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귀에 핀 해바라기꽃이 아련한 고향의 향수를 일으킨다. 그런 고향을 가져 본 적 없는 지금의 현대인들께 작품을 빌어 고향을 선물해 주고 싶다. 자연은 평안과 안식을 주기도 하고 인간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아름답게 반짝이던 바다의 어제가 오늘도 그러하리라는 예상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예측불허의 자연재해는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 작은 나비의 몸짓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인류를 위협해 온다.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자연의 파괴력 앞에 한낱 미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련 뒤에 광활한 대지의 지평선 너머의 희망 미래 용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연에서 힘을 얻어 삶을 이어온 것이다. 자연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는 것일까? 자연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동양은 이를 산수화라 부르고, 서양은 풍경화라 지칭한다. 산수와 풍경의 차이는 산수가 자연의 이상화를 요구함에 비하여, 서양의 풍경은 객관적 표현을 강조한다. 자연에 대한 시각 및 재료가 서로 달라 접근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물길 따라 산책하는 동안 산과 저수지가 만나는 시점에 한국화도 보이고 서양
회색의 도시를 벗어나고 싶은 나는 마음 빼앗기는 빛 그림이고 싶어 긍정을 보았다. 수원에서 입시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때였다. 취미반 수강생 고향이 서천이란다. 서천에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무창포 해수욕장이 모세의 기적이라며 시간을 내서 가자고 했다. 그때의 여행이 나의 변주곡이 되었다. 중·고교생 입시 미술은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돈의 노예가 되었고 대학 진학률에 집착과 좌절이 나의 자존감을 흔들었다. 욕심이 무지에서 온 것을 깨닫고 억지스러운 삶을 내려놓았다. 50여 년을 품어준 수원을 뒤로한 뜻은 대지의 푸른 꿈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흩어진 마음을 다듬고 귀촌했다. 봄에는 자작나무가 ‘세잔의 마로니에 가로수’ 같고, 여름엔 대밭 짖은 숲이 ‘모네 수련의 연못’ 조화를 이룬다. 산모퉁이 지나면 ‘세잔의 균열된 집’이 보이고 가을엔 ‘아를의 햇살’처럼 감나무가 찢어져라, 보답이라도 하듯이 볼 붉혀 웃는다. 겨울은 ‘시슬레 눈쌓인 부르시엔느의 뜰’처럼 춥지 않아서 양지 따라 냉이 시금치 곰보배추가 파릇파릇, 들판에 ‘고흐 씨뿌리는 사람’이 연상되고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루소의 꿈’처럼 내 꿈도 푸르다. 사람과 자연이 어울려 산다는 ‘어메니티 서천’ 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