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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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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 정숙 씨는 시래기를 ‘시라구’라고 한다.

 

우리 할머니, 항희 씨는 달래 간장을 만들어 봄을 깨운다.

 

어느 한낮에라도 그들을 떠올릴 때면, 머리 위로 남창(南窓)이 큼직하게 생긴다.

 

고소한 냄새, 향긋한 냄새는 창을 넘어 사뿐히 코끝에 내려앉는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온다.

 

할머니들의 주방 한구석에는 꼭 깊고 얕은, 길고 짧은 빗금이 들어찬 비뚜름한 나무 도마가 있다.

 

빨간 대야는 또 화수분이라, 흙 묻은 감자며 고구마며, 헤진 망 속 양파며 대파며 그득하다.

 

할머니들의 주방은 시장에서 왔다.

 

어렸을 때면, 오일장이 열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달큰하고 바삭한 호떡을 사 먹는 재미, 귀를 막고 ‘뻥이요’ 소리를 기다리는 재미, 어른들로부터 받는 예쁨에 마음이 보드라워지는 재미, (분명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갖게 되면 좋을 것 같은) 이상한 마음을 불어넣는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 두터워지는 할머니의 장바구니를 지켜보는 재미, 코를 막고서는 비린내를 피하려 했음에도 온몸에 비릿한 바다 내음을 묻히고 돌아오는 재미.

 

나의 오감은 시장의 정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오감을 만들기만 해도 충분했을 시장은 내게 통각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마음의 통각.

 

장항중앙초등학교에 다녔을 때였다.

 

정문 앞에 있는 신시장(또는 중앙시장이라고 불렀다, 각설하고)은 우리의 지름길이었다.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고, 우리만 아는 놀이터이기도 했고, 지도 그리기 숙제를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기도 했고, 가끔은 빨간 잡채를 먹는 곳이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겨울 방학식을 하던 날,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하얗게 반짝이는 눈이 쌓이고 쌓여서 나의 시장을 짓이겼다. 학교를 마치고, 중앙치과와 라벨리피자 사이에 서서 헛헛함을 느꼈다.

 

뾰족하고 따가운 눈, 그런 겨울이었다.

 

서천을 떠나 지낼 때도, 고향에 돌아올 때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날짜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 맞춰 장항전통시장에 가야 했다.

 

튀밥을 두세 봉지 넉넉히 사 집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여유를 즐겨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향에 돌아오면, 부모님의 새벽도 빨라졌다.

 

제철 음식을 사러 꼭 서천특화시장에 가셨다. 대하와 꽃게를 좋아하는 소산, 복숭아와 포도를 좋아하는 소산, 구운 김에 박대를 올려 먹는 소산이니까.

 

서천에 돌아오고 좋았던 점은 단연 고향이라는 점과 가족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느 곳에나 시장이 있다는 점이었다.

 

마트가 아니라 시장, 단순히 여러 상품을 취급하고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할머니와 친구들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고, 내 가족의 지인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고, 아무개의 가족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이 여전히 마을 사이사이에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서천중학교에서 퇴근할 때는 세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른다.

 

하나 후문으로 나와 신청사 쪽 로터리 지나기, 둘 정문으로 나와 유턴하여 타이어뱅크 지나기, 셋 정문으로 나와 직진하여 서천특화시장 지나기.

 

효율적인 동선이기에 신청사 로터리와 타이어뱅크를 선택하는 날들이 많지만, 종종 우회하는 동선인 서천특화시장을 지나는 선택을 하곤 한다.

 

시장 앞 붐비는 인파와 자동차 사이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시골 마을의 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픈 마음이 달래지기 때문이다.

 

잊힌 줄 알았던 시장과 함께 온 통각은, 뾰족하고 따가운 눈과 화마로 요 며칠 되살아난다. 몸집을 키운다.

 

할머니의 주방이 허전하다. 북창(北窓)으로 서릿발이 날린다.

 

통각은 몸에 가해진 자극에 대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활동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일까. 시장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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