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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물 마리니에르(Moules Marinières)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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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유의어는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낮 동안 대지를 날카롭게 달구는 햇볕은 여전히 한여름의 꼬리를 붙잡고 있지만, 하늘이 알록달록 물들기 시작할 즈음이면 어느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춥니다.

 

남는 것은 목덜미를 스산하게 간질이는 바람입니다. 뜨거움과 서늘함이 한데 얽혀 짜낸 계절, 가을입니다.

 

이 계절은 내가 지금 어느 계절을 걷고 있는지 자꾸만 가늠하게 만듭니다. 여름이라고 하기엔 찬 기운에 털이 쭈뼛 서고, 가을이라고 하기엔 더운 기운에 땀방울이 맺힙니다.

 

이 9월의 모호함을, 저는 가을의 아이러니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 모호한 계절감은 방학을 끝내고 다시 문을 연 교실의 풍경과도 고스란히 겹칩니다.

 

여전히 여름이라며 반팔을 입고도 펄럭이는 아이와 얇은 바람막이의 모자까지 동여맨 아이를 볼 때면, 가을의 아이러니가 연거푸 느껴집니다.

 

여름 내내 저마다의 집에서 저마다의 여름을 품은 채 조용히 닫혀 있던 아이들이 교실이라는 한 공간으로 다시 모여듭니다.

 

어색함도 잠시, 9월의 교실은 이내 저마다의 개성과 방학 동안 자라난 생각들을 뿜어내며 왁자지껄 어우러집니다.

 

비로소 저마다의 색을 드러내는 아이들의 숨결 속에서 여름은 조금씩 비워지고, 교실에는 가을이 천천히 차오릅니다.

 

뜨거움과 서늘함이 충돌하는 이 계절을 미각으로 번역한다면, 단연 프랑스식 홍합 요리인 물 마리니에르(Moules Marinières)일 것입니다.

 

냄비 가득 팔팔 끓여 낸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삼키면, 신기하게도 입안 가득 먼저 차오르는 감각은 “시원하다”는 청량함입니다.

 

목구멍을 데우는 온도는 분명 뜨거운데, 홍합이 우러난 맑고 깊은 감칠맛은 개운한 바다를 품고 있습니다.

 

뜨거움은 몸을 데우고, 시원함은 마음을 엽니다. 이 미각의 아이러니야말로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선명한 미각의 가을화(秋化)입니다.

 

뜨거움과 시원함, 짭짤함과 슴슴함처럼 서로 다른 맛도 오래 함께 끓이면 끝내 하나의 국물이 됩니다.

 

가을도 그렇습니다. 서로 다른 온도들이 오랜 시간 함께 끓어야 비로소 한 계절, 가을이 됩니다. 그래서 저도 가을의 아이러니를 한 솥 가득 끓이고, 우리고, 맛보기로 합니다.

 

가을을 미각화하기 위해서는 가을의 고독과 고뇌만큼이나 깊고 두꺼운 냄비가 필요합니다. 버터와 올리브오일을 녹이고, 마늘과 파슬리의 향을 차곡차곡 입힌 뒤, 소금과 후추로 간을 더합니다.

 

여기에 무겁고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붓습니다. 뜨거운 불을 만나 독하고 거친 알코올은 증기 속으로 날아가지만, 와인이 지닌 화사한 풍미와 포도의 향은 국물 속에 남아 요리의 깊이를 더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끓어 갑니다. 거칠고 위태롭던 시간은 치열한 세월의 열기 속에서 조금씩 휘발되지만, 그 시간이 남긴 성숙한 정취는 끝내 우리 안에 풍미처럼 남습니다.

 

칠흑처럼 어둡고 단단한 홍합 껍질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겉을 단단히 닫아걸었던 마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뜨거운 불과 진한 와인의 열기 속에서 홍합은 비로소 입을 활짝 열고, 그 안에 감추어 두었던 부드럽고 뽀얀 속살을 드러냅니다.

 

단단함 뒤에 숨은 여린 마음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뭉클합니다. 살아 있을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굳게 닫혀 있던 것이, 알맞은 열기와 향을 만나서야 품고 있던 바다를 기꺼이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사실도요.

 

뜨거운 국물을 삼키며, 열린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서늘한 9월의 밤바람을 맞이합니다. 홍합 껍질이 그릇에 부딪히며 내는 달그락 소리는 꼭 가을 풀벌레 소리처럼 나직하게 메아리칩니다.

 

가을의 낮은 아직 식탁 위의 국물처럼 뜨겁고, 가을의 밤은 창밖의 바람처럼 서늘합니다. 물 마리니에르는 그 둘을 한 그릇 안에 함께 품고 있습니다.

 

닫힌 것은 열리고, 단단한 것은 부드러움을 드러내며, 뜨거운 것은 마침내 시원해집니다. 그릇에 담긴 아이러니 하나가 삶의 아이러니를 다독인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한 저녁이었습니다.

 

가을은 뜨거움과 서늘함을 함께 품은 계절입니다.

 

물 마리니에르는 그 아이러니를 한 그릇에 담아낸 요리였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온도와 시간들이 오래 함께 끓여 낸 끝에야 비로소 한 사람이 되고, 한 계절이 됩니다. 끝내 우리를 열게 하는 것은 고독을 덥혀 줄 만큼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 안에 품고 있던 바다를 세상에 내어놓게 하는 것 또한, 고뇌를 덮어 줄 만큼의 깊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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