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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용의 뉴스창

【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52)> 6.25전쟁(戰爭)발발 - 동족상잔의 비극(悲劇)(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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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비극, 북한 김일성 1950년 불법 기습 남침
주한미군철수와 한국을 제외한 애치슨라인 선언...델레스의 헛발질
철저한 남침계획과 병력, 무기, 훈련 등 사전 준비
6.25 발발 직전, 남한은 남침 대비한 준비 소홀...맨주먹의 국군들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 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50년은 역사의 오욕이자 비극인 6.25 전쟁 발발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이후 남북이 38도선으로 갈라진 뒤 좌우익 갈등을 겪더니 기어코 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생사를 가르는 이른바 동족상잔의 비극이 터졌다.

북한은 소련과 중공(중공)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그해 38선 전역에서 불법남침을 개시했다.

개전 초기 열악하기 짝이 없는  국군 3사단, 6사단, 8사단이 맞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다음 날인  6월  26일  유엔안보리에서 , 북한군 남침중지 결의했다.

이어 27일에는 미 총사령부는  전진소를 설치한뒤 미 해군과 공군을 한국전쟁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 사흘만인 6월28일 수도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됐다.

◇…6.25 남침 전야 남북한 정세

미국타임스는 1949년 3월 2일자 1면 특종기사가 있다.

내용은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이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했다는 기사였다.

이는 1950년 1월 발표된  '애치슨라인(Acheson Line.극동방위선)'에 일본.대만.괌,필리핀은 미국안보지역으로, 한국은 애치슨라인에서 제외된다는  공포 열 달 전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은 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철병(撤兵)을 단행한데 이어 미국이 애치슨라인을 그어 한국을 제외하니 소련.중공의 먹잇감이었다. 

이를 계기로 호시탐탐 남침야욕을 보인 김일성의 북한 인민군은 황해도 해주와 개성, 강원도 양구등에서 50여차례의 38선을 경계로 우리 국군과 충돌했다.

 해방 후, 소련은 자기들이 구상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끌어 들이기 위해 북한에 대해 지속적으로 군수물자는 물론 군조직, 전술전략등과 실전훈련을 지원했다.

때문에 북한은, 친일경찰로 치안을 유지하던 이승만의 남한과는 전혀 달리 아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미국 군이 우리에게 군수물자를 제공하지 않은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평소에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과 사이가 좋지않던 미군정청장을 지낸 하지 중장등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면서 명분상서 한국에 대해 국방 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말뿐, 원조는 없었다.

그러자  6.25 전쟁 1년 전인 1949년 6월 24일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은 긴급 담화를 발표했다.

손 제독은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상 대비가 필요하다. 해군은 급속한 시일 내에 최소한 순양함을 필두로 구축함·잠수함 및 각종 보충함 등 약 7만 톤의 함정은 절대 보유하여야 할 것"이라고 북한의 남침을 경계했다. 

손 제독은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이 점 미국에 적극 원조를 요청하는 바이며, 또 그 정도의 원조는 획득할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 1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Mutual Assistance Agreement)이 발효되었지만, 6·25전쟁이 터지기까지 변변한 원조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1950년 3월 16일 하와이에서 낭보가 날아왔다. 

우리 해군 장병이 십시일반 박봉을 털어 구입한 '백두산호'가 구경 3인치, 포신 50인치의 대해·대공 양용(兩用)포를 탑재하는 등 무장을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이어 4월 11일 대한민국 해군 1호 전함이 진해 해군기지에 입항함으로써 우리 해군은 군함 없는 해군의 한을 풀었다.

 6월 25일 전쟁이 터진 날 밤 부산 앞바다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하던 백두산호의 탐조등에 북한 인민군 육전대 1000여명을 태운 수송선이 걸렸다.

 함포가 불을 뿜었고 적함은 수장되었다.

그때 해군 장병과 손원일 제독이 보여준 미우주무(未雨綢繆·비가 오기 전에 둥지의 문을 닫아 얽어맨다)의 혜안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도 인천상륙작전도 그리고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다. 

손원일 제독은 "바다에는 미래가 있다.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이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해온 분이다.

과거 1927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 부둣가에서 18세 청년 손원일이 품은 웅지가 우리 앞길을 비추는 등대로 다가선 그날이다

6.25 발발 1주일 전인  1950년 6월  18일  방한한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심상찮은 38선 접경지대를 직접 살피고 떠났다.
 
남한은 그 무렵, 5.10총선을 통해 정부가 들어선 지 두돐, 육군 병력 8개사단의 대다수는 태백산과 지리산 지역 공비토벌을 위해 투입된 상태다.

38선 지역에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가 배치되었고, 이 4개사단도 후방 사단들이었다.

더구나 국군이 가진 무기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대부분 미제 M1 소총과 일본군이 쓰다버린 구식 소총뿐이었다.

물론 기관총도 있었고, 박격포와 야포도 있었으나, 극히 적었다.

예컨데  야포라야 미군이 폐물이된 M3형 105밀리 곡사포 90여문이었다.

대전차무기라고 236로케트포와  57밀리 대전차포 밖에 없었다.

수송차량이나  공병, 통신장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국방예산이 전혀없었다.

미국은 세계 유일의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지만, 한국은 에치슨 방위선 밖에 있는 나라였다.

당시 전사등 기록을 보면 미국이 6.25 전후에 한국에 무기를 주지 않은 이유는 한국군이 북한공산주의자를 공격할 때 미국의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미국무성은 무초 주한 미대사에게 한국군에게 무기를 주지않도록 명령을 내렸다.

◇…맨 주먹 국군, 첨단 중무기 인민군.

이렇게 맨주먹 뿐인 국군은  의기뿐이었다.
  
맨주먹 의기로만 나라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그런데도 미국에만 절대 의존하고 있었다.

한국에 미국사람이 거주하기에 공산군의 남침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반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38선을 경계로 미.소대결을 명분삼아, 주한미군 철수와 중공 공산당의 중국대륙에서 승리, 미 태평양 방위권에서 한국을 제외한 점을 남침의 호기로  삼았다.

더욱이 5.30 제 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계기로 남한의 입장이 날고 공고화되는 점등을 고려해 시기적으로 이때를 남침의 호기로 삼았다.

북한 김일성은 6.25 발발 3주전인 그해 6월8일  민주전선중앙위원회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의 요지는 '남북한이 총선거를 실시하고 광복 5주년을 맞아 8월15일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소집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침 2주 전 연막작전도 폈다.

해방후 6.25 동란이 터지기까지 이승만 정부내 정보기관은 북한내 젊은 이를 징발해 시베리아로 보내오 강제노동을 시킨다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은 한만국경으로 보내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이 아니라, 군사훈련을 시켜온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일부 젊은 이들은 중공군에 편입시켜 중국 대륙에서 장개석의 북부군과 전투경험까지 시켰다.

남침에 투입된 인민군 20만명의 3분의 1이 중공군 출신이다.

또한 8만명은 동란 발발 직전까지 압록강주변에 숨겨뒀다.

이처럼 북한의 남침계획은 오랫동안 치밀하게 짜졌다.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등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인민군은 1948년 2월에 인민군,경비대, 보안대를 창설한 이래  인민군 보병사단 (제 1,2,3,4,5,6,10,12,13,15)과 105 전차사단, 고사포연대및 3개의 경비여단(제 1,3,7 여단) 한만국경경비대, 보안대, 철도경비사단등 보병만 12만명에 이르렇다.

여기에 경비대 3만4천명의 지상병력및 탱크 242대, 자주포 176대, 122밀리 야포172문, 81밀리 포 1223문,70미리포 464문, 45밀리 포 586문, 이외에 YAK-9형과 IL-10형등의 전투기 211척, 조종사 2000명, 해군함정 30척, 육전대등 해군병력 1만명및 105의 양 전차여당으로 남침계획을 세웠다.

북한의 인민군 조직과 무기는 당시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북한은 이런 남침 준비가 끝나자, 유연하게 나왔다.

평화통일이니, 남북 총선거니를 들고 나오다가 북한내 고당 조만식 선생부자와 생포된 남로당 이주하, 김삼룡의 맞교환을 제의해왔다

이는 곧 위장전술이었고, 이 병력을 서서히 38선 주변으로 이동시켰다.

◇…북한의 구체적 남침 작전계획.

한국전쟁 전사등을 보면 인민군은 6.25 발발직전부터 병력이동 계획등이 상세히 전해진다.

1950년 6월 12일 북한군 2사단 함흥에서 화천으로, 18일에는 북한군 12사단 원산에서 양구로, 22일에는 북한군 5사단 나남에서 양양으로, 23일에는 북한군 3사단 평강에서 운천으로, 23일 북한군 4사단 진남포에서 연천으로, 23일  북한군 105 전차여단 평양에서 연천으로, 23일 북한군 1사단 남천에서 구화리로, 23일 북한군 6사단 사리원에서 개성으로 병력과 전차부대를 배치했다.

이어 예비병력을 제 2선에 구축해 해주에 7사단, 간성에 8사단, 회령에 15사단, 신의주에 13사단, 숙천에 10사단,평양에 17전차예비대,  766유격대를 간성에 대기시켰다.

6월18일 러시아어로 된 정찰명령 제 1호가 비밀리에 예하부대에 하달됐다.

북한 공산군 제 4사단 참모장에게  남한침입이 개시되기전 남한군의 배치상황을 조사하고 또 정확한 군사시설에 관한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기위해 정찰활동을 할것을 명형했다.

또한 서울로 통하는 방위선에서 한국군 저항의 중심지대룰 정찰하도록 지령했다.

6월22일에는 한글로된 작전명령 1호가 발표, 제1, 제 3, 제 4사단을 장갑부대를 선두로 서울을 향해 의정부 방면을 공격하고, 그 외 사단은 동부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또다른 사단들에게 주공격선을 중서부전선을 통한 서울공격을 위한 준비를 6월13일까지 마무리할 것도 하달됐다.
      
북한의 이 무시무시한 남침작전계획이 착착 진행되었지만, 남한은 고요와 평화속에 단꿈들에 빠져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지난 5.30 제2대 총선에서 무소속돌풍으로 소수여당노릇에 빠진 채 6월18일 제2대 개원으로 분주했다.

더구나 1950년에 접어들자 한국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어 가고 있었고,  생산고는 서서히 해방전보나 개선되고 있었다.

산업도 해방전을 육박하며 '이승만 박사' 찬양이 곳곳에서 쏟아지니, 정부는 안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6월17일 미국 델러스 국무장관이 방한했다.

그는 방한하자 마자 38선을 시찰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냈다.

입장문에서 그는 1주일 뒤 있을 6,25 발발과 정반대로 "공산군의 침략은 없을 것이다" 였다. 

델레스의 이런 발언이 당시 신문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조금이라도 갖고 있던 대북 경계심마처 풀어지게 했다.
 
당시  한국군의 전투병력은 육군에 있어서 보병 제 1,2,3,5.6,7,8사단과  수도사단을 합쳐 약 10만명이었고 장비는 장갑차 27대,105밀리.81밀리,60밀리 각 구경포 700문, 로케트 1900문에 그쳤다. 장갑차는 1대도 없었다.

이들 병력과 장비는 38선 불시배치로 8사단을 동해안 지구에,6사단을 원주와 춘천지구에,7사단을 동두천 방면에,1사단은 개성지구에, 수도사단은 서울에 배치됐다.

제 2사단은 대전지구에, 3사단이 영남지구에, 5사단이 호남지구등 제 2선에 자리했다.

해군의 경우 소형함정이 30여척이나 전투함을 없었고, 공군은 T6형 연습기 10대, L4형과 L5형 12대가 고작이었을 뿐 전투기는 없었다.

◇…인민군의 '폭풍'이란 암포로 불법 기습 남침...유엔군 참전결의.

 6월 25일 일요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새벽 4시에 중부와 서부에서 북한군의 침략이 일제히 시작됐다.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남침개시 암호를 하달받은 북한군은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였고 동시에 보전합동으로 38도선을 넘어 불법 남침하기 시작했다

동부지역은 이보다 조금 뒤진 반시간뒤에 공격을 시작하면서 38선 전역에서 포성이 작열했다.

국군 장병의 대다수는  주말외출을 하던 때라서,전 전선에서 국지적인 충돌도 없었다.

당시 공산군의 전면적인 남침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국민들은 새벽에 나오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 흔히 있던 남북한 군인들사이에서 벌어진 국지적인 38선 충돌로 여겼다.

전사와 기록을 보면 북한군의 육로 침입은 이렇다.

▶의정부 동두천 정면=인민군 3,4사단과 105전차사단 동원, 포 514문, 전차 86대,자주포 86대.

▶고랑포 정면=인민군 1사단, 포 154문, 전차 20대, 자주포 16문.

▶개성방면=인민군 6사단,포 154문, 전차 20대,자주포 16대.
  
▶옹진 방면=인민군 6사단의 일부와 제3경비여단.포 120문.

▶춘천방면=인민군 2, 12사단. 포 406문.장갑차 32대.

▶강릉방면= 제5사단및 제766유격대와 기타 지방유격대 약 6000명.포 54문.

해공로 남침도 동시에 남한을 향했다.

25일 아침 인민군 전투기는 서울 용산상공에서 총격을 가하더니, 다시 YAK 전투기 4대가 나타나 김포비행장을 폭격했다.

앞서 북한군 해군은 이날 아침 동해 금리와 옥계리 지방에서 1800명의 병력이  구축함의 호위아래 발동선 30척에 분승, 상륙했다.

동해안에는  임진원에서 범선 40척에 500명의 병력이, 삼척에는 바동선 20척에 약 800명이, 인구리에서 나머지 병력이 일제히 상륙했다.

침략개시 4시간후에 오전 8시30분 김일성은 반격이라는 구실아래 선전포고를 했다.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사력을 다했으나, 우세한 인민군의 화기와 강습을 저지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인민군의 공격이 치열해지자 대전에 주둔하던 제 2사단을 의정부와 동두천으로 급히 투입했다.

주공격선인 의정부. 동두천에서 인민군 3,4사단과 국군 제 7, 2사단이 대치하여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탱크와 장갑차 130여대를 앞세운 인민군의 공격에  국군은 힘든 전투를 해야했다.  
 
국군의 야포는 인민군 T34소련제 탱크앞에 무력했다.

제 7사단장 유재흥(劉載興. 후에 국방부장관)대령은 제 7사단을 눈물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7사단은 의정부 남쪽으로 후퇴했으나, 대전에서 올라간 2사단은 뿔뿔히 흩어져 분산된 소규모로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없어졌다.

이런 치욕은 205Km 모든  전선에서 일어났다.

전쟁발발 이틀 뒤인 27일 한국전쟁은 국제적 이슈로 등장했다.

이날 UN안보리가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을 결의하게 되고,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하는 유엔군 총사령부가 일본 도쿄(東京)에 설치됐다.

그러면서 일본에 있던 미국이 즉각 참전하게 된다.  

그무렵 동해안에 있던 제 766유격대의 지원을 받은 인민군 5사단이 산재해 대치중인 국군 8사단을 밀어내고 남하를 계속했다.

춘천방면의 인민군은 제 2사단을 투입해 국군 6사단을 공격했다.

◇…인민군의 최초 참패...개전초 국군의 투혼.

인민군 제 2사단은 승승장구하며 탱크 없이 거침없이 남하해왔다.

그러나  소양강선에 방어선을 구축한 제 6사단의 반격에  북한군 2사단은 크게 혼쭐이 퇴각하며 대치했다.

사단장 김종오(金鍾五) 대령이 이끄는 국군 6사단은 무기가 인민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지만, 3일 동안이나 춘천을 사수했다.

국군 6사단의 용맹을 안 인민군 12사단은 홍천으로 남하, 2사단과 함류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공격해왔다.

옹진반도에 있던 국군 17연대는  인민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자 LST를 타고 인천으로 철수했다.

고량포에 진치고 있던 국군 1사단과 11, 13연대는  사단장 백선엽(白善燁)대령의 지후 아래 임진간 남안의 문사에 방어진을 옮기고 대기중에 인민군 1사단, 6사단과 접전했다.

하지만 밀여드는 인민군 탱크와 장갑차 앞에 녹슨 야포나 로케트포는 무력했다.

포의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폭탄을 안고 적의 탱크로 뛰어들었다.

어떤 장병들은 인민군의 탱크로 올라가 망치로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넣고 자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밀물처럼 몰려드는 인민군의 공세를 막지 못했으나 국군은 후퇴하지 않았다.   

숱한 병사가 여기서 희생이 많았다. 탱크의 사격과 깔려죽고, 인민군의 기관총등에 희생된 것이다.

국군의 완강한 저항이 있은 전쟁 이틀 째인 26일 밤, 서울 북방에는 국군 정규적인 저항이 없었다.

27일 서울 시내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우리 국군이 반격중이라고 하고, 수도사수(首都死守)를 방송했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의 대다수는 믿어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

서울 북쪽 근교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포소리는 점점가까와 지고,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난민과 부상병 대열은 위험을 직감하게 했다.

수많은 시민이 피난민 대열에 끼어 남으로 남으로 한강을 넘었다.

이런 사이 북한 인민군 선발대가  서울에 들어왔으나 거의 격퇴됐다.
 
문제는 국군의 지휘계통이 지리멸렬해 산산히 무너져 부대가 흩어졌다.

제 1저지선에서 후퇴해 서울로 밀려든 수 만의 병사들이 거리를 메웠다.

미아리 고개 일대에 최종 방어선을 편 국군은 지탱하기 어려움을 알았다.

소련의 늪지에서 사용하게 만들어진 전차는  조그마한 개울이나 연못은 무시하고 넘었다.

주저없이 밀려드는 탱크로 인해 서울시민중 피난이 가능한 이는 모두 떠났다.

육군은 서울을 버리고 장기전에 대비할 것을 결정 병력의 한강도강을 명령했다.

서울의 300여대의 자동차를 바리케이트로 삼아 탱크의 한강 도강을 저지시키려고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참고자료 문헌=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 편찬회, 2005. 9. 10),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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