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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산 동학여당의 천주교 투탁 자폐사건(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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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한산지역에서도 동학이 크게 일어 한산읍성이 점령하였으나 정부군의 진압으로 동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여당(東學餘黨)이 천주교 등의 종교집단에 투탁하여 그들은 종교를 이용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한편 변혁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투탁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자폐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5.교민의 자폐 뮈텔주교와 담판

 

1) 외무대신과 법부대신 협의

 

1895년 8월 6일 자로 외부대신은 법부대신과의 자폐 사건에 대한 협의를 거치면서 한산지역 교민의 자폐를 비롯하여 최근 인근지역 5~6개 지역도 같은 사례가 보고된 바 있어 이미 프랑스공사관에도 통보하였다고 회신했다.

 

조선교구 뮈텔주교와 담판하여 각처의 선교사에게 신칙하고, 교민을 비호하고 관청의 정사에 간여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으니 각 읍에 지시하여 서학을 빙자하여 처벌하여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교민은 처벌하여 자폐를 막도록 회신하였다.

 

 

2) 법부대신의 한산군수에 대한 지시

 

한산군에 갇혀 있는 김선재(金善在)와 서가량(徐可良)의 죄상을 다시 조사한 보고서를 접수한즉 “지난번 보고에는 효수하여 경계함이 옳다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보고에는 용서하기를 청하니 어떠한 이유로 참작이 있는지 실로 공평하게 시행하기 어려우니 해당 범인이 지난 습관을 고치지 않고 오응노(吳應老)의 가산을 무수히 없애고 몇백량을 억지로 빼앗고, 관아의 앞뜰에서 발악하였다”

 

“하니 죄의 실상이 용서받기 어려운지라 해당 범인은 대명률(大明律)에 의하여 남의 기물을 버리고 훼손하여 장물을 돈으로 따지면 절도에 준하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유생으로 수령에게 발악하는 경우에는 장 100대, 유배 3,000리(지금은 종신형)에 해당하는 형률을 적용하여 한산군(韓山郡)에서 처분한 뒤에 정황을 즉시 보고하라”

이같이 지령하였다.

 

 

3) 법부대신의 홍주부관찰사 지시

 

한산의 도적 김선재와 서가량을 나란히 종신 징역에 처했는데 상세히 조사하니 김선재는 오응로의 집으로 동행했을 뿐 포악한 짓을 돕지 않았다는 홍주부의 보고에 김선재가 따른 것이 분명하면 홍주부가 가벼운 쪽을 따라 형률을 적용하여 처분하고 징역처소도 설치하라는 법부대신의 홍주부에 지령을 보냈다.

 

그 후 홍주부관찰사는 김선재에 대하여는 징역 3년에 처하고 서가량은 종신 징역에 처분하였다고 결과 보고를 하였다.

 

 

6 한산군수에 대한 면직처분

 

1) 내부대신 면직 청원

 

1895년 11월 3일 자로 내부대신은 한산군수 백낙형(白樂亨)을 재직 시 교민(敎民) 김선재, 서가량 죄인을 임의로 방면한 죄가 있어 압송하여 죄를 심리하였으며, 그 죄를 물어 한산군수 직을 징계하고 면직할 것을 총리대신 김홍집에게 청원을 하였다.

 

 

2) 내각 면직 결정과 사면

 

내각은 각의를 열고 1895년 11월 7일 자로 한산군수 백낙형을 면직 처리하였다.

 

그 후 1897년 3월 18일 자로 징계 사면을 통하여 복직되었고 1899년 중추원심의관으로 임명되어 1905년6월까지 관직을 유지하였다.

 

 

7. 교민(敎民) 구명 활동

 

1) 구속된 교민 수감생활

 

1896년 5월 20일 퀴를리에 신부의 보고서를 보면 5∽6개월 동안 한산이나 홍주 감옥에 교우들이 갇혀있었는데 3명은 홍주관하 21개 지방으로 끌려다니며 매를 맞았고 보고하였다.

 

3명 중에는 김선재와 서가량으로 추정된다. 구속된 교민에 대한 구명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뮈텔 주교가 사건의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프랑스공사관 르페부르 서기관을 만나 부탁하였고 공사관 서기관은 조선 정부의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에게 사건의 선처를 요청하였다.

 

 

조선교구 뮈텔 주교와 프랑스공사관 측의 노력으로 이 두 사람은 1여 년이 지나 석방되었다. 그 후 뮈텔 주교는 사목 방문 중 공주에 들러 석방된 김선재를 직접 만났다.

 

1897년도에도 다시 공주를 방문했을 때 뮈텔 주교는 김선재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주었다. 공주의 강미지아가 이곳으로 뮈텔 주교를 보러왔고 김선재는 견진성사를 준비했다.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고 있으며, 음력 10월부터는 수감자들에게 지급되는 식량 9량도 지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옥에서 나온 서가량도 강마지아의 집에서 대세를 받고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두 번째로 그를 버렸고 6세의 아이는 강마지아가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성영회에 맡기기로 했다.

 

2) 석방 후 생애

 

석방된 김선재는 진실한 신자가 되었고 서가량도 대세(代洗)를 받아 신자가 된 후 사망했다. 서가량의 가족은 강마지아가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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