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부터 시작될 인구절벽 현상이다. 당장 내년부터는 노인인구 비중이 유소년인구의 비중을 크게 상회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아기 울음소리가 끊기고, 노인인구가 넘쳐나는 “실버사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사회복지분야에는 다양한 해결과제가 있지만, 어떤 문제도 노인문제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늙었다”는 말은 금기어가 되었다.
100세 시대를 산다고 말하면서도, 남녀노소 누구나 동안피부에 몰입하는 현상이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란 “단순히 신체적으로 늙고 나이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인이란 말이 실패자나 뒤쳐진 사람, 무력한 사람의 동의어가 된 것이다. 고민 끝에 나온 “어르신”이라는 허울뿐인 말도 없던 존경심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노인은 곧 지혜 있고 성숙한 사람이라는 도식이 깨어진지 오래고,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라는 냉혹한 평가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과도한 경쟁사회를 살면서, 약육강식의 법칙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복지’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welfare”는 ‘well(잘)’이란 말과 ‘fare(살다)’라는 말의 합성어다. 즉, 복지란 “잘 사는 것”이요, “행복”이며, “평안”이다. 결국, 노인복지란 노인이 잘 살도록 돕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잘 사는 것일까? 충분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고, 주거공간이 있는 것도 잘 살기 위한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의식주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잘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의식주는 복지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 사는 것일까?
빅터 프랭클의 <의미를 찾는 인간>은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프랭클은 사람이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은 자신에게 살만한 의미가 있다고 느낄 때라고 말한다. 이런 깨달음은 프랭클이 나치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다.
사람은 의미를 찾을 때,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평안한 환경 속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면, 죽음을 향해 곤두박질 칠 뿐이다. 삶의 의미란 존재의 의미를 느낄 때 생긴다. 내가 필요한 존재라고 느낄 때 내가 살만한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고 느낄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경청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다. 폴 틸리히는 “사랑의 첫 번째 임무는 귀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흔히 복지라는 말을 들으면, 라면상자와 구호품을 쌓아두고 단체사진을 찍는 광경을 떠올린다.
복지라는 말의 참뜻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말대로 사랑은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노인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탁상공론이 아닌 현장에서 노인들의 삶을 직접 보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그분들에게 물어야 한다. 우문현답이라지 않던가!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란 뜻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노인들을 복지의 대상이자 객체로만 여기지 않고, 주체로 여기는 일! 일방적으로 도움 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닌, 자신의 삶을 결정한 자율권을 가진 존재로 여기는 일, 그래서 삶의 방식에 대한 의견을 묻고 결정하도록 돕는 일! 그것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고령화 사회 진입”이라는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화 앞에서 미래를 결정할 ‘골든타임’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을 놓치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