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는 동학농민 봉기의 배경과 남접과 북접의 갈등 속에서 한산, 서천지역의 동학운동 봉기에 대한 지역별 동학접주들의 참여자 등과 정부 진압군과 동학농민군 일부 지역의 교전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지역별 동학농민군들과 교전과 피신한 동학 농민 잔당들의 활동과 처단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한산읍성 11월 12일 점령 전북 남접 동학 농민군이 3월 한산면 신성나루를 건너와 부여군 양화면 수원리 접주 김시형(金時亨) 등의 협조를 얻어 인근 한산면 원산, 야인, 마산면 요곡 접주 이종필(李鍾弼) 등의 동학도 인들이 주민들에게 강요와 협박을 통하여 동학에 가입 활동을 9개월의 기간을 통하여 동학 농민군의 10,000명 세력을 확보하여 한산읍성의 점령하는데 안내자 역할을 하였던 한산 지역 농민군 최득용(崔得用)이 약탈과 방화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정부 진압군이 내려오기 전에 11월 12일 한산읍성은 함락되었다. 2. 정부 진압군을 이끄는 순무선봉진(巡撫先鋒陣) 11월 20일 홍산 도착 순무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은 11월 20일 홍산현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면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한산, 서천 등지에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는 고령 신씨가 세거하면서 17세기 당대의 8문자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특히 숭문동은 조선의 대표적 3대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 임벽당 김씨,와 함께 명성 떨친 여류시인 부용당 신씨의 고향이다. 진택 신광하의 여동생 부용당 신씨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조선의 대표 3대 여류시인(女流詩人)을 말한다면 신사임당(申師任堂), 임벽당 김씨(林碧堂 金氏), 그리고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 1732∽1791)를 말한다. 임벽당 김씨와 부용당 신씨는 서천이 낳은 여류시인이다. 비인 남당리 임벽당은 15세기, 신부용당은 17세기의 여류시인이다. 대표적 3대 여류시인 중 2명이 서천 인물이다. 부용당 신씨는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서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첨추공 부친 신호(申皓 1687∽1767)의 딸로 태어났다. 부용당 신씨의 가문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를 비롯하여,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의 오빠들은 당대 문장가로 널리 명성을 날렸다. 부용당 신씨도 오빠들처럼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도로변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趙貞喆)의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조정철의 거사비가 세워진 내력과 그는 어떠한 인물이며, 조정철은 정조 암살미수 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기간 조정철을 위해 목숨과 바꾼 홍윤애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버스 정류장 옆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 거사비(忠淸道觀察使 趙貞喆 去思碑)가 서 있다. 순조 15년(1815년) 10월에 세워진 비석으로 우리 고장 서천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세웠다. 거사비를 세우게 된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마 순조 13년(1813년)에 조정철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던 해로 전국적으로 대기근으로 백성이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 호서지방에 1만 석으로 진휼한 것을 보면 구휼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관찰사 조정철(趙貞喆:1751-1831)은 본관은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서천읍 구암리에 안장된 우의정을 지내고 영조를 왕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조태채(1660-1722 :二憂堂 趙泰采)의 증손자다. 정조 1년(17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숭문동)에는 8문장가 중 시인 기록 신광연과 그의 형제들은 대문장가로 세상에 명성을 날렸고 늦게나마 관계에도 진출하였다. 그 뒤에는 고향을 떠나 전국을 유랑하며 지낸 큰형 석북 신광수와 동생 진택 신광하의 생활과는 반대로 부모님과 고향을 지키며 살았다. 기록 신광연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고령신씨가 우리 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 부용당 신 씨의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께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1328∽1396)선생의 후손인 이윤수(李允秀)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인 이곳 활동리(숭문동)에 정착 세거하면서 번창하였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첨추공 신호(申澔 1687∽1767)의 첫째 부인 성산이씨는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와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을 낳으시고, 둘째 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와 부용당 신 씨(申氏 1732∽1791)를 낳았다. 1. 가족과 고향을 지켜며 살았다. 형님 석북 신광수와 아우 신광하의 삶에 비교하면, 기록 신광연(申光淵)의 삶
충남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삼거리에서 화양면 추동리 방향으로 420m 지점에서 활동리를 지나 1㎞쯤에 대등리(옛 숭문북동)마을이 있다. 이곳 마을은 17세기 한집안에서 8 문장가를 배출한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申光洙1712~1775) 4남매와 자녀들이 청빈하게 살았던 숭문동의 선대와 가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골짜기 어귀에는 복사꽃 피어/앞마을 이웃들은 눈이 부시네./시인은 내키는 대로 길을 가노니/봄새는 제철 만나 지저귀누나./세상 길이 한 해 한 해 바뀌어 가도/천기(天機)는 하루하루 다시 살아나네/저녁 바람 흰 머리에 불어오는데/냇가에서 마음을 가누지 못하네.” 이 시는 영조 때의 저명한 시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가 고향 한산의 숭문동(崇文洞-지금 화양면 대등리)에 머물 때 썼던 시(詩)이다. 복사꽃 활짝 피어 눈부신 세상이 되면 누군들 들로 산으로 꽃구경 가고 싶지 않으랴? 당시의 숭문동은 복사꽃이 만발하였을 것 같다. 1. 숭문동 입향조 순창공 신영원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의 6대조 순창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이 전남 순창에서 한산 숭문동으로 정
서천군의 최대저수지는 봉선저수지와 흥림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도부터 현재까지 서천군 농업용수를 전담하고 있는 2곳 저수지의 조합설립과 그 추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00년 전 조성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천군의 농수원의 최대 저수지는 동부저수지(봉선저수지)와 서부 저수지(흥림 저수지)이다. 1926년부터 서천군 농업용수를 전담하여 오고 있는 2곳의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설립하여 100여 년을 걸쳐 사용하는 서천군의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의 농업용수의 확보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보고이다. 일제는 산미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1923년 4월 2일 자로 조합원 2,179명, 3,500정보(10,500만평) 면적의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서천 수리조합 설치를 허가하였다. 1. 수리조합 설치 참여 인물 조합설치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은 일본인 가타끼리, 미야지마, 兼平虎一(겸평호일:초대 조합장) 등이며, 서천지역 조선인은 서천 두왕리 김영두, 장항 솔리 추교영 등이었다. 1922년 10월 1일자로 조합설치인가 신청서에 조합창립자는 대표적 인물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장 坂木宮次(판목궁차)외 일본인 5명, 조선인
우리고장 옛 한산군의 진산인 건지산을 중심으로 조상들이 살아가면서 어떠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역사적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책무이다.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한산 건지산은 서천군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이며 한산군의 고을의 상징인 진산이다. 옛사람들은 고을의 진산은 삶을 살아가는데 위안을 얻고 수호신으로 믿으며 삶의 풍요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곳으로 여겼다. 이러한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배경으로 옛 선조들이 살아온 한산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살다가 남겨 놓은 것 들은 무엇이 있나 살펴보자. 1. 한산지역의 역사 한산지역은 고대 원삼국인 마한시대에는 54개국 중 소국으로 치리국국(致利鞠國)으로 오늘날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의 지역으로 한 부족국가 시대였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후 마산현(馬山縣), 또는 마읍(馬邑)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건지산(乾止山)은 우두산(牛頭山)으로 불렀다.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산성을 쌓고 우두산성(牛頭山城)이라 하였고, 동성왕은 이곳으로 자주 사냥을 나오기도 하였다. 동성왕 23년(501
노론의 4 대신 이였던 우리 고장 이우당 조태채 묘가 서천읍 구암리에 자리하고 있다. 조태채는 노론의 영수로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를 세제 책봉과 영조가 왕에 오를 수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1723년 사화의 전말과 복권과정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군 서천읍 구암리 마을 뒷산에 경종 때 노론 4 대신의 한 사람인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조태채 본관은 양주, 호는 이우당 조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 부(父)는 괴산군수를 역임한 趙禧錫(조희석)이며 모(母)는 심익선의 따님으로 청송심씨 사이에서 1660년에 태어났다. 숙종 12년(168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 정언 호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1713년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 연잉군 세제 책봉의 주도적 역할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1717년 우의정이 되었다. 경종 1년(1720년) 판중추부사로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숙종 말년에 소론은 세자(世子)인 균(均(뒤의 경종)을 지지했으며, 노론은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지지하였다. 경종은 세자 때에 생모인
우리 고장 옛 장항제련소와 마주한 후망산 아래 장암진성(長巖鎭城)은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입구에 설치되었던 수군진영성(水軍鎭營城)이였다. 장암진성의 수장은 종4품인 만호(萬戶)로 관장하도록 하였다. 장암진성은 백제시대 기벌포(伎伐浦), 고려 때 장암진(長巖鎭), 조선시대에는 서천포 장암진(舒川浦 長巖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 장암진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1.백제의 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백강전투와 고려 때 진포대첩의 승전지 신라와 당나라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 장암진에 상륙한곳이며, 백제(百濟)가 함락된 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서 출전한 왜의 수군과 나당연합군이 장항 앞바다 금강에서 최후의 해전으로 왜군이 패한 백강전투, 고려우왕6년(1380년) 8월 이곳 장암진이 있는 금강 하구에 왜구가 500여척의 선단으로 부두에 정박하고 노략질 하였다. 고려정부는 해도원수 나세(羅世)장군이 이끄는 100여척의 군사로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화포로 정박하고 있던 왜구선단 500척을 불태워 수장하고 승전의 대첩을 이룬 역사적인 곳이다. 장암진성은 고려시대에는 변방을 지키는 수(戍-변방경비대)자리였다. 장암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갑자사화 때 우리 고장의 인물 중에 수난을 많이 당한 한산이씨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서천군) 화양면 추동리(사성골)과 표동에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목숨을 걸고 직언하여 화를 입은 대사간(大司諫) 이윤번(李允蕃 1460∽1538)의 묘와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막내아들 양경공 이종선(李鍾善 1368∽1438)의 두 번째 부인 안동 권씨(양촌 권근 딸) 묘가 자리하고 있고,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경내에는 양경공 이종선 묘가 자리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갑자사화로 인하여 수난을 당한 한산이씨 인물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목숨 걸고 직언한 대사간 이윤번 추동리(사성골)에 연산군의 폭정에 목숨을 걸고 직언한 대사간 이윤번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윤번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으로 목은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고손자이다. 성종 11년(1480년) 진사시(進士試)-사마시(司馬試)와 성종 23년 (1492년)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연산군 때 사간원 정언(正言-사간원 정6품직)을 거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