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신장을 새 장터라 부를 때 봉선 저수지도 물을 가득 삼키고 그 곁을 지켰다 그곳에서 찰박거리며 밤새 고기를 잡아다 뷩바위 아래 쏟아 놓은 어린 도깨비도 인파를 따라 새 장터에 같이 놀았다 엄마가 보름 걸려 짜준 모시를 팔러 가신 아버지 늦은 밤까지 주막에서 술을 먹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 빈손으로 집으로 가고 아버지만 남았다는 그 새 장터 아직도 나는 그 뷩바위 아래 사는 어머니 모시 판 돈 후려 먹은 그 어린 도깨비를 만나고 싶다
2024-11-15 최명규 서천문화원장(대한민국예술문화명인/한국문인협회 회원)중앙은 항상 고요했다 무거웠고 깊었다 가장자리는 항상 번잡했다 가벼웠고 얕았다 중앙은 항상 먼저 채워지고 먼저 녹았다 나머지가 가장자리의 몫 큰 고기들은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크고자 하는 고기들도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이 때때로 첨벙 튀어올라 파문을 만드는 것은 가장자리의 플랑크톤을 약탈하려는 교묘한 술책 중앙을 키운 것도 먹여 살리는 것도 가장자리다 중앙은 망각의 장소다 치어들은 커서 중앙으로 향했고 중앙에 도착해서는 가장자리를 잊었다 그러고도 뻔뻔한 중앙은 때때로 가장자리를 찾아와 입 안 가득 먹이를 훔쳐 돌아갔다 가장자리는 중앙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먼저 마르고 먼저 얼지만 가장 늦게 녹고 가장 늦게 채워지지만 비 온 다음 날처럼 연못이 벙벙해지면 중앙으로 떠난 치어를 생각하며 철벙철벙 뒤척일 뿐이다 갈대를 부여잡고 그리움을 숨기려 스멀스멀 안개를 피울 뿐이다
2024-11-07 김한중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 회장)예전과 같은 길이 아닐지도 몰라 오늘따라 하늘은 푸르지도 않은 거 같아 그렇지만 난 알고 있다 언제나 걷던 길이 아니란 걸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걸음을 움직인다 발걸음을 따라 시간의 그림자들이 따라온다 내 귓가에 속삭여준다그날의 사연들을... 그날의 그 길은 외롭지 않았어 같이 마음을 기대고 의지할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 길에서 함께 불렀던 노래 너무도 뜨거웠던 눈빛 온 누리를 뒤덮던 메아리 우린 그날 그 길에서 함께 했어 너와 나의 의연함은 하늘은 감동 시켜 마침내 커다란 물결을 만들었어 나는 텅 빈 이 길에 나 혼자 서 있다 예전의 흙먼지가 날리던 길이 아니지만 그날의 함성을 기억한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이 길을 걷는다 예전과 같은 길이 아닐지라도 나는 걷는다
2024-11-01 박강현 시인(서천시인협회 회원)싸리꽃 피면 갈기갈기 찢긴 그림자의 무게를 네모난 바퀴에 싣고 천 리 길 달리시어 이 몸이 살았습니다 마당 가득 메운 싸리꽃이 흰 쌀처럼 쏟아져도 아버지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던 날 초가지붕에 내린 서리를 모아 어린 새끼 추울까? 바람의 가시로 풀무질하시며 새벽을 깨우시던 그 기침 소리 마를 날이 없습니다 어쩌다 그 소리 잃어버린 채 가늠할 수 없는 세월에 묻혀 당신을 찾아가도 붉은 눈물 닦아 주시던 당신! 아득해진 하늘 아래 홀씨 되어 홑눈으로 험지를 더듬고 살아온 내가 핏빛 노을에 아버지를 묻고 오던 날 당신 닮은 발소리 나를 따라옵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당신이 바라시는 것이 오래 당신을 바라다보는 일이었다는 것을 어리석은 나는 왜 미처 몰랐을까요 당신은 큰 산이며 큰 바다였다는 것을 황혼에 물든 서녘 바람은 자꾸만 저만치 멀어지는데 빛과 어둠에 스미던 휘어진 살들의 통증은 오래도록 시린 발등을 덮어줍니다
2024-10-28 김도영 시인찻잔에 눈물을 따랐습니다 눈물에 달이 차니 늙은 아버지의 통증이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금방 오실 줄 알았습니다 읍내에 잠시 마실 나가 생선 두어 마리 들고 오실 줄 알았습니다 생선의 대가리만 방향을 잃은 채 납작하게 길 위에 서성입니다 쉬 오실 뜰 안에는 맨드라미와 채송화 피고 또 씨를 맺고 계절 잃은 코스모스가 안방 창호지 문에 꽂힌 채 기다립니다 풀 먹은 날 선 무명 이불깃 달의 공전에 얇아지고 이가 시린 달만 사무치게 온몸을 휘감습니다 식어버린 찻물을 다시 부을 때쯤 가슴에 익은 인기척이 들립니다 바람도 알고 있는 따뜻한 목소리 꽃구름 등지고 걷는 아버지 닮은 나는 민둥산 같던 당신 닮은 집 한 채 지어 놓습니다.
2024-10-23 김한중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장)우리 사는 곳 산에서만 같다면 가진 것이 많든지 적든지 노인이든지 젊은이든지 편견 없이 품어주고 나눠주는 산과 같다면 먼저 온 이에게 눈인사 건네고 나중 온 이에게 앉은 자리 내어주며 모두가 하나 되는 산 인심만 같다면 오가는 인사말엔 허세도 교만도 섞이지 않고 위선과 치장도 땀에 씻기어 그 정직하기가 산 바위만 같다면 얼음물 한 잔에도 호수 같은 인정을 나누며 땀 밴 등허리에 손바람 부쳐주는 그 넉넉하기가 산바람만 같다면 오가는 길 섶엔 정겨운 들꽃 재수 좋은날엔 귀여운 다람쥐와도 눈 맞춤 하고 그 천진스런 행복감이 산길에서만 같다면 그러면 참, 참 좋겠습니다.
2024-10-08 연규월 시인(서천시인협회 회원 )봉서사 종무소 툇마루에 앉으면 극락전 마당 가득 펼쳐진 가을 햇볕의 잔치를 본다 잔디밭을 뛰노는 바람의 소리가 승무를 추는 여승의 발끝을 닮은 듯도 하고 바라춤을 추는 스님의 힘 있는 모습도 닮은듯하다 가을 햇살과 바람은 이래서 좋다 바라보는 눈길 속에 온갖 상상들이 나래를 펴고 그 상상 속에서 또 다른 기쁨을 느낀다 활짝 열린 극락전 문으로 수시로 드나드는 바람은 벌써 불심이 가득 한지 바람의 옷깃엔 기분 좋은 향내가 가득하다 봉서사 그곳엔 바람도 햇살도 승복을 입었다.
2024-09-27 김한중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장)수초에 걸려 신음하는 피아니시모 평원을 거닐 듯 바위 위에 미끌어지는 돌체 산허리 구비치는 장엄한 마에스토소 한 골짜기 흐르는 물도 어느 한 줄기 같은 꼴이 없구나 등 기대고 흘러온 굴곡에 따라 제 몸 던져 부서지는 깊이에 따라 계곡의 오선지에 서로 다른 음표 그어대지만 그들은 모두 한 바다로 가는 것을
2024-09-18 연 규 월 시인(서천군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