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기를 지나면서, 대외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류의 말을 내뱉으면서 겸연쩍어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막상 키우는 과정에 들어서면, 오히려 아이가 부모를 키우는 순간들을 곧잘 마주하게 되는 탓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이가 나를 부모로 키워내는 것이 아닐까 궁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궁리를 뭉쳐 간결하게 펼쳐 보이면, ‘부모와 자식은 각각 자식과 부모를 키워냄으로써 비로소 궁극의 가족을 이루어내는 것’ 정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딸과 함께 커가면서 무수히 많이, 그토록 자주, 어이없게 넘어지곤 합니다.
하지 말라고 짜증 내며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서두르라고 채근하며 삐끗하기도 하고, 딸의 이름을 호되게 외치며 턱이 깨지기도 하고, 서럽게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소리 내지 않는 딸의 모습에 가슴이 해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긴 상처에 묻은(어쩌면 상처에 묻힌) 티끌을 털어내는 방법 중 하나는 오로지 딸을 위해 달콤한 디저트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가장 달콤한 것을 떠올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장 정성껏 달콤한 것을 만듭니다. 마치 고해성사를 요리로 대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네가 좋아하는 푸딩, 아주 말간 푸딩. 네 뺨만큼이나 보드라운 푸딩. 나의 불찰과는 다르게, 나의 실수나 오만과는 다르게 아주 달콤한 푸딩. 그래도 내가 너를 아끼는 것보다는 덜 달 수밖에 없는 푸딩.
그날은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은 주말이었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나려 했으나 가쁜 마음 탓에 몸을 움직였습니다.
초여름의 길목을 따라 일찍이도 창에 든 해가 마음을 더욱 재촉합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과 아늑히 내려오는 햇볕을 외면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머리를 질끈 묶어내고 오늘은 꼭 내가 딸을 키워내야지, 다짐하며 거실로 나왔습니다.
일력의 날짜와 요일을 바꿨습니다.
바흐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나 윌리엄 볼컴의 <우아한 유령> 아니면 니와모리 피아노의 <Persian waltz>. 잔잔한 음악을 켜며 기도하였습니다.
“이 음악이 제게 부드럽듯이, 하루 간 저도 딸에게 나직하게 해주세요. 화내지 않게 해주세요. 가능하다면, 딸이 저를 화나게 하지 않게 해주세요. 아니, 그냥 제가 화내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환난에서 저를 지켜주세요.(…)” 끝없는 소망을 나열하다가, 보스락거리는 소리에 ‘아멘’을 속삭였습니다.

‘타다다!’ 달려 나오는 딸 덕분이었습니다. “엄마, 오늘 유치원 가는 날이에요?”를 묻고, “왜 안 가요?”를 묻고, “그럼 뭐해요?”를 또 묻고. 세상이 곧 질문인, 어쩌면 질문이 곧 세상인 아이가 신이하기만 합니다. “오늘 엄마가 맛있는 푸딩 만들어줄게까”라는 말이, 그 질문들에 대한 단단한 매듭이 되었습니다.
찬물에 젤라틴을 넣어 불리고, 물기를 짜냈습니다. 미안함을 짜내듯이 꾹꾹 눌렀습니다. 냄비에 우유와 생크림 그리고 설탕을 섞어 넣고 데웠습니다.
딸을 어르고 달래듯이 열심히도 저었습니다. 바닐라 익스트랙과 젤라틴을 넣어 녹였습니다. 사랑이 녹아들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식혀내고 체에 걸러 투명한 유리컵에 담았습니다.
꼭 과민한 태도와 감정을 걸러내 듯했습니다. 멍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냉장고에 넣어 굳히는 동안, 뭉근히 콩포트를 끓였습니다. 만들어진 콩포트처럼, 네게 기억되는 엄마의 사랑이 달콤하기만을 바랐습니다.
반짝이는 그릇에 판나 코타를 뒤집어 꺼냈습니다. 형체는 분명한데 열심히도 요동치는 탓에 꼭 여려 보였습니다.
그 모양새가 마냥, 우리 가족 같았습니다. ‘궁극의 가족’이라는 틀은 분명한 듯한데, 서로를 키워가며 지극히, 끝없이 흔들리는 가족 말입니다. (여린 건 아니고 아직 어리다고 해야 할까요?)
울렁이는 판나 코타 위로 흐르는 카라멜 시럽과 주변을 메운 콩포트. 딸은 야무지게 숟가락을 들고, 판나 코타를 머금었습니다. 오물거리는 입속에 달콤함이 남았을까, 그 달콤함이 만족스러울까 궁금해하며 딸을 살폈습니다.
딸의 해말간 웃음과 요란한 손짓이 넘어져 까진 자리에 들어찼습니다. 고작 판나 코타로 네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하는 커가는 마음과 솔직히 너는 그 무엇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마냥 해맑길 바라는 넘어지는 마음을 횡단하기 바빴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엄마는 요리를 진짜 잘해!’,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자그마한 신호수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름의 고해성사도, 그 저녁 시간에 잠시 잦아들었습니다.
그렇지, 역시. 너보다 천진할 수는 없는 푸딩, 판나 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