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함께 납북한에 미소 군정체제들어서며 요인들 환국.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이인권이부른 가요 '귀국선'이 당시상황 표현.
-북쪽에 김성주(김일성)체제만들자 미군정 이승만 귀국도와.
--미군정, 친미주의자 이승만에 우호적vs 임시정부부정하며 김구 김규식 이시영 장준하등 냉대
.4.15 총선과 함께 우리의 정치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2.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에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귀국선 고동 소리 건설은 크다
3.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얼마나 싸웠던가 우리 해방을얼마나 찾았던가 우리 독립을흰 구름아 날려라 바람은 불어라귀국선 파도 위에 새 날은 크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얼마나 그렸던 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 가 태극기깃발을....몇번을 울었던 가 타국(他國)살이를, 몇 번을 불렀던 가 고향노래를..’.하는 노래가 국민의 애환을 대변해줬다.
◇…손로원선생의 귀국선, 가슴벅찬 당시 풍경.
그 당시 손로원 선생이 노랫말을 짓고, 그 노랫말에 이재호 선생이 곡을 붙여 이인권 선생이 부른 귀국선(歸國船)이란 노래다.
손로원 선생은 우리가 잘아는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홍콩 아가씨(금사향)님 계신 전선(금사향), 봄날은 간다(백설희)를 지은 분이다.
이 노랫말은 그가 35살 때 썼다.
훗날 이 노래에 대해 평론가들은 노래가 구슬프면서도 무조건 단조가 아니기 때문에 노래를 들으면 찡하면서도 뭔가 느껴지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욱이 노래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북받치고 터질듯한 감정이 아니라가슴 깊이 울려나는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소개한다.
이노래가 나온 역사적 배경은 역시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 해방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사흘 뒤, 나가사키에 또다시 한 발이 더 떨어지면서 일본은 결국 15일, 일본은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해 길고긴 압제가 막을 내렸다.
36년간 지속되던 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나자, 먼저 일본의 억압을 반대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이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수많은 동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만주와 중국, 혹은 연해주(지금의 사할린스크)에서 돌아오는 국민들, 그리고 일본이나 일본의 해외 점령지들에서 살아 돌아오는 사람들이다.
이가운데 일본의 잔학한 압제를 피해 떠난 사람들도 있었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기약없는 시절을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혹은 강제징용을 당해서 죽음과 맞대어 살다.
살아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드디어 내 조국을 찾았다. 독립됐다. 이제는 당당한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었다고 외쳤다.
기쁨으로 웃으면서, 눈에는 눈물을 달고 ㅏ슴 벅찬 감격에 휩싸여 그립고 그리운 고국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귀국대열에 섰다.
하지만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서만주지역 등, 육로를 통해 귀국할 수 있는 지역을 빼고는 몇달이고 기다렸다가 배편을 이용해서 귀국했다.
이후 남북한의 신탁통치를 두고 벌어진 미-소의 신경전과 민족진영의 분열,이후 벌어진 38선 경계선 설정 등 역사가 있었지만 그 때 만큼은 가슴 벅찬감격뿐이었다.
◇…이승만·김구·김규식·김성주 등 요인(要人)들의 환국
독립을 위해 해외에 망명하여 피눈물나는 분투를 거듭하던 독립지사들이 해방과 함께 꿈에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았다.
조국광복에 시름에 잠겼던 그들도 밝은 표정들이었다고 언론은 전했다.
이승만 박사와 백범 김구선생의 귀국 얘기는 당연히 톱기사였다.
이 박사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그해 10월18일이었다.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 등 임시정부요인들은 늦 가울인 11월에 환국했다.
이 박사가 귀국하기 나흘전에는 소련군대의 소령계급장을 단 김성주(김일성의 본명)가 평양시 군중대회에 나타났다.
해방당시만 해도 대개의 국민에게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거의 몰랐다.
일제하에서 사슬을 풀고, 민족해방을 맞이하자 백의민족 고유한 민족문화의 유구한 역사의식, 그리고 숨겨져온 전설적인 독립운동지도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드러났다.
지식인들에게는 백범 김구선생이니, 이승만 박사니. 서재필 박사니. 이시영 선생같은 이름이 낯설지 않았으나,일반 국민, 그것도 청소년들에게는 거의 생소했다.
해방의 감격에 휩싸인 8월, 9월이 가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10월이 왔다,
해방과 함께 대도시의 거리는 인파가 쉴세없이 오갔지만, 무엇하나 정비된 법과 제도가 없자 혼란상만 더해갔다.
제각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갈길을 찾기에 발버둥친 애국지사들은 잠을 쉽게 청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미군청정의 도음 환국과 기자회견
외국에 망명해 있던 독립지사들은 하루바삐 해방된 조국에 안기고자, 서두르고 있었다.
이럴 즈음, 10월16일 오후 김포공항에 한 대의 군용기가 내려앉더니, 비행기의 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중절모차림의 노신사가 트랩에서 내려온다.
그가 바로 조국의 해방과 혁명투사인 이승만 박사였다. 일반인 마중객은 없었고, 몇몇 미군이 그를 맞아줬다.
해외에서 생애의 반을 보내며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돌아오는 귀국치고는 너무 보잘것없는 환대였다.
무려 33년간 해외각처를 떠돌던 고달픈 독립투사의 내나라 고향땅을 밟는 그의 표정은 눈가에 이슬이 맺혔지만 감격에 젖어 있었다.
이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호외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목은 ‘33년 만에 이승만 박사 돌연귀국, 군정청에서 제일성’이었고 상보가 실렸다.
이승만이 홀연히 귀국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된 조국의 정세가 몹시 혼탁하고 무질서하다는 얘기를 외국에서 듣고, 남모르게 미군용기를 주선받아 소문없이 돌아온 것이다.
이즈음 서울에서는 여운형, 안재홍 등이 건국준비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언론을 통해 듣고 있었다.
때문에 이승만은 당초 계획을 앞당겨 귀국한 것이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여사를 미국에 두고 혼자서 돌아왔다.
그는 환국한 다음날인 1945년 10월17일 오전 10시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갑자기 우리말을 해야해서 그런지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33년간 우리 말을 쓰지 않는 해외의 떠돌이 신세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 자리에 하지 중장과 아놀드 소장이 안내해 이뤄진 것이다.
말쑥한 정장차림에 백발노신사의 조용하고 저음으로, 때로는 힘을 주어 말을 했다.
그는 첫 인사로 ‘33년만에 꿈에 조차 그립던 내나라 내고향의 땅을 밟으니 뭐라 감상을 말해야 좋을지. 오직 가슴이 막힐 따름이요. 그러나 지금 사사로운 감상을 말할 때일 까...’하고 운을 뗐다.
◇…이승만, “3천만 겨레가 하나로 뭉쳐야산다”
이어 ‘밖엣(해외) 사람들이 지금 우리에게서 알고자 하는 것은 40년동안 남의 나라 압박과 천대를 받아오던 조선민족이 과연 자기들끼리 능히 자유독립국가를 세워 나갈수 있느냐는 것이오...’였다.
처음에는 영어로 말하고, 바로 자신이 우리말로 번역해 말했다.
그는 말이 바뀔 때마다, 좌우에 자리잡고 있는 군정요인과 기자단을 번갈아 쳐다봤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를 소개하면서 ‘그의 능숙한 외교가 다운 미소와 정치가 다운 제스처가 엿보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제 세계의 시선을 우리에게 집중되어 하루빨리 합동을 하는 것이 우리 3천만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가장 시급한 일이요. 나는 미국에 있으면서 국내에 60여개 당파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소. 뭉치고 엉키어 합동을 해야 사는 길이오’라고 주장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가 언제 환국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답변했다.
이승만은 ‘환국준비는 다되어 있을 거요 오직 남은 문제는 국토 통일에 있지. 우리의 힘이 한덩어리로 뭉쳐지는 날이 있겠지요’라고 말했다.
며칠 뒤인 같은 달 20일 열린 연합군 황영회의 석상에서 ‘함께 살고 함께 죽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당시 신문에 그의 이 요지는 대략 이렇다.
‘나는 평민의 자격을 좋아한다. 정부의 책임자가 되는 것을 원치핞는다. 아니 내가 싫어하는 것이 권리와 지위다.
나는 다만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다 함께 남보다 더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아보자고 싸워왔다.
여러분은 이 값진 자유를 위해 가리지 않고 나와같이 동진병행(同進倂行 )할 줄 믿는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8.15 해방이후에 분열하여 50구분, 60구분했다는 소식이었다.
40년간의 지난 과거를 모르고 이것이 웬일인가
의아한 마음으로 고국에 돌아와보니 과연 몇 개의 당파가 있고, 상위한 주의 주장이 있어 혼돈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여러사람과 담화해본 결과 1919년에 조직된 대한민국정부가 그들과 함께 동락할 줄알았는데 그동안 드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런 것 저런 것이 생겨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모든 당파가 함께 합쳐서 우리의 총력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들음에 무한히 기쁘다.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나라를 완전히 찾은후에 싸울일이 있으면 싸워도 좋다. 나는 당신들을 위하여 몇해 남지 않은 목숨을 바치겠다.
여기서 제일 어려운 문제가 있다. 즉 우리동포들이 북위38도를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졌으니, 누가 한것이요 어찌된 일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하고 알아야할 권리가 있다.
여러분의 주의와 주장을 다버리고 한덩어리가 되세요. 그리하여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를 내세운다면 모든 문제는 원만히 해결하겠다‘
이처럼 공식석상에서 자기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표명하고 나선 것이다.
◇…김구·김규식 등 임정요인 홀대한 미군정청
조국광복을 위해 30년 넘는 세월을 해외에서 싸워온 중국 임시정부의 불사신 김구 선생이하 10여명의 혁명지사들은 1945년 11월23일 오후 김포공항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김구, 김규식, 이시영, 김상덕, 엄항섭, 유동열 등 임정요인과 이들 수행원 자격으로 뒷일을 해온 선우진, 민영완, 이영길, 박종갑, 장준하, 윤경빈, 김진동 그리고 김규식의 며느리이자 비서인 수잔나(安美生)등 15명이었다.
이들은 11월23일 제1진으로 귀국한 임정요인들은 오후 1시에 중국 상해 강만(江灣)비행장에서 미군용 중형기에 몸을 싣고 김포공항에 내린 것이다.
그들의 일정은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5일 장개석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만에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국내 귀환을 위해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하이에 머문지 18일만인 11월 23일에야 도착했다.
이날 김구 등 1진 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그나마 2진은 일주일 후 군산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김구 일행이 귀국할 때의 미국의 태도는 180도 달랐다.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려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회담을 가진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환영 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크게 우대하였다.
◇…김구·김규식 등 임정요인 환국...“기내서 애국가부르며 울었다”
1진 일행 중 수행원의 한사람이자 광복군 소위인 장준하의 귀국수기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감격의 순간들이 적혀있다.
‘김구주석이하 15명의 우리 임정요인과 수행원을 태운 미국 중형기는 쾌음을 내면서 우리 땅을 향하여 검푸른 황해를 날고 있다. 겨울의 날씨는 너무 좋다. 보이는 것은 점점이 떠도는 천계의 구름외에 망망한 공간과 바다뿐이다. 우리가 향하여 앉은 곳 거기에는 조선이있다. 몇시간 후에는 사랑하는 옛땅(故土)에 안기어 친애하는 형제의 얼굴을 반갑게 마주 볼 수있을 것이다. 무한이 좋고 또 너무 좋아서 그런지 서글픈 것 같기도하다. 중국을 떠날 떼 환송해준 동지들의 얼굴더 어른 거린다.
비행기는 동북편을 향하여 여전희 호조의 비행을 계속한다. 지금 조국은 왜(倭 )놈들의 압박을 물리치고 환호와 흥분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리고 수도 정계는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각층, 각파, 여러 주의자……. 그러나 독립을 위해서라면 누구의 손인들 잡지않으랴. 주위를 보니 모두 명상에 잠긴 듯하다.김구선생은 하늘가를 보시며 무엇을 구상하실까. 3시간 반이나 되었을 까. 누구인지 ‘조선해안이 보인다’라고 소리쳤다. 일동은 ‘와아’하고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인다. 저기 동북편 손아래 조그맣게 그리고 희미하게 고국의 땅이 나타나고 있었다.
저것을 바로 우리의 땅인 것이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기상(機上)에서 합창으로 울려나와 엄숙하게 만들었다. 비행기속을 뒤흔든 노래소리는 어느덧 울음섞인 노래가 되었다. 김구선생의 눈에서 눈물이 빛났다. 모두가 울었다.
강화도가 벌써 뒤로 보인다.인천이 발아래로 순식간에 지났다. 겨울의 대지를 상환(賞歡)할 겨를도 없이 4시정각에 우리 일행은 김포비행장에 원기좋게 내렸다. 여기서 우리들은 순국선열들의 광명을 위하여 힘차게 싸울 것을 다시한번 마음속에 깊이 새기 었다’
임시정부가 귀국하자 그에 대한 국내의 기대는 지대했다.해외에서 온갖 풍상을 겪으며 백절 불굴의 의기로 싸워온 임시정부의 모습을 동포가 직접 육안으로 대하게 되자, 그 감격은 형언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는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임시정부요인의 귀국을 골똘히 기다리던 참이었다.
귀국 즉시 김구주석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하겠노라고 최창학(崔昌學)이 나타났다.
그래서 소유의 서대문 죽첨장(竹添莊, 경교장으로 불리기도 함)은 며칠전부터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었고,미리 입국한 경비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임정요인들은 4대의 자동차로 분승하여 서울 시내로 들어왔다.
김구가 서대문 죽첨장에 5시 쯤 도착했고, 미군 사령관 하지중장이 6시에 이를 공식 발표했다.
초겨울이 몰래 다가오는 호젓한 밤, 역사적인 첫밤은 점점 깊어갔다. 감격어린 그 시각, 풍찬노숙의 기구한 혁명생활 27년만에 고국의 품에 안긴 백범 김구. 그러나 조국의 앞날과 민족통일의 구상으로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지샜다.
다음날인 11월24일 백범은 아침8시 서울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3천만 동포에게 귀국 인사를 했다. 미군정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개인자격이었다.
◇…백범 “임정요인들은 평민자격...독립완성”
백범은 ‘우리는 한데 뭉처 통일독립완성을 최소한도로 단축시켜야한다’는 제목으로 귀국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中京)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어제 23일 상해를 떠나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나와 나의 각료일행은 한 평민의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 국가 독립ㄷ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을 접촉할 기회는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기에 오늘은 다만 나의 동사자(同事者)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 전합니다.’
오후에는 기자단과 만났다. 그는 귀국인사를 한데 대한 감상을 묻자 “혼이 돌아왔는지,육체까지 가지고 돌아왔는 지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당시 언론에 소개된 기자들과의 문답은 이렇다.
△기자질문 : 입국전에 자격문제가 있었다는데
▲백범 답변 : 우리들은 정부를 가지고 왔지만, 군정이 있는한 우리 정부는 아직은 외국과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자격으로 돌아왔다
△질문 : 이승만 박사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뭉쳐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당면한 긴급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답변 : 오늘은 이야기 할 수 없다. 내가 이 박사보다 나은 수단을 갖고 왔다고 생각해서는 잘못이다. 다만 근 30년동안이나 해외에 있다가 돌아온 터이므로 현정세에 어둡다. 정세를 모르고 갑자기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통일하는데 악질자가 함께 섞여서 무엇이 되겠는가. 민족반역자나 친일파는 물론 제외해야한다.
△질문 : 먼저 국내정세를 정확히 판단해야할 터인데, 이 현실을 어떻게 보려는가
▲백범 답변 : 눈하고 귀, 둘만 가지면 그만이다.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판단이 생길 것이다.
그날자 언론들은 ‘일제 총검에 맞서 싸운 맹장다운 패기 넘쳤다’고 썼다.
죽첨장에 여장을 푼 백범 김구와 임정요인들은 이튿날부터 정계인사들의 인사를 받았다.
고하 송진우 한민당 총무가 정인보(鄭寅普),김준연씨를 대동하고 들어왔고, 국민당 안재홍, 인민당 여운형등이 차례로 대문을 들어섰다. 오후에는 허헌(許憲)등 좌파인사들이 찾아왔다.
이후 상해에 잔류했던 임정요인 20여명은 1942년 12월 2일에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여기에는 홍진(洪震), 조성환(曺成煥), 황학수(黃學秀), 장건상(張建相), 김붕준(金朋濬), 성주식(成周寔), 김창숙(金昌淑), 조경한(趙擎韓), 조완구(趙琬九), 조소앙(趙素昻), 신익희(申翼熙), 최동오(崔東旿), 김약수(金若水) 등이다.
그 무렵 유럽에서도 유림(柳林)이 귀국했고, 해방 사흘만에 귀국했다가, 3시간만에 다시 중국으로 간 청산리 전투의 호걸 이범석(李範奭)장군은 1946년 6월22일 돌아오면서 광복군의 환국이 끝을 맺는다.
▶참고문현;한국야당사(이기택 지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충청남도지(충남도지편찬위), 한밭승람(변평섭 지음) 사건반세기(신수용 지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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