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 피고 지는 것이 어디 나무뿐일까? 굽은 나무 아래 살려면 내 몸이 뒤틀려야 하는 것인데 어린 내게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굽은 나무는 그늘을 옮기는 바람을 봐야 하고 새의 그림자를 읽어야 한다고 넘치면 넘어지는 법이니 둥글게 구르며 살아가라고 하셨다 그늘의 공식을 잊고 살아서 였을까 나는 새의 날개를 꺾기도 했고 비 오는 날은 숲속의 어둡고 습한 방언을 듣기도 했고 나뭇 가지들의 삭히지 못한 이야기는 빗소리에 묻어 두곤 했다 잎은 빗소리를 달고 자랐고 질서가 바뀐 순간 서늘한 목이 잘려 우듬지를 넘어설 수 없으나 그래도 네 이름이 아름다운 건 유배당한 젊음에 햇살 들어 푸르기 때문이었다 멀어진 나무의 푸르름을 손 끝으로 만지면 쌓아 온 볕들이 하나씩 부러졌고 눈 부신 조각들은 다른 시간에 사는 것뿐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이었다 물과 불이 그랬듯 곧는 나무와 굽은 나무의 공식은 낮아지고 작아져 모든 그늘을 용서하는 일이었다
2025-03-24 김도영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 회원)앞숫구멍 뱃가죽을 가르고 포궁을 연다. 아기를 세상 밖으로 이끌기 위해 누군가의 손길이 내 가슴통을 옥죈다. 죽음의 사자가 다가선다. 녹색 가운을 걸친 이는 태연하게 숨을 내쉬라 한다. 손잡아 주는 이의 동공은 습하다. 뱃가죽이 열리고 포성이 들린다. 탯줄이 끊긴다.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따라 세계는 흐른다. 삶이 다가온다. 아기를 품에 쥐어 준다. 이내 날갯죽지 아래에 놓인 앞숫구멍이 뜨겁게 벌름거린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sbn서해신문 칼럼위원인 강소산 서천중학교 교사가 ‘월간 시사문단 제263호’에 실린 시로 신인상을 수상해 시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선된 그의 작품 ‘앞숫구멍’은 생명의 탄생 순간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면서도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이 시는 단순한 출산 묘사에 그치지 않고, 생명의 시작과 그 과정에 내재한 고통과 신비로움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 시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실존주의적 성격을 띤다.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 기법을 통하여 삶의 신비를 극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현대적 감각의 생명 시로 평가될 수 있다. 강 시인은 단순한 서정시를 넘어 독자에게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2025-03-19 권주영 기자화단에 해바라기씨를 심었더니 태양이 화단에 가득 차 있다 피는 것은 아픈 거라고 까만 무게를 견디지 못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해바라기 야위어 갈수록 흙담처럼 흘러내린 눈동자를 털어낸다 눈 감으면 사라지고 누군가 쌓아 놓은 것들은 아프지 않으면 영혼을 잃어버린다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인디언들 씨앗은 힘이 세다고 씨앗 주머니를 차고 다닌다 초록, 노랑, 빨강 해마다 허락도 없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가 보다 죽은 씨앗을 입김으로 불어 밑바닥 온기를 모아 햇볕에 던져 나는 힘센 화단에 소소한 밀알이 된다
2025-02-27 김한중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 회원)처음엔 그냥 사랑이었다가 점차 뜨거운 사랑이었다가 차츰 짜증과 원망이 섞여 일상의 지루함에 지쳐가다가 친구인지 가족인지 이웃인지 동료인지 관계의 경계가 모호해 지다가 서로의 일에 매여 무관심해지다가 머리카락 희끗해지는 어느 날 잡자기 예잔함과 함께 가슴 아픈 연민이 밀려오고 가엾은 마음에 괜스레 눈물이 나고 미안함과 죄책감에 가슴이 져려오더니 이제는 한시도 눈 밖에 둘 수 없고 그저 곁에만 있어도 안식을 얻는 함께 있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사람 잠결에 듣는 목소리에도 행복해지는 그대, 아내라는 이름의 사람
2025-02-20 조효정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 회원)솔바람 조용히 오가는 골짜기에 딱따구리 부지런히 죽은 나무를 오가며 입춘대길을 새겨 넣는 아침 저수지 가에 겅쩡거리는 왜가리와 고고한 백로도 반가 사유상의 자세로 버들가지에 눈이 부풀어지는 때 맞추어 경전을 독송하고 기다림은 모든 것을 마모시키듯 응시하는 수면 위에 무뎌진 칼날을 쓰윽 쓰윽 갈아 날을 세운다 본능에 목말라하던 자존심도 버리고 자신을 세우는 신성함에 목을 매어야 무더지지 않는 세월을 만난다 늙은 스님은 매어 있는 닻을 끊어 망망대해로 떠가는 허름한 목선에 올라 심연에 가라앉아서도 가부좌 틀고 주인 잃는 빈 목선은 아제 아재 바라어제 바라승아제 주문을 외운다 모두 내 탓이다
2025-02-13 최명규 시인(서천문화원장/대한민국예술명인)칼날에 잘려 나간 비늘에 새벽 시장이 환하다 음각을 덮고 있는 갈치 사이로 삐져나온 눈알에 서늘해진 마음 베인다. 파도 부스러기처럼 경매사 목소리 부서지고 울뚝불뚝한 그 소리 따라가면 온통 가시밭이다. 가시들이 파닥일 때마다 어둠은 새파랗게 변하고 꽁치, 갈치, 풀치 가시가 많은 것들일수록 달빛에 더 환하게 출렁였으므로 그래서 달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씩 눈이 따끔거렸는지도 모르겠다. 가시 많은 사람이 어디론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등뼈 휘어지지 않으려고 휘어지는 고기들이 뛰고 날고 들릴 듯 말 듯한 울림들 신기루라던 물고기자리에 어록으로 수북이 쌓인다. 허벅지까지 말아 올린 생존의 소리, 아침 햇살에 찔려 따끔거린다.
2025-02-06 김도영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군지부 회원)왜? 떫으냐? 밤새 구정물 통에서 우려진 땡감 떫은맛이 빠졌나 맛을 본 자국 크고 작은 이빨 흔적 파랗게 젊어 떨어진 땡감아 아련한 눈시울을 적시는 지금은 네가 잊혀가지만 나를 짓밟고 지나간 저 자국들 가슴 가득 응어리 쌓여 세상 떫은맛을 보면서 삭여 빨갛게 익은 늦가을 홍시도 한때는 떨떠름 했다
2025-01-23 최명규 시인(대한민국예술명인/서천문화원장)부엉바위가 지키는 저수지에 물결이 일렁이면 내 마음도 함께 일렁인다 저수지를 끼고 돌아 봉선지 외가마을로 가는 길 아득한 어릴적 추억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마을 어귀에서 반기며 내 마음을 녹였던 할머니의 미소가 그립다 외가에서 보냈던 하루 그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 봉선지 물결 안에 이 순간에도 영원히 간직한다
2025-01-16 김영식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