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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가을이 묻은 열매: 홍옥과 홍시, 은행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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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을은 참 버겁습니다. 따뜻함이 채 식기도 전에 차가워집니다.

 

차라리 쌀쌀함이라도 느낄 틈이 있으면 덜할 텐데, 그럴 새도 없이 추워져 버리는 모양새가 쌀쌀맞기까지 합니다. 찰나에 불과한 정오의 볕을 내어줄 뿐, 냉기와 맞부딪혀야 하는 가을이 버겁습니다.

 

그럼에도 가을이 싫지 않은 이유는, 그 버거움을 마땅히 견뎌낼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꽃을 버림으로써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고결함이, 바로 그 이유를 대신 증명해 보입니다.

 

조막만 한 노란 꽃잎 대신 소담하게 맺히는 감이라든가, 매끄러운 하얀 꽃잎 대신 화사하게 맺히는 사과라든가. 포슬한 노란 꽃줄기 대신 은은하게 맺히는 은행이라든가, 갸름한 하얀 꽃줄기 대신 그윽하게 맺히는 밤이라든가. 꽃을 잊고서 열매를 잇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있자면, 이 계절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장날에 늘어선 좌판 위는 이미 가을로 물들었습니다. 주홍색 감 한 알은 홍시이며, 선홍색 사과 한 알은 홍옥입니다.

 

엷은 봉투 안에는 연둣빛을 내는 수십 개의 은행알이, 노란 바구니 안에는 고동빛을 내는 수십 개의 밤송이가 가득합니다.

 

서늘함에 두껍게 옷을 껴입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서, 탐스럽게 일렁이는 가을빛에 샘이 납니다. 서늘한 가을이 사람들의 생기마저 앗아간 건 아닌지, 문득 심술을 부립니다.

 

좌판 뒤에 늘어진 나뭇자락들은 열매를 내어주고도, 겨우 가진 몇 개의 잎들마저 좌판 앞에 쏟아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잎들을 바라보며 가을에 물들어갑니다. 나무가 흩뿌린 빛깔들은 손차양에 한동안 가려지지 않다가, 이윽고 손차양 위로 내려앉습니다.

 

그 덕에 생기 잃은 얼굴은 붉게 물듭니다. 손 위의 빨간 잎 탓인지 숭고한 나무의 자세에 부끄러워진 탓인지는 알 턱이 없습니다.

 

결국 가을빛을 한데 모아 주방에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부엌 창으로 드는 석양조차, 그 빛 앞에서 산산이 무너지고 맙니다. 버들가지 채반 위에는 주홍빛 홍시가 나란히 자리합니다.

 

이 부드러운 홍시는 얼마간의 볕을 쪼일 것입니다. 몇 번이고 볕은 홍시를 두드리고, 매만지고 끝내 그 속으로 깊이 스며듭니다.

 

가을 정오의 태양은 모두 홍시 안에 든 채로, 조용히 물러갑니다.

 

한때 노랗고 여린 잎들을 지키던 네 장의 꽃받침은, 홍시가 익어가는 동안 서서히 말라갑니다. 마른 네 장의 꽃받침은 이제 말캉해진 홍시를 괴고 있습니다. 찬물에 베이킹소다를 풀어 사과를 닦습니다.

 

잗다랗고 하얀 꽃이 진 자리에, 이토록 커다랗고 붉은 폐과 하나가 열리기까지 몇 잎의 바람을 맞았을지, 울퉁불퉁하고 두터운 나무 기둥을 떠올립니다.

 

그 기둥이 이고 있던 것은 얇은 가지와 가벼운 이파리, 작은 꽃과 알찬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짊어진 건 생의 무게였습니다.

 

사과를 얇게 썰어두고, 팬에 버터를 녹입니다. 고소한 향이 퍼질 무렵, 팬에 사과를 몽땅 올려둡니다. 은은하게 익혀가며 소금 한 꼬집과 메이플시럽, 시나몬 파우더를 넣습니다. 고루 섞어가다 보면, 창에 김이 서립니다.

 

둥그스름하고 뽀얀 은행알을 골라냅니다. 엷은 봉투를 열면 고릿한 냄새가 올라옵니다. 그 냄새를 2억 년의 시간이 빚은 향이라 생각해 봅니다.

 

인생(人生)이 그러하듯 목생(木生)도 전생을 놓고 보면 은은하거나 유순하기보다, 퀴퀴하고 텁텁했을 텝니다. 간혹 누르스름한 껍데기가 묻어 있는 은행알은 반질반질 닦아냅니다.

 

옥구슬을 굴리듯, 가제 수건으로 2억 년의 시간을 닦아내는 것입니다. 비슷한 모양의, 비슷한 크기의 은행을 골라 꼬치에 알알이 끼워줍니다.

 

그리고는 소금을 솔솔 뿌려가며 구워줍니다. 2억 년의 세월을 품은 은행알도 이렇게 쉬이 익어가는데, 고작 백 년 남짓한 인생쯤이야 그리 버거울 리 없습니다.

 

소금물에 담가둔 밤을 건져내 하염없이 밤껍질을 벗겨냅니다. 보늬만 남겨낸 밤, 몇 개는 영글어 단단하고, 또 몇 개는 야위어 주름졌습니다.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밤을 하루 꼬박 담가 떫은맛을 빼냅니다.

 

그리고 서너 차례 뜨거운 물에 삶았다가 차가운 물에 식히기를 반복하며, 남은 잔털과 굵은 심지를 제거합니다. 하나하나의 밤은 손끝에 꽤 오래 머뭅니다.

 

정성은 언제나 손끝보다 먼저, 시간의 곁을 맴돕니다. 물과 흑설탕, 럼주를 넣고 밤을 푹 졸입니다. 졸아드는 냄비 속에서 가을이 서서히 눌어붙습니다.

 

차갑고 서늘하며, 뾰족하고 메마른 것에 정성을 들이면, 따뜻하고 다정하며, 찬찬하고 노긋한 답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가을에 묻습니다. 냄비는 끓어오르고, 집은 달큰히 물듭니다. 가을빛은 이제, 바람에도 바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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