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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산·서천 동학 농민 전쟁 진압과 동학 잔당 활동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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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는 동학농민 봉기의 배경과 남접과 북접의 갈등 속에서 한산, 서천지역의 동학운동 봉기에 대한 지역별 동학접주들의 참여자 등과 정부 진압군과 동학농민군 일부 지역의 교전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지역별 동학농민군들과 교전과 피신한 동학 농민 잔당들의 활동과 처단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한산읍성 11월 12일 점령

 

전북 남접 동학 농민군이 3월 한산면 신성나루를 건너와 부여군 양화면 수원리 접주 김시형(金時亨) 등의 협조를 얻어 인근 한산면 원산, 야인, 마산면 요곡 접주 이종필(李鍾弼) 등의 동학도 인들이 주민들에게 강요와 협박을 통하여 동학에 가입 활동을 9개월의 기간을 통하여 동학 농민군의 10,000명 세력을 확보하여 한산읍성의 점령하는데 안내자 역할을 하였던 한산 지역 농민군 최득용(崔得用)이 약탈과 방화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정부 진압군이 내려오기 전에 11월 12일 한산읍성은 함락되었다.

 

2. 정부 진압군을 이끄는 순무선봉진(巡撫先鋒陣) 11월 20일 홍산 도착

 

순무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은 11월 20일 홍산현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면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한산, 서천 등지에서 동학 농민들이 소란을 피운다고 하기에 곧바로 한산, 서천으로 출발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때는 이미 한산, 서천 두 지역은 동학 농민군에게 함락된 뒤의 일이다.

 

한산에 도착하여 한산수성장(군수) 김련(金鍊)과 호장 김하은으로 하여금 특별히 수성군과 읍의 관속 수백 명을 거느리고 힘껏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홍산 유회장 최학래(崔鶴來)는 보부상을 거느리고 직접 뒤를 따르고, 병사들은 가운데 서서 앞을 향해 계속 달려 진격하였는데, 한산읍의 경계를 벗어났는데 적들은 이미 서천읍성에 불을 지르고 들녘으로 가득 물러 나왔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대군의 진압부대가 전진하는 것을 보고 남북으로 흩어져서 몇 천 명은 서천의 길산 삼수동(三水洞) 뒤 언덕에 주둔하였고, 몇천 명은 그 고을 남쪽 연로와 포구 등지에 주둔하였다.

 

 

3. 서천·한산 지역 동학 농민군 진압 과정

 

1894년 12월 4일 선무 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에 “홍산에서 한산과 서천 두 곳으로 출발하여 20일에 한산에 도착하니 지난 12일에 동학농민군들에게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수백호의 민가가 모두 불에 타버렸으며, 각처에 있는 관아의 건물도 부서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유리(由吏:아전) 나종인(羅鍾寅)은 적도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고 불에 타기까지 하였습니다. 서천읍성도 장차 도륙당할 듯합니다. 한산읍성 수성장(군수)과 읍의 이속(吏屬:아전들) 수백 명을 인솔하였고, 홍산의 유회장(儒會長) 최학래(崔鶴來)는 부상(負商:등짐장꾼) 50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나아가 진압하였습니다. 서천에 도착하니 서천읍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수천 명이 삼수동(三水洞)의 뒤편 기슭에서 머물면서 합류했고, 또 다른 수천 명은 포구 해안가에 모였습니다. 진압군을 거느리고 북산 뒤쪽에서 급습하여 적들을 몇백 명을 죽였습니다. 나머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날이 어둡고 캄캄하여 쫓아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21일에는 한산. 서천 두 지역에서 군사를 나누어 도망간 적들을 정탐하여 붙잡아 죽였는데 그 수도 몇십 명이 됩니다. 즉시 포살하였습니다”

 

4. 한산 숭문동(활동리)에서 동학농민군 토벌

 

한산·서천읍성을 점령하였던 동학농민군 잔당은 흩어져 각 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쪽 금강 나루를 이용하여 도주하지 못하도록 포구를 지키게 하고 화양 와초리를 거쳐 한산 숭문동(활동리)로 향하여 활동리 머물고 있었던 동학농민군 잔당을 토벌하였다는 12월 4일 자 진압군 순무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내용이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에 밝히고 있다.

 

한편 당시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은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집성촌이기도 하였다.

 

활동리에서 동학농민군과 함께 활동하였을 인물이 누구였을까? 하나의 자료를 찾아냈다.

 

숭문동 8문장가 한사람인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후손 신석우(申錫雨1869〜1942) 이었다.

 

 

동학 농민혁명 자료 총서(고흥군 동학교구의 역사)에서 정창도(鄭昌道)는 1894년 2차 동학 농민봉기 때 진압군을 피신하기 위해 노숙 생활을 하면서 호남과 호서의 각 주군(州郡)을 모두 돌아다녔다.

 

고흥군 영주산(瀛洲山) 백운동(白雲洞)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깊은 산속에서 지냈는데 그때 함께 고생한 사람이 서불암의 두 스님이었다.

 

피신한 지 한 달 남짓이 지난 뒤에 집으로 돌아가 숨어 지냈다.

 

1896년 겨울에 행적이 탄로 나는 바람에 신석우(申錫雨:당시 27세)와 함께 같은 날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 1897년 가을 8월에 석방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살펴볼 때 활동리(숭문동)에도 동학 도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5. 서천읍성 피해 상황 보고

 

1896년 4월 1일 서천군수 유기남(柳冀南)이 동학농민군들이 읍성을 점령하여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질러 큰 피해가 발생한 것이 보고됐다.

 

보고서를 보면, 서천군 관청은 원래 동헌(東軒) 향청(鄕廳), 장교청(將校廳), 형리청(刑吏廳)밖에 없었는데 1894년 11월 동학군이 성에 쳐들어왔을 때 동헌이 전부 불타 없어지고 이청(吏廳)은 그 전에 무너졌으며 형리청에는 군수가 거처하고 향청에는 세무서를 설치하였으며 장교청은 장교 등이 거처하는데 이인(人吏)들은 거처할 곳이 없어 공무를 논의하고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6. 화양산 주둔 동학 농민군과 전투

 

11월 12일 한산읍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은 화양산에 진을 쳤다.

 

이때 유기남(柳冀南) 서천군수가 평소 백성들을 잘 다스려 유회군(儒會軍) 조직하여 적으로부터 방어하여 서읍성을 방어하였다.

 

 

그 전날에 홍성과 남포의 유생들이 이르러 하루 밤을 지나 서천읍성에서 머무르고 다음 날 한산으로 출진하여 기산면 두문리(斗文里) 동쪽 산골짜기에서 대적하여 진을 치고 온종일 교전하였다.

 

남포병 1인이 탄환을 맞아 죽자 이로 인해 진을 철수하여 서천읍성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화양산에 진을 쳤던 동학농민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불을 놓고 두문동 노씨 가문이 홀로 화를 크게 입었다.

 

11월 20일에는 홍주와 남포의 병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동학농민군들이 입성하여 성안의 집들과 관청건물에 불을 지르니 모두가 불에 타버렸다.

 

이러한 피해가 발생하자 유기남 서천군수가 순영에 보고 하여 경병(京兵)을 청하여 20일 홍산에서 한산으로 들어와 서천읍성을 탈환하고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니 동학군들이 죽고 사방으로 도망쳐버렸다.

 

12월 22일 자로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를 보면, “지난달 29일 행군하여 한산 두문리(斗文里)를 지나갔습니다. 이 마을은 지난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있던 곳이라 200여 호가 불에 타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근심스럽고 참담하였으며,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길을 막고 통곡하며 하소연하는데 그 떠도는 상활을 보자니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7. 단신으로 동학 접주 체포한 마을 백성 포상

 

12월 1일 진압부대는 새벽에 서천 송동(松洞:신송리)으로 진영을 돌렸는데 본군의 기동(起洞:현 지석리)에 사는 백성 심경칠(沈敬七)이 그곳 마을의 접주 나봉환(羅鳳煥)을 잡아서 진영 앞에 바쳤기 때문에 사실을 조사하여 또한 즉시 총살하였고, 심경칠이 단신으로 괴수를 잡아 왔으니 대단히 가상하여 약간의 돈으로 그 노고를 보답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8. 동학농민군의 진압 후 잔당들의 활동

 

전북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군 봉기에 대한 조정의 강력한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후 동학 잔당들은 각 지역에서 백성을 상대로 피해 입히고 있었다.

 

1904년 5월 17일 자 법부대신이 충청남도 재판소장에게 지시한 사건의 내용을 보면, 지난 음력 정월 10일 동학도인 70여 명이 서천군 마서면 동죽(東竹)에 살고 있는 조병징(趙秉澄:옥구현감 역임)의 집에 이르러 행패를 부리고 환도(環刀)로 그 부자(父子)를 구타하여 상처를 입히고 재물을 빼앗으며 집에 불을 질렀고 또 돈을 빼앗을 계획으로 조병징을 잡아가서 그 생사를 알 수 없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 수상한 배가 비인군 장구포(長久浦) 앞바다에 머무는 것이 있어 잡혀간 조병징(趙秉澄)이 그 배에 잡혀있다고 하여 당일 장포리 포성대(砲城臺) 방수포정(防守砲丁:병정)으로 공격하여 적들을 제압하여 조병징을 구출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병징은 조세의 운반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의 친아들이기도 하다.

 

동학 농민군의 잔당들은 전운사 조필영에 대한 과거의 앙심을 품고 아들에게 보복을 가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때 전북 옥구 현감을 역임하고 있었다.

 

조병징은 큰집 조정영(趙鼎永)이 후사가 없자 양자로 양부와 함께 마서면 동죽에 살고 있었다.

 

조병징은 남포 현감을 역임하면서 비인 현감이 공석으로 비인 현감을 겸직하였고, 1893년도 옥구 현감으로 발령 나면서 비인현에 친아버지 전운사 선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893년 8월에 세운 부친 선정비가 비인중학교 앞에 서 있다. 또한 옥구 현감을 하면서 친아버지 조필영의 전운사 선정비도 세웠다.

 

 

9. 전운사 조필영(趙弼永)과 조병징 동학 농민군에 체포되어

 

1894년 전북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전운사 조필영(趙弼永)과 아들 옥구현감 조병징(趙秉澄)을 체포하여 강금하고 고문을 가하기도 하였다.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쓴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조필영과 아들 조병징이 동학농민군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격고 어렵게 탈출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1894년 4월 15일 동학 무리는 조필영(趙弼永)을 체포하여 벌거벗기고 포박하여 꿀을 발라서 낮에는 햇볕에 쬐고 밤에는 돼지우리에 가두어두고 파리와 모기들이 물어뜯게 하여 고통을 주니 조필영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가족들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적들의 소문을 들으니 그들은 금일중으로 다시 결합하여 포박된 조필영을 끌어낼 것이라 하였다.

 

조필영은 갈증이 심하여 오줌을 받아서 갈증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황이 위험에 처해있었다.

 

조필영의 첩(妾)은 전대에 수 천금을 지참하고 4~5일 동안 적들의 느슨한 감시망을 틈타 해결하여 발가벗은 몸과 맨발로 걸인처럼 조필영을 탈출하게 하였다.

 

그리고 옥구현감 조병징은 최초로 관직에서 내려오면서 관직을 수행한 고장에 그 부친 조필영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는데 적들은 달아난 조필영이 한스러워 선정비를 넘어트렸다.

 

그의 아들 조병징(趙秉澄)은 여러 번 주리를 틀어 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옥구현 백성들은 도리어 그를 동정하여 적들에게 “우리 고을 현감은 그의 아버지 조필영(趙弼永)과는 다르고 매우 훌륭한데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주리를 트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니야?”라고 하였다.

 

적들은 배부르게 먹고 웃음을 지었다. 이내 아들 조병징도 또한 도주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1894년 5월 부여 유생 이복영(李復永1846〜)이 쓴 일기 남유수록(南遊隨錄)의 기록을 보면, 전운사 조필영(趙弼永)은 탈출하여 아들과 함께 가족의 식솔들을 이끌고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서해에 떠서 적도들의 화를 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 봉기가 진정된 후 육지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조병징의 묘소는 마서면 계룡 선영에 있다.

 

※ 그동안 3월부터 제공한 <새로운 창을 여는 서천역사>는 필자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이번 원고를 마지막으로 마감하고자 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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