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아빠와 간편식

  • 등록 2025.04.17 15: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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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간편식이란 말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음식이지만, 종종 근사한 요리로 기억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대충 끼니를 해결하려 물을 부어 낸 컵라면은 그야말로 간편식입니다. 하지만 파라든가, 버섯이라든가, 달걀이라든가 고명을 얹어 낸 봉지라면은 그야말로 요리가 됩니다.

 

무엇보다 (귀찮지만 끼니는 해결하기 위해) 양푼에서 비벼낸 비빔밥과 연구원들의 각고의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궁극의 맛까지 보장된 삼각김밥을 떠올리면 무엇이 간편식이고, 무엇이 요리인가를 쉽게 이야기하긴 어렵습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빠의 손을 거치면 어떠한 간편식이든 또 레토르트 식품이든 요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유독 기억에 남는 시간들이 있다면,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와보면 아빠는 OCN이나 EBS와 같은 채널에서 영화를 보고 계셨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 꼭 배가 고파서 그럴 수도 있다고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이후에 오는 말은 하나같이 ‘라면 끓여줄까?’였습니다. 그럼 아빠는 부엌으로 가서 감자면을 끓이고, 각종 김치를 꺼내 오셨습니다.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는데도, 아빠가 끓여준 푹 익은 라면은 항상 맛있었습니다.

 

아빠와 라면을 먹을 때는 대체로 소파 위에 앉아 쟁반 위로 호로록 먹었습니다. 아빠랑만 할 수 있는 일탈이었습니다.

 

감자면이 종종 진라면이나 너구리 등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래도 쟁반과 김치 그리고 푹 익은 면발은 도통 변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여름이었습니다. 그때는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더운 여름,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언니와 함께 늦은 저녁 마트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언니는 백도를, 저는 황도를 고르곤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빠가 캔을 탁 열어, 각자의 유리 그릇에 백도와 황도를 담아주셨습니다.

 

그 사이 엄마는 물 조금에 우유 많이 섞어 미숫가루를 타오셨습니다. 얼음이 동동 올라간 복숭아 조림과 미숫가루를 먹으면 꼭 창밖에서 눅진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여름의 냄새가 계동의 한 빌라를 채웠습니다. 동동 올라간 얼음이 부딪히는 모습이나, 노랗고 하얗고 구수한 시원한 것들의 향내나, 잔잔히 깔리는 텔레비전 속 이름 모를 개그맨들의 수다나, 그런 것들이 줄곧 여름을 좋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언젠가의 겨울이었습니다. 그때는 동생이 태어난 이후였습니다. 온 가족이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에 출출함을 달래자며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아빠는 훈제 치킨과 오뎅을 고르셨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잘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있으면 겨울 정식의 따뜻한 냄새가 퍼졌습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은 소금과 머스타드 소스를 곁들인 훈제 치킨과 곤약조차도 맛스럽게 자리한 오뎅 앞에서 잦아들었습니다. 아빠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투명한 비닐장갑을 끼고 훈제 치킨을 결결이 찢어 산처럼 쌓아주셨습니다. 모락모락 김을 내뿜으며 결대로 찢어지는 훈제 치킨을 보고 있노라면 소금을 찍을지, 머스타드를 찍을지 앞선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훈제 치킨을 오물오물 먹고 있으면 적당히 식은 오뎅 국물이 한 그릇씩 채워졌습니다. 각양각색의 오뎅은 저마다의 접시에 엇비슷한 크기로 잘라 올려져 있었습니다. 숟가락에 올려 한 입 먹으면 저 안에서부터 아늑함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편의점에서 산 그 간편식들이 그림 동화에서 본 성대한 크리스마스 만찬처럼만 느껴졌습니다.

 

여전히 본가에 가면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은 꼭 한 입은 먹어야 만족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마트에서 과일 통조림 코너는 꼭 구경을 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편의점에서 훈제 치킨을 발견하면 꼭 남편에게 아빠가 해줬던 음식이라고 자랑을 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간편식이 마냥 근사한 차림으로 기억하는 탓에, 번잡스러운 어른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면 하나를 먹더라도 정성을 한 움큼이라도 넣어야 합니다. 파기름을 내고 라면을 끓인다든지, 두반장을 넣어 짜파게티를 만든다든지, 전분 가루를 섞어 콘옥수수를 부쳐낸다든지, 파슬리 가루를 뿌려 황도를 담아낸다든지, 올리브유와 헤이즐넛 시럽을 얹어 아이스크림을 내온다든지 말입니다.

 

조만간 간편식을 잔뜩 가지고 본가에 가야겠습니다. 어리광은 덤으로 챙겨야겠습니다.

강소산 칼럼위원(시인/서천중학교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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