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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암살미수 사건으로 유배된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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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도로변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趙貞喆)의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조정철의 거사비가 세워진 내력과 그는 어떠한 인물이며, 조정철은 정조 암살미수 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기간 조정철을 위해 목숨과 바꾼 홍윤애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버스 정류장 옆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 거사비(忠淸道觀察使 趙貞喆 去思碑)가 서 있다. 순조 15년(1815년) 10월에 세워진 비석으로 우리 고장 서천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세웠다. 거사비를 세우게 된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마 순조 13년(1813년)에 조정철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던 해로 전국적으로 대기근으로 백성이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 호서지방에 1만 석으로 진휼한 것을 보면 구휼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관찰사 조정철(趙貞喆:1751-1831)은 본관은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서천읍 구암리에 안장된 우의정을 지내고 영조를 왕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조태채(1660-1722 :二憂堂 趙泰采)의 증손자다.

 

정조 1년(1777)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남인을 등용하여 개혁을 내세우자 노론의 세력은 불안을 느끼고 정조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조정철도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 생활하게 된다.

 

유배지에서 홍윤애를 만나 사랑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한 홍윤애는 죽음으로 조정철를 지켰다.

 

유배하는 동안 조정철(趙貞喆)이 역모의 대역죄를 짓고 제주도에 유배 생활 하는 동안 제주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정조 암살미수 사건의 배경

 

제주도는 절해고도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고려, 조선시대에는 대역죄인의 정치적 수용소인 유배지였다.

 

제주도에 유배당하면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많은 유배자 중에 조정철만큼 오랜 기간 고초를 겪으면서 유배 생활을 한 사람 없다.

 

무려 27년간의 유배였다.

 

정조 1년(1777) 8월, 정조 임금을 시해하고 은전군(恩全君)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주동자와 연루자들이 줄줄이 잡혀 들었다.

 

조정철은 그때 27세의 장래가 촉망되던 준수한 청년 선비로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조영순(趙榮順),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조겸빈(趙謙彬), 증조할아버지는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으로 유명한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였으니, 당시 조선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순조롭게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장인(丈人)은 노론 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洪趾海)였다.

 

온갖 행운은 그의 것이었고 세상의 모든 길은 그를 향하여 뻗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모 사건이 들통나고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 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그 순간부터 그의 목숨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금의 목숨을 노리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모반의 죄는 어떤 왕조에서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2. 역모 사건의 대역죄는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단행

 

조선왕조는 역적에게는 부계(父系)는 물론 모계(母系)인 외가(外家)와 처계(妻系)까지 삼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고 있었다.

 

중죄 중의 중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죄가 반역죄였다. 달리 일컬어 대역죄라 했다.

 

조정철(趙貞喆)은 장인 홍지해(洪趾海)의 정조 시해 미수 사건으로 연루되어 반역자로서 죽음을 면치 못하였지만, 조정철은 증조부 조태채(趙泰采)는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공신을 참작해 생명을 부지한 채 제주도 유배 생활에 처했고, 그 후 조정철의 부인 홍씨는 8개월 된 아들을 두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3. 제주도 유배지에서 홍윤애의 만남

 

명문의 거족 27세인 조정철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심성이 좋은 김윤재(金潤才)의 집에 거처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죄인이 유배 생활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이웃에 살던 스무 살 아가씨가 홍윤애(洪允愛)를 만나게 된다.

 

제주의 돌담은 낮다. 목만 돌리면 집 마당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낮은 까닭에 이웃 간에는 숨길 것도 없고 서로의 사정도 저절로 알게 마련이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가 가장인 집에서 언니와 쌍둥이처럼 사이좋게 살아가는 홍윤애(洪允愛)에게 서울에서 귀양 온 유배객 조정철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그의 조용하고 신중한 처신과, 항상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시를 짓는 선비 중의 선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변소를 출입하기 위해 마당에 나온 그의 파리한 얼굴과 마주치거나 여윈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 한편이 저미도록 동정심이 갔다.

 

밥값을 한 푼도 못 낸 지 이미 오래고 그의 처지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게 된 홍윤애는 용기를 내어 김윤재의 아낙을 찾아가 자기가 그분을 돌보아드리겠다고 자청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그녀는 바느질삯을 알뜰히 모아 조정철의 식사와 의복을 수발하는 데 남모르는 정성을 기울였다.

 

홍윤애가 조정철을 위하여 마련하는 밥상은 소박하고도 조촐했다.

 

또한 그의 의복, 의복이래야 죄인에게 허락된 것은 흰 무명저고리바지가 고작이었으나 정성껏 지어 입혔다.  

 

4. 집필묵과 도서 구입의 경제적 도움

 

조정철은 시인(詩人)이었다.

 

서책(書冊)은 그에게 스승이며 벗이며 정신의 버팀목이기도 하였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 시를 짓는 일은 그에겐 육신의 양식인 밥보다도 더 소중한 영혼의 양식이었다.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 기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글에 대한 갈증이었다.

 

어느 날, 조정철이 손가락에 물을 찍어가며 벽에 시를 쓰는 것을 목격한 홍윤애는 그만 왈칵 눈물이 솟구치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날로 그녀는 어머니가 생전에 마련해 주고 간, 시집갈 때 쓰라는 비단 옷감을 돈으로 바꾸었다.

 

그 돈으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섬에서는 구하기 어렵고 귀한 물건인 먹이며 붓, 종이는 물론 서책도 육지를 오가는 상인에게 부탁하여 구하였다.

 

행복의 절정에서 느닷없이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진 신세였으나 어떤 액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 조정철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정의 손길이 고요히 다가와 그를 감싸고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줄기 맑은 샘물과 같은 홍윤애의 마음씨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조정철에게 따스하게 흘러들어 희망의 빛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홍윤애는 행동에 조심에 조심을 더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채워져 있는 가혹한 운명의 족쇄를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5. 공포가 드리워지는 조정철의 유배 생활

 

지금의 정조임금님이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놓여날 수 없다고들 했다.

 

어느 날 조정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 사약(賜藥)을 가진 금부도사가 내려올지 모른다 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짙게 드리워진 조정철의 절망,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피비린내를 몰고 광풍(狂風)은 발자국을 죽이며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당파가 서로 달라, 오랜 견원지간인 김시구(金蓍耈1724∽1795)가 정조 5년(1781)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판관 황윤채와 짜고 조정철을 제거하고자 했다. 제주목사에게는 다른 곳의 수령들에게는 없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선참후계권(先斬後啓權), 모반을 획책한 대역죄인인 경우 먼저 베고, 나중에 상황을 적은 장계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는 권한이었다.

 

제주는 육지와의 사이에 거친 바다를 두고 있어 일기가 고르지 못할 경우 상황을 보고하고 후속 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나 시일이 오래 걸리므로 우선 죄인부터 처단하고 수습한다는 것이었다.

 

정적 제거에 있어 이러한 권한이야말로 하늘이 김시구에게 준 절호의 찬스였다.  

 

고로(古老)의 말로는 5월에 제주목사 앞으로 감사(監司)로부터 밀사(密使)가 와서 조정철을 적당한 죄명아래 장살(杖殺)하라고 했다.

 

그는 법정에 끌려 나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시체가 되어 법정 밖으로 운반되어 나갔다.

 

 

6. 제주목 관아의 형벌로 죽어가는 조정철 목숨을 살린 홍윤애

 

이때 홍윤애(洪允愛)가 달려들어 그의 몸에서 아직 온기가 있는 것을 알고 입에 오줌을 부어 놔 소생시켰다.

 

당시의 법은 장사(杖死)했다고 해서 버려진 죄인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으면 또다시 죽이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조정철을 죽을 만큼 몽둥이질해서 내쳐놓고 목숨이 마침내 끊어졌다는 소식을 기다리던 김시구 목사는 그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구명한 것이 누구인가를 탐문, 당장 잡아들이라 설쳤다.

 

“조정철은 상감께 대역을 저지른 죄인이다. 앞으로 이 자를 비호하거나, 이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이라도 주는 자가 있다면 내 그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자를 길거리에 내다 버려 백성들에게 대역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고, 끝내는 까마귀밥이 되게 하라!” 하고 곤장을 칠 때 분명히 여러 사람이 알아듣도록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자신 말이 먹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해괴하고 괘씸하였다.

 

7.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죽음 선택한 홍윤애의 진정한 사랑

 

홍윤애(洪允愛)는 정식으로 혼인을 맺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서 딸(1781년 2월 30일∼1863년 11월 24일)이 태어나기도 했다.

 

홍윤애는 관가로 끌려가기 전, 낳아서 두 달밖에 안 된 어린 딸을 언니 품에 안겨 한라산 속의 절로 떠나보냈다.

 

김시구 목사는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홍윤애를 보자마자 증오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끓어오르는 적개심으로 얼굴이 검붉게 변하여 두 발을 탕탕 구르면서 자백을 요구했다.

 

- 조정철이 임금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 자신을 귀양 보낸 조정 중신들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 다른 유배인들과 서찰교환도 하고 몰래 접촉도 하더라는 자백

- 홍윤애와의 관계

 

홍윤애는 이러한 죄목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었다.

 

그녀는 잡혀 오기 전 조정철에게 “그대를 살리는 길은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義女曰公之生在我一死 : 조정철이 쓴 洪義女 碑文)”라고 자신의 의지를 밝힌 터였다.

 

내가 죽되, 어떻게 죽어야 님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몽둥이가 50대가 부러지고 60대가 부러져 나뒹굴었다.

 

홍윤애의 몸은 살이 찢어져 흩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까무러쳤다.

 

찬물이 끼얹어져 의식을 되찾기를 몇 번, 그때마다 목사는 원하는 답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한결 답은 “그런 바 없다!” 하였다.

 

몽둥이 재질(材質)이 너무 약해서 잘 부러진다며 목사는 잘 부러지지 않고 매 자국이 지독하게 아픈 윤노리나무 몽둥이를 특별히 깎게 하여 쳤다.

 

윤노리나무 몽둥이까지 70대가 부러져 나갔다.

 

그녀의 처절한 비명은 관아의 높은 담장을 넘어서 제주성 내로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귀란 귀는 모두 관아를 향하여 열어놓고 이 사건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연약한 여자이기에 몇 대 맞으면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어내리라 생각하였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8. 죄 없는 홍윤애의 죽음으로 큰 파장 일어

 

홍윤애의 죽음으로 인한 파장도 컸다.

 

김시구 목사는 이렇다 할 물증도 없이 가혹한 고문으로 홍윤애를 죽이고 나서 이 죽음을 은폐(隱蔽)호도(糊塗)하는 장계를 올린다.

 

제주에 유배와 있는 죄인들끼리 서로 통하며 역적모의한 낌새가 있어 그들을 징치(懲治)하였다고.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처참하게 살육한 이 사건은 곧 조정에 알려지고 큰 파장으로 일으켰다.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처참하게 살육한 이 사건으로 안핵어사(按覈御使) 박천형이 파견되어 진상조사 결과 죄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조정철은 정의현(旌義縣)으로 이배(移配)를 명령받는다.

 

육지의 친구나 친척으로부터 연락이나 원조 물품을 받을 가망성을 확실히 차단할 수 있는, 선박(船舶)의 왕래가 없는 첩첩산골 성읍리(城邑里)에서의 20년의 세월, 그래도 그는 살아남는다.

 

제주 유배지에서의 작성한 조정철의 시문집 ‘영해처감록(瀛海處坎錄)’, ‘큰 바다 건너 구덩이에서 보낸 세월에 대한 기록’이라고나 해석할까.

 

그 문집에 실린 시의 행간을 살펴보면 이때 그는 짚신을 삼고 댕댕이 덩굴로 모자를 짜서 먹을 것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읍에서도 다시 한차례 위기를 맞는다.

 

9. 27년간 한 맺힌 유배해제와 복권 후 제주목사 부임

 

정조 12년(1788) 신대년(申大年) 정의현감이 부임하면서 유배인들, 특히 조정철을 심하게 핍박, 기찰하였다.

 

우선 그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하였고, 시나 글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정철은 유배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30여 년의 귀양살이에서도 살아남은 뒤 환갑의 나이 복권되어 1811년에 한 맺힌 유배지였던 제주에 35년 만에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홍윤애가 조정철 때문에 장살 된 지 31년만인 셈인데 이때가 조정철이 61세 환갑 나던 해이다.

 

그는 오자마자 홍윤애의 묘비명을 짓고 애도시를 적어 넣었으며 그 애도시(哀悼詩)는 그의 제주에서의 유배집인 ‘영해처감록(瀛海處坎錄)’의 마지막에 실렸다.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제주에 유배되어 27년을 한라산을 바라보며 힘든 유배 생활을 하다 61세 노인이 되어 제주목사로 왔을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을까.

 

홍윤애가 죽고 17일 후인 6월 2일 새벽, 자기 때문에 아까운 일생을 무참히 마치고 장지로 떠나는 홍윤애의 상여 소리를 들으면서 조정철은 어떻게 이 원혼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인가를 몇 번이고 되씹었다.

 

이처럼 가슴 맺혀 떠났던 그가 다시 한번 제주도에 와보고 싶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0. 버려진 홍윤애 무덤에 묘비를 세우고 사랑의 시를 새겨주다.

 

그는 제주에 목사로 도임하자 곧 홍랑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손수 글을 지어 비를 만들어 세웠다.

 

/옥같은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 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일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자매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겨져 있구나/

 

라고 하며, 죽은 후에나마 비통하게 간 홍윤애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조정철이 제주에 왔을 때 그녀의 딸은 이미 죽고 사위 박수영(朴秀榮)도 그가 제주에 부임하던 해에 죽었다 제주에서의 목사 재임 중에 받는 봉급 전부를 시댁(媤宅)이 있는 애월읍 곽지리에 삼 칸짜리 초가도 지어주고 농토도 네 번에 걸쳐서 사주어 기본생계 걱정을 덜어주는 등 아비로서의 정을 아낌없이 쏟았다.

 

또한 사위를 족보에 올려 제주에 딸이 있음을 천명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인간에 대한 예의요,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은(報恩)이며, 사랑하는 님에 대한 단심(丹心)의 표시였다.

 

조정철이 목사 재임 중 제주성(濟州城)을 개축하고 왜구(倭寇) 등 국방의 대비에 힘쓰고 성 주변 12과원(果園)을 설치, 감귤재배를 권장하고 흉년 때 육지에서 들어와 노비가 된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부당한 세비를 빙자한 재물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부역(賦役)으로 과중한 부담이 없도록 하였다.

 

이동래부사로 떠난 후 충청도관찰사,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을 거친 후 1831년 5월19일 지중추부사를 마지막으로 곡절 많았던 세상을 하직했다.

 

조정철은 이렇듯 말년을 영화롭게 장수하며 생애를 마감했다.

 

홍윤애의 무덤은 광양도리공동묘지에 있었는데 1937년 제주농업학교가 이설되면서 현재 유수암리에 홍윤애의 외손자인 朴奎八(1803-1822)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고 없도록 힘썼다.

 

한편으로는 귀양 살 때 자기 때문에 고통을 받은 집주인과 이웃들을 만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옛날의 신세에 대한 보답도 하였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온 이듬해 조정철이 세운 비도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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