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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마담 프루스트와 특별한 날의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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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s à l’instant même où la gorgée mêlée de miettes de madeleine toucha mon palais, je tressaillis, attentif à ce qui se passait d’extraordinaire en moi. Un plaisir délicieux m’avait envahi, isolé, sans la notion de sa cause.(그러나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을 스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전율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무언가에 온 정신을 집중한 채.)”(Marcel Proust(마르셀 프루스트)의『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기억은 무언가를 맛볼 때 되살아난다고 합니다. 일명 프루스트 효과, 감각의 기억 이론이라 일컬어집니다. 저에게도 그런 맛이 있습니다. 큰길 휴게소의 고구마튀김과 닐 다방의 깨죽이 그렇습니다. 맛은 기어코 다섯 살 남짓의 어린이를 빚어 둡니다. 영화 《Ratatouille(라따뚜이)》의 미식 평론가 Anton Ego(안톤 이고)처럼, 한입만으로도 쏟아지는 기억에, 파노라마에 말문을 닫고 그저 머물고 싶어집니다.

 

울퉁불퉁하다 못해 깨진 곳이 발에 걸리고야 말던 사거리에서의 걸음과 바람을 타고 부는 밀물의 냄새, 점멸할 듯 흐린 신호등 위로 작열하는 석양, 그리고 내 이름을 담아내던 목소리. 설명하자면,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

 

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때로는 기억이 상황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미 익히 체감해 왔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오감은 진실에 더 가까이 닿아 있어, 쉽게 조작되거나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오감은 기억의 불완전함을 보완해 줍니다. 그중에서도 ‘맛’은 가장 진실한 감각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을 직접 심어줄 수는 없지만, 기억이 될 ‘맛’을 건넬 수는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케이크를 굽습니다. 생일이나 기념일, 크리스마스,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도 케이크를 굽습니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려 케이크를 굽는 일은 단순한 요리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에 가닿을 ‘맛’을 빚어내는 조용한 의식이며,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작고 단단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욕심인지, 포부인지, 낭만인지, 혹은 허상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다섯 해를 이어 온 이 작은 행위에는 저만의 철학이 깃들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주어진 가족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가족에게만 건넬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의 모양과 향, 그리고 언젠가 기억이 될 맛이, 바로 그 케이크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산딸기가 적셔 든 손가락만큼이나 붉도록, 귀 끝이 물들어가듯이 — 케이크의 층을 따라 새콤달콤하게 번져가는 빅토리아 케이크. 깡깡 다져진 마음 귀퉁이에서도 기어이 부풀어 오르듯이 — 작은 것이 끝내 솟구치고야 마는 미니 머핀 케이크. 몇 번의 용기와 주저가 포개진 연애편지의 봉투가 열리길 기대하듯이 — 시트를 굽고, 촉촉해지길 기다리는 제누와즈 크림 케이크. 며칠을 고민하며, 하고 싶은 말과 전할 말을 골라내 고백하듯이 — 몇 번이고 체에 걸러내어 뜨겁게 구워내는 바스크 치즈 케이크. 하염없이 빠지고, 쉼 없이 빠져들고, 어쩔 도리 없이 빠져 있듯이 — 달콤함 속에 고요히 머무는 래밍턴 케이크. 이토록, 사랑이 자리한 케이크.

 

이 모든 케이크에는 말하지 못할 장면의 겹, 감정의 결, 기억의 층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케이크를 구울지 그리는 것부터 기념일의 자세가 되었습니다.

 

라탄 바구니 위의 달걀에 물이 맺혀가기 시작하고, 말랑해진 버터로 인해 나이프에 얼룩이 지고, 밀가루와 설탕이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어우러지고, 뜨거운 김을 내며 오븐은 반짝이고, 온 집안에는 케이크 굽는 냄새가 요동을 칩니다.

 

부드러운 크림을, 상큼한 마말레이드나 잼 그리고 콩포트를, 고운 코코넛 가루를 덧입힙니다. 가끔은 투박한 모양새가 꼭 제 마음을 밉보기라도 하는 것 같아, 자잘한 컨페티처럼 스프링클을 흩뿌립니다.

 

아무리 투박하더라도, 제 마음이니 누가 가져가기라도 할까 싶어, 하얀 상자에 케이크를 담아서는 하늘거리는 리본으로 동여맵니다.

 

둘러앉은 기념일 저녁입니다. 케이크의 초는 몇 번이고 땀을 닦아냅니다. 수고로움을 달래주듯 냅킨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포크를 쥡니다.

 

폭신한 케이크가 입안에서 사그라집니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보입니다. 이것이 욕심인지, 포부인지, 낭만인지, 허상인지는 —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녹아내린 곳은 입, 스며드는 곳은 마음, 심어지는 곳은 기억이길 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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