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가구를 옮기다가 큰 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방 하나를 창고로 만들기 위해 이방 저방에 있는 책장을 옮겼습니다.
작업 도중, 상단 절반에 책이 꽉 찬 어느 책장의 위치를 변경하기 위해 밀었습니다.
다른 식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책장을 낑낑대고 밀다가 갑자기 책장의 무게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상단에만 책이 들어 있고 아래는 비어 있어 무게중심이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하면서 저를 덮친 것입니다.
그 바람에 제 온몸에는 멍이 들었습니다.
팔뚝은 책장에 쓸려 껍질이 벗겨졌고 엉덩이 부분은 큰 멍이 나 있었습니다.
오른쪽 발등도 찧었는지 아픕니다.
이 일을 겪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이제 무엇을 혼자 힘써서 할 나이는 아닌가 보다 하는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크게 느낀 것은 <무게중심>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고가 난 원인은 책장의 무게중심이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힘을 가하자 무게중심이 책장 안에서 밖으로 이동하면서 넘어져 저를 덮친 것입니다.
저는 <무게중심>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도 무게중심이 있습니다.
삶의 무게중심이 안에 있는 사람은 안정적이고 편안한 반면, 밖에 있는 사람은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삶과 무게중심>에 대해 언급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입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3분법을 차용하여 행복을 분석합니다.
강용수 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보면 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인생을 향유하는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재생적 즐거움. 먹고 마시는 일, 소화, 휴식, 수면 욕구 등. 둘째, 육체적 즐거움. 산책, 달리기 등 각종 운동, 사냥, 전쟁 등. 셋째, 정신적 즐거움. 사유, 독서, 예술, 명상, 철학 등. 쇼펜하우어는 세 가지의 즐거움을 모두 알았다.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을 챙겼고 음악을 즐겼다. 그리고 독서와 철학을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았다. 그는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소홀하게 하지 않도록 균형을 갖췄다’
저자는 세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고 해도 인생을 향유하는 데는 사람마다 힘을 주는 무게중심에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첫째, 평범한 사람. 무게 중심을 <바깥>에 두고 만족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소유물이나 지위, 이성과 자식, 친구나 사교계 등에 의존하기 때문에 만족은 외부에 의존한다. 둘째, 정신적인 수준이 보통인 사람. 실용 학문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무게 중심이 <밖과 안>에 걸쳐 있다. 식물학, 광물학, 물리학, 천문학, 역사학 등을 통해 대부분 즐거움을 얻지만, 가끔 취미로 그림 연습을 하면서 불만족을 채운다. 셋째, 정신적인 능력이 탁월한 사람. 가장 고상한 향유 방식을 통해 무게 중심을 완전히 <자신 안>에 둔다. 사물의 존재와 본질 자체에 관심을 갖고 예술, 문학, 철학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만들어 간다.’
이해가 가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핵심은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고상한 욕구가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여가 시간에 이상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해 무료함에서 빠져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곧 현실에서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사람을 속물로 칭한다’
속물의 기준이 ‘여가 시간을 활용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은 여가 안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여가를 갖기 위해 여가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말합니다.
즉, 노동의 목적을 <여가>라고 말하며 행복을 <여가>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이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유능함을 펼칠 수 있는 삶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은 <여가>를 뜻하고 ‘유능함을 펼친다’라는 것은 ‘사물의 존재와 본질 자체에 관심을 갖고 예술, 문학, 철학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원래의 논의로 돌아오면, 사람은 삶의 무게중심을 ‘바깥에 두는 사람’, <밖과 안>에 걸쳐 있는 사람, <자신 안>에 두는 사람 등 세 부류로 나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를 계승한 쇼펜하우어의 견해에 따르면 세 번째 부류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