란 혼자’라 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사랑은 빠짐없는 문예의 소재이자 목적이었다. 그만큼 사랑은 모두의 교집합이자 이상과 파멸을 그리게 하는, 추상적인 관념이자 철학적인 고뇌인 것이다. 첫눈을 보며 사랑을 떠올린 데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랑에 모양이 있다면, 저 눈처럼 삐뚤빼뚤한 동그라미일 것이라는 생각이 차올랐다. 어떻게 그려도 삐뚤빼뚤한 동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