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에 관한 깊은 안목은 없지만 나는 가끔 재즈의 음률에 빠지곤 한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리듬 위에 펼쳐지는 현란한 애드립, 블루스의 애조 띤 음계에 아프리카의 분방하고 경쾌한 박자, 속삭이듯 때론 흐느끼듯 흘러가는 악기들의 저마다의 음색 그리고 허스키한 가수의 읊조림은 가슴을 적시며 흔들어댄다.
어느새 곡조를 따라 흥얼거리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넓게 해석할 때, 세상의 모든 소리는 음악이고, 말은 노래이며 온갖 동작은 춤이 될 수 있다. 인류가 말로써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춤과 노래는 비롯되었다고 한다.
원시인류가 소리가 잘 울리는 통나무를 골라서 막대기로 두들기며 소리치고 껑충거리며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우리가 음악을 듣고 춤추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음악과 춤이 원초적일수록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는다.
현란하게 치장되고 고도로 비틀어진 현대음악은 난해함을 무기 삼아 듣는 이에게 감상의 선택을 강요한다.
각국의 전통적인 민속음악이나 민요는 타 민족에게도 쉽사리 공감되지만, 발전과 변혁을 거듭하며 마침내 첨단을 달리게 된 요즈음의 일부 음악들은 전문적인 지식과 오랜 적응훈련이 아니면 가까이하기에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잘 주장하는가 보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또는 ‘옛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이러한 복고주의적 경향은 흔히 변화에 대한 거부나 시대역행적인 반동의 산물처럼 인식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미를 향한 더욱 치열한 모색의 결과일 수 있다.
어느 누가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마다하고 곰팡내 나는 쉰 음식을 굳이 먹으려 하겠는가?
발전을 위한 왕성한 실험정신은 자칫 ‘음악을 위한 음악’을 지향할 수 있다.
나처럼 변화에 둔감한 일부 계층은 이러한 경향에 쉽게 식상하면서 ‘인간적인 음악’을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기계적으로 재단된 신디사이저보다는 전자음 없는(Unfluged) 연주에서 감칠맛을 느낀다.
세계를 주름잡는 아이돌의 세련미보다 이문세의 거친 가성을 더 좋아한다.
재즈에 대해서도 같다.
전문화되고 분화되어 발전한 이후의 재즈도 좋겠지만 재즈가 무르익어가던 시기이자 전자악기가 등장하기 전인 1950년 전후의 이른바 재즈의 중기 무렵에 발표되었던 곡들에 내 심장은 반응한다.
특히 피아노, 색소폰 또는 트럼펫, 콘트라베이스, 드럼의 단순한 4중주로 연주되는 곡들에 쉽게 빠져들곤 한다. 건반악기와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의 최소 단위로 짜여진 이 조합은 연주자를 잘 만나면 거의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저마다의 분명한 특색이 다양하게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리듬과 음률은 굳이 재즈가 아니어도 황홀할 것인데, 재즈는 이에 자유분방함을 더해서 가볍고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서사를 덧붙여줄 가수가 결합하면 더할 나위가 없어진다.
4중주의 멋진 조합은 재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클래식의 현악 4중주를 꼽을 수 있다.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구성은 그 자체로 고전주의가 물씬 풍긴다.
나는 여기서 조금 변형된, 제2 바이올린을 피아노로 바꾼 구성을 더 좋아한다. 비틀즈도 기타를 중심으로 한 4중주 팀이었다.
기타 셋에 드럼이 들어갔다. 기타는 각기 리듬과 베이스, 리드를 맡았다.
우리 귀에 익숙한 것으로는 이광수와 김덕수 등이 창시한 사물놀이가 있다.
이는 타악 4중주이다. 꽹과리 소리는 천둥, 징 소리는 바람, 장구 소리는 비, 북소리는 구름을 뜻하며 이들이 하나로 합쳐진 소리는 마치 폭풍과 같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4중주가 최소의 구성으로 꾸릴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4중주가 아니면 어떻고 재즈가 아니면 또 어떠랴! 온갖 소리가 곧 음악이듯이, 나름의 체계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것이라면 나는 그 순수함이 살아있던 때를, 그러면서도 체계를 갖춰가던 싱싱한 날것의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따져가며 감상모드에 진입할 필요는 없다. 음악이 존재하고 내가 그 울림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거기엔 치장과 가식이 아닌 진솔한 삶의 사연들이 묻어있는 듯하다. 고통과 쾌락, 한(限)과 씻김, 달콤하게 시작해서 쓴 맛으로 끝나는 사랑과 미움에 대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에 대하여, 마침내 스러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에 반해 요즘의 노래들은 사람과 감정을 단순화하고 일상을 만화처럼 묘사한다. 예전에는 사회를 비판했다면 요즘은 조롱한다.
빠르게 열광하고 적극적으로 버린다. 사랑조차 소비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가볍고 얇아지고 있다.
잠시 눈을 감는다. “음악은 모든 언어보다 더 깊은 곳에서 울린다.”고 호프만은 말했다.
나는 “그래서 옛 음악은 이어폰으로 듣는 게 예의라고”라고 대꾸해본다.
버튼을 누르면 돌연 음악이 몸으로 스며든다. 한 곡이 끝나면 잠시 침묵하다가 다음 연주를 시작한다.
연주와 휴식을 반복하며 돌아가던 옛 LP 레코드처럼 나의 하루를 천천히 맴돌려 본다.
귀에 익은 음악이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그다음은 각자의 영역이다. 내 가슴에 내려앉는 위로와 영감의 선율들… 음악이란 즐길 수 있는 자만 가질 수 있는 값싸고 무한한 참 좋은 선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