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지와 만나기로 했다. 혜지는 키가 작은 나와 달리 키가 크다. 아니, 외형을 생각하면 크다는 말보다는 길쭉하다는 말에 더 가깝고, 내면을 생각하면 크다는 말보다는 넓다는 말에 더 가깝다. 더 잘 어울리는 친구이다. 웃음이 화사하고, 소리는 청아하고. 18년을 함께 하면서, 특히나 어른의 문턱을 넘고는 매번 만날 때마다 배울 점을 탐사하게 하는 친구이다.
추억이 유리 구슬이라도 되는 양 매만지고 닦아내기를 반복했다. 강아지가 무서워 친구의 집 소파 위에 둘이 같이 서 있었던 일, 꼭 읽어야 하는 책 소개하기 조별 과제를 위해 주말에 친구들과 모였던 일, 어리숙해서 후회되었던 일, 그럼에도 강단 있게 결정했던 일.
유리 구슬에는 어떠한 힘이 있어서 무더운 날씨조차도 만족스럽기만 했다. 오히려 담쟁이가 틈을 빼곡히 메워가는 초록의 여름을 빛내는 듯했고, 도리어 지상의 열기를 붉은 빛으로 뽐내고야 마는 능소화가 더욱 고개를 빳빳하게 들도록 하는 듯했다. 초록의 담쟁이와 주황의 능소화를 보라고 뜨겁나보다, 여길 정도였다.
추억을 야금야금 먹는 우리와 같이 햇살을 야금야금 먹는 하늘이었다. 두 볼은 채 삼키지 못한 햇살로 가득했다. 말갛던 볼은 분홍으로 물들었다. 저녁이었다. 소매에 땀이 묻어날 만큼 유리 구슬을 문대고 문대도 아쉬운 것처럼, 추억을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는 법이다.
샷시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통 나무였다. 큰 창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을 기다리며 또 시시콜콜한 추억 보따리를 풀어갔다. 우리가 함께 경험한 시기와 우리가 따로 보내온 시기와 같은. 큰 창이 꼭 그림 같았다. 때마침 우리를 위하여 그려진 그림 말이다.
나무 창 안에는 주차된 하얀 포터 트럭이 있었다. 단발머리의 작은 소녀와 그보다는 머리카락이 조금은 길고 키도 크던 소녀 그리고 축구공을 든 소년이 적재함을 오르내리며 술래잡기를 했다. 적재함을 내려가 조금 후에 수박을 손에 쥐고 나타나기도 했다. 생동감 넘치는 여름의 풍경과 풋풋함의 결정.
별안간 나무 창의 꽂이쇠(사시꼬미)가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는 꽂이쇠를 돌려 창문을 잠갔는데, 지금은 크리센트로 손가락 스냅 한 번으로 잠그네. 창문을 여닫는 것에서도 이렇게 힘을 빼고 살고 있네.” 기술의 발전은 몸의 움직임에, 그러니까 노동에 용이성을 더해주었다. 몸의 움직임을 덜어주었으니, 남은 힘을 마음에 기울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또 정성으로 대하는 것.
“그런데 남는 힘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가는 거지? 몸이 편해졌다고 마음도 느슨해졌나 봐.” 그러니까, 꽂이쇠를 돌리던 시절에는 누군가를 사랑하여 종이 위에 사각사각 글씨를 정렬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구르고, 동전을 데구르르 넣어 통화 연결을 기다렸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하여 인고와 순애의 노력이 필요했다.
노동에의 용이성이 더해진 시대, 마음이 몸과 함께 간결함과 단순함을 따라가서는 안됐다. 몸의 고단함이 줄어듦에서 오는 여유가 누군가를 지켜보고, 돌보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했다. 문자 메시지에서는 흑연 자국의 망설임이 보이지 않고, 자동차에서는 땀방울의 설렘이 보이지 않는다. 인스턴트식 마음의 시대. 그렇게 남는 힘은, 남을 탓하거나 남과 비교하는 데에 쓰인다. 현대의 고질적인 문제는 꽂이쇠의 변화와 맞물리는 게 아닐까.
만나서 굳이 걷고, 굳이 엽서를 쓰고, 굳이 추억을 넘나든 혜지와의 여름은 가히 꽂이쇠적(的)이지 않은가. 크리센트적(的)인 이 시대에, 꽂이쇠적(的)인 순간을 만끽했다는 게 얼마나 기꺼운지! 간결함, 단순함, 용이성을 잠시나마 벗어 진심과 정성을 한아름 안았다. 이 추억은 또 얼마나 매만지게 될까? 꽂이쇠를 보면 분명 뻗어 오르는 담쟁이와 피어 솟아가는 능소화와 삐걱이는 샷시문과 포터 트럭 아래의 한 조각 수박이 떠오를 것이다. 생각의 끝에는 스물일곱 여름보다 더 붉은, 딱 그때의 미소보다 더 맑은 웃음이 머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