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강하게 내리쬐는 몹시 뜨거운 볕’을 뙤약볕이라고 합니다. 뙤약볕은 자신의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하루도 게으름 없이 세상을 내리쬡니다. 그렇게 여름의 낮은 차근차근 짙어지고, 제 몫의 더위를 길러 갑니다. 뜨거운 볕은, 무엇인가를 익혀 갈 때 필요합니다. 가을의 수확은 여름의 더위 덕분일 테지요. 그러나 더위는 무엇인가를 상하게 하는 데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안희연 시인은 “여름은 상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렇듯 더위는 익음과 상함,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익는 여름, 익히는 뙤약볕, 익어 가는 온도가 좋습니다. 그리고 이 여름의 더위 속을 헤엄치다가 문득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더위는 추위를 품을 때 비로소 익음이 되고, 제 열기만을 고집하는 순간 상함이 됩니다. 익음에는 본디 추위가 함께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잘 익기 위해서는 더위도, 추위도 성실히 받아내야 합니다. 잔꾀를 내기보다 계절이 시키는 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계절은 누구도 빗겨가지 않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라면 누구에게나 볕을 내리고, 누구에게나 바람을 보냅니다. 볕도, 바람도, 비도 제 차례가 되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이번 봄, 열여섯의 아이들과 계절을 읽었습니다. 문학 작품 속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몇 번이고 펼쳐 보았는데, 아이들 사이를 지나온 문장들은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설고도 선명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글쓴이가 누구든, 또 어느 계절을 묘사하든 문학 작품은 끝내 사랑으로 번져갔습니다. 저는 그 점이 참 좋았습니다. 그간의 경험을 모아보고 또 그간의 배움을 돌이켜보아도, 문학은 여실히도 매번 사랑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늘 문학의 화두였습니다. 이야기의 발단이자 절정이며, 끝내지 못할 결말이었습니다. 문학이 지금까지도 맥을 이어오는 것은, 사랑이 아직 멸종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제아무리 사랑이 메마른 시대라고 해도, 저마다의 가슴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과 환상이 내재해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사랑의 주체와 대상이 달라질 때마다 문장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또 사랑은 양면적이라, 어느 때는 슬픔류(類)를 또 어느 때는 기쁨류(類)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 그렇기에 문학은 끝도 없이 새로운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5월은 문학
마른 가지에 언제쯤 보드라운 바람결이 가닿을까, 내심 초조해하던 지난 3월이었습니다. 입춘을 지나서도, 경칩을 지나서도 찬 기운만이 무성하던 날들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싹눈은커녕, 몇 겹의 성에만 어릴 뿐이었습니다. 따뜻하게 데워낸 입김마저 성에에 얼어붙었고, 기대했던 4월의 밤은 깨질 듯 차가웠습니다. 4월의 언덕을 넘어가며 몇 차례 비가 내렸습니다. 몇 줄기 비의 행렬은, 봄 햇살의 눈물 아니면 땀방울이었을까요? 햇살은 그토록 봄이고 싶었나 봅니다. 찬 공기를 가르며 몇 번이나 울고, 또 얼마간의 땀을 흘렸습니다. 많이 울고, 오래 땀흘린 햇살은 겨우 봄을 피워내고야 말았습니다. 몇 차례의 비를 맞으니, 벚꽃이 휘날리고 흩날렸습니다. 햇살을 받은 벚꽃은 분홍이었다가도 하양이었습니다. 땅 위에 내려 앉은 꽃비는 금세 말랐습니다. 햇살이 봄을 열심히도 키워낸 것이었습니다. 가지는 점차 연두, 초록의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네, 그토록 고대하던, 정말이지 봄입니다. 저는 곳곳에 민들레가 말갛게 얼굴을 보이는 이 계절이 좋습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습니다. 아스팔트 사이에도, 모래알 사이에도, 지붕 위의 흙에서도, 적벽돌 틈에서도 말갛게 웃어 보이는 노오란 뭉텅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