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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델몬트 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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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델몬트 유리병에는 홍덕리 할머니가 우려낸 보리차가 담겨 있었다. 오늘의 델몬트 유리병에는 분위기 좋은 동네 카페의 생수가 담겨 있다. 오렌지 주스를 사면 그에 딸려 오던 델몬트 유리병이었지만, 지금은 제 가치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어제의 것은 촌스럽고, 내일의 것은 세련되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가 찾아낸 것은 ‘뉴트로’이다. 복고풍을 새롭게 만들어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델몬트 유리병의 가치는, 유리병이라는 물질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향수, 즉 레트로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어떤 것에는 희한한 힘이 있다.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당연한 이치에 ‘영원성’이라는 효용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종종 더 나아가서는, 그로부터 어떠한 ‘고유성’을 발견하기까지 한다.

 

‘캐딜락 엘도라도’나 ‘폭스바겐 카르만 기아’에서, 수동 타자기나 축음기에서 향수를 느낀다. 그 향수는 ‘레트로’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이상한 것은, 유행을 만드는 이들과 유행을 타는 이들은 민트색 ‘포드 썬더버드’의 시대에 살지도 못했고, 감히 그 시대를 구경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데에 비해 인간의 발달은 (비교하기도 민망할 만큼) 느리다고 한다. 과장을 더하면, 원시시대의 뇌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생존을 위하여 수렵하여야 하는 직립 보행의 종에게는, 생각하는 것은 큰 사치였다. 생각하는 데에 들이는 에너지를 줄여야 했고, 이를 위하여 20만 년을 분투했다. 그 결과, 우리는 디폴트값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 세기 사이에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20만 년의 기간을 짚어보면) 상당한 물질적 부유와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게 되었다. (보장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준 모든 인류에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신기하게도, 여전히 생각하는 데에 힘을 쓰지 않으려 하는 뇌를 가지고 있으며, 생각할 필요마저 덜어주는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는 빨리 흐른다. 인간은 원시시대만큼이나 그대로인데, 주변 환경은 가늠이 안 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빠름에는 보편성이 있다. 좋다고 하는 무언가를 따라가기 때문일 테다. 개성보다는 보편이 자리한 시대, 개성을 발휘하기에는 빠르게 지나가는 것과 지나치는 것들 투성이이다. 취향을 타지 않는 것들의 세계, 취향을 탈 수조차 없는 세계, 그렇기에 무난함과 세련됨으로 설명되는 것들로 채우는 세계.

 

그 세계에서 우리는 생각하기보다는 느끼는 것을 택한다. 우리와, 우리의 세계와 다른 것들을 느끼기를 택한다. 보편의 것들과 달리 개성이 깃든, 깊게는 고유성이 내재한 것들을 느끼고자 한다. 그리하여 (변할 수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만) 불변하며,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과거와 그에 속하는 것들을 찬미하며, 탐하고 있다.

 

아빠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었고, 엄마는 도선장으로 향하는 배가 끊겼다며 군산의 공중전화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아빠의 레간자에서는 박용하의 ‘처음 그날처럼(드라마 올인 ost)’이란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갔다. ‘장항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골랐다. 영화를 보다가 별안간 눈물을 닦는 엄마를 보고는 말을 아꼈다.

 

필름 카메라의 찰칵 소리와 버터크림 케이크의 묵직한 맛은 도리어 생생하게 재생되는 요즘이다. 이 글을 담아낸 시선의 한편에는 어떠한 과거가 어른거리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물건이어도 좋고, 모습이어도 좋다. 그 안에 깃든 당신의 고유성은 또 무엇인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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