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은 늘 낮은 데서 먼저 누워 세상의 무게를 견딘다 말보다 깊고, 슬픔보다 먼저 젖는다 우리가 걷는 땅 아래엔 말 없이 흘러내리는 울음이 있다 한 번도 닿지 못한 뿌리들이 조용히 엇갈려 스며든다 분단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입술에서 나왔지만 그 여운은 흙 깊은 곳에 스며 강물의 길을 바꾸고 지붕들은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내 시선은, 가장 낮은 틈에 머문다 가장 깊이 파인 골짜기에서 먼저 피어나는 꽃을 철조망이 휘어진 자리마다 돌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순한 생명을 흙은 늘 누구의 선도 기억하지 않는다 비는 구분 없이 젖게 하고 바람은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다 통일은 지도 위에서 이뤄지는 약속이 아니라 흙이 매일 보여주는 일처럼 서로 스며들고, 엉기며 어디서부터였는지 잊히는 일이다
2025-12-26 박강현 시인(한국문인협회 서림지부 회원)
시퍼렇게 부어오른 눈탱이를 흙으로 가리고 짱뚱어 한 쌍이 갯벌을 기어오른다 서로의 멍든 눈이 안쓰러운지 말없이 눈만 껌빡인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 미안하다 말없이 암컷 눈탱이에 갯벌 한 줌 발라주는 수컷 농게 한 마리가 엄지발을 들고 흉을 보고 있다 둘은 갯벌 자기집으로 들어가고 갯골에 물이 들어오더니 부부싸움 내외의 집을 살그머니 덮어주었다 오늘 또 짱뚱어 집 막내가 태어나 식구 하나 늘겠다
2025-12-08 최명규 서천문화원장(대한민국예술명인)
높은 빌딩, 그 가장 높은 끝에서 여름을 떠나보내는 매미의 울음이 바람 속에 가늘게 흩어진다 저 매미는 외로움을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토해내고 있다 이 여름 끝자락을 붙잡으려는 아니,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깊어서일 것이다 제 짝을 찾지 못한 채 못내 아쉬움 품은 목청이 오늘따라 더 절절하다 구애의 소리 속에 스며 있는 노총각 매미의 처량한 생을 보라 그 울음의 마지막 고개를 넘을 즈음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도시의 유리창을 타고 스며들고 햇살은 빛을 덜어내어 하늘을 한층 멀게 한다 구름 그림자는 골목을 길게 끌며 발끝에까지 내려와 머물고 가을은 아직 문턱에 있으나 그 그림자는 이미 내 마음 깊숙이 내려와 여름의 뜨거운 숨결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지우고 있었다
2025-11-30 박강현 시인(한국문인협회 서림지부 회원)
제 몸을 뒤집는 강물은 완강했다 찰랑거렸거나 차갑거나 단단했던 밀어를 계곡 밑으로 흘러보낸 지난여름 숲은 초록빛 뿌리의 연서를 바람에 실려 보냈으나 강물은 마침표도 없이 깊어졌다 행과 연의 문장들이 물결을 일으켜 연서는 젤리처럼 부드러워졌고 누군가 던진 돌에 파문의 집을 짓기도 하는 하류의 강물은 짐긴 지퍼의 견고함을 기억하고 싶어 세상에 연서를 뚸워 보내는 것이다 흘러야하고 쓰여 져야 하는 시대의 무성한 물줄기의 물음을 강은 펼쳐 놓았으므로 어둠에 구멍을 뚫은 별들이 쏟아질 때 밤의 시간은 휴식으로 유폐됐을 것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익어갈 것이라고 온 몸으로 다독이는 아침은 윤슬로 수천(水川)의 귀를 열어 강물의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야할 시대의 낮은 소리를
2025-11-23 김도영 시인(한국문인협회 서림지부 회원)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려오면 부지런한 아낙네들 바쁜 손을 움직이며 들썩인다 여리여리하니 작은 모종들 두 개, 세 개씩 나뉘어 고랑 밭에 심어지고, 하늘이 심술부릴세라 굽어진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밭고랑에 입맞춤을 한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바구니에 모종들은 얼굴을 내밀고 어서 나를 데려가라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른다 넓은 밭이 조금씩 조금씩 초록의 물결로 들어차면 시원한 빗줄기 한 바가지 힘차게 뿌려 주기 기다리며 하늘 한 번, 땅 한번 병아리 고개짓이 남사당패 상모 돌리듯 한다 여린 잎들이 가득한 밭에는 고라니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뛰어다니고 고라니를 쫓는 강아지 소리 비 내리는 고랑 밭은 어느새 새싹들의 아우성에 나뒹굴며 아낙네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2025-11-15 강정옥 시인(한국문인협회 서림지부 회원)
설날 아침, 갓 지은 밥 냄새 사이로 묵은 기침처럼 침묵이 흘렀지요 어머니는 조용히 나물을 무치고 나는 옆에서 국을 데우며 서로의 손등만 바라보아죠 하고픈 말은 어느새 젖가락 끝에 걸려버리고 웃음은 익은 나물처럼 간을 맞추다 사라졌습니다 아이의 한마디, "할머니랑 엄마는 왜 말 안 해 ?" 그 순간, 깊게 쌓인 눈 위에 햇살이 스며들듯 오래된 울타리 하나가 스르르 무너졌습니다 가족이란 마음에 둘러친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기까지 참 많은 계절을 견뎌야 한다는 걸 부모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서로 다르되 함께인 것, 그게 가족이라면 울타리란 언젠가 조용히 넘어설 수 있는 마음의 언덕이겠지요
2025-11-11 양화춘 시인(한국문인협회 서림지부 회원)
소리 없이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조그마한 생명이 숨을 쉬며 허리를 편다 기차타고 내린 서천역에서 버스타고 달려온 송석 바닷가 질펀한 갯벌에서는 갈매리떼 끼룩끼룩 즐겁게 노래부르고 숨구멍을 내밀며 올라오는 동죽사이 무지개 되어 내려오는 물총들 밀려가는 썰물과 함께 바구니에 갈고리를 손에 든 아낙네들 질펀한 갯벌에 한 자리씩 자리하고 연신 움직이는 눈동자와 손들 한 손엔 갈고리를 들고 또 한 손에는 뻘 속에 보이는 동죽을 줍고 조금씩 쌓여가는 바구니를 물길에 흔들흔들 흔들어서 망태기에 넣어 넓은 갯벌 한자리 내어준다 어디선가 들리는 노랫소리에 저마다 흥얼거리며 힘든 한숨을 내뱉고 외지에서 온 객을 쳐다보는 눈에서는 서천의 보물 동죽을 자랑한다 한번 캐보라고 권유하는 손에 이끌려 들어간 갯벌에는 생명이 숨쉬고 우주가 빛나고 내 삶이 평온하다 하나씩, 둘씩 손에 들어오는 쾌감에 나그네도 아낙네도 갯내음에 힘듬도 노랫소리 되어 서천갯벌에 살포시 자리 잡고 내려앉는다
2025-10-31 강정옥 시인(한국문인협회 서림지부 회원)
허공을 밟고 선 바오밥 나무를 보았다 무게 중심이 아래쪽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잎 대신 줄기로, 줄기 대신 텅 빈 몸으로 중심을 잡고 선 나무 겹겹이 쌓인 모래바람으로도 제 속을 채우지 못해 죽은 자의 의식을 꽉 물고 무덤처럼 능선을 잡고 있었다 모래바람으로 휘어지는 허공은 능선과 나무사이 산 자의 족적을 찍듯 넓힌 숨을 한 줄씩 띄우면 말 없는 말들은 걷는 자리마다 푸르게 쟁여지는 생 그늘은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모래바람으로 걷는 법을 아는 나무들 햇빛을 등뼈에 새긴 잎들은 칼날처럼 번득였고 어느덧 모래바람은 바오밥 나뭇가지에 죽은 자의 노래처럼 걸려있었다 맨발로 바오밥 나무의 그늘을 옮기는 허공은 한 음도 놓칠 수 없는 가지런한 모래바람의 리듬을 조율하며 먼 길을 걷는 중이었다
2025-10-17 김도영 시인(한국문인협회 서천지부 서림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