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n뉴스=김연희 기자] 해방 후 한반도에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일제에 협력하며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경찰로 재탄생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사람들은 또다시 경찰의 강압적인 쌀 공출에 시달리며 배를 곯아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최대 적이었던 일본제국. 그 식민부역자들을 다시 기용한 미군정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배고파 죽겠다!” “쌀을 달라!” 1946년 10월, 대구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쌀이 아닌 경찰의 총탄이었다. 우리 기억에서 지워진 대구의 ‘그날’과 미군정, 그리고 친일 경찰의 연결고리를 <역사저널 그날>에서 살펴본다.
“배고파 죽겠다!” “쌀을 달라!”
▶ 해방 후 최초의 ‘민중 봉기’는 대구에서 시작됐다
일본 패망 후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은 1945년 10월 ‘쌀의 자유판매’ 정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매점매석이 횡행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찾아오자 미군정은 다음 해 1월 일제강점기와 같은 ‘쌀 공출’을 단행한다. 불과 5개월 만에 뒤바뀐 정책으로 인해 혼란은 가중되었고 해방 1년 후 한반도는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를 맞게 된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의 부녀자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턱없이 부족한 식량 배급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노동자들이 총파업 시위를 벌이며 가세하자 대구 시내는 수천 명의 열기로 끓어올랐다. 무자비한 경찰의 총탄에도 불구하고 이날 대구의 함성은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전국 300만 명의 봉기를 만든 폭풍, 대구10월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본다.
▶ 미군정의 정치 고문, 버치가 남긴 ‘미군정의 진실’은?
해방 후 조선인들에게 가장 큰 민족 과제로 떠오른 것은 바로 친일 청산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 상륙 다음 날 ‘조선의 일본인 관리들을 잔존시킨다’는 폭탄선언을 하는 등 한국인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펼친다. 미군정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 관료와 경찰들까지 통치에 적극 활용한다. 당시 고위 경찰의 82%가 조선총독부 출신자에 이를 정도였다. 수많은 한국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왜 친일파를 재활용하려 했던 걸까?
201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발견된 일명 ‘버치 보고서’에 당시 미군정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숨어있다. 미군정 최고사령관 존 하지의 정치 고문이었던 버치 중령이 한반도에 머물며 남긴 메모들에는 과연 어떤 진실들이 담겨 있을까? 버치 보고서를 최초 발굴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직접 소개한다.
▶ 지워지지 않는 상처, 대구10월사건
74년간 우리 역사에서 잊힌 대구10월사건. 이념적 편견과 오해로 유족들에게 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까지 이어지는 항쟁의 도화선 ‘대구10월사건’, 그리고 ‘친미’ 경찰로 다시 태어난 친일 경찰 이야기는 2월 18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 1946년 대구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