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귀에 핀 해바라기꽃이 아련한 고향의 향수를 일으킨다.
그런 고향을 가져 본 적 없는 지금의 현대인들께 작품을 빌어 고향을 선물해 주고 싶다.
자연은 평안과 안식을 주기도 하고 인간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아름답게 반짝이던 바다의 어제가 오늘도 그러하리라는 예상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예측불허의 자연재해는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 작은 나비의 몸짓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인류를 위협해 온다.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자연의 파괴력 앞에 한낱 미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련 뒤에 광활한 대지의 지평선 너머의 희망 미래 용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연에서 힘을 얻어 삶을 이어온 것이다.
자연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는 것일까?
자연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동양은 이를 산수화라 부르고, 서양은 풍경화라 지칭한다.
산수와 풍경의 차이는 산수가 자연의 이상화를 요구함에 비하여, 서양의 풍경은 객관적 표현을 강조한다. 자연에 대한 시각 및 재료가 서로 달라 접근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물길 따라 산책하는 동안 산과 저수지가 만나는 시점에 한국화도 보이고 서양화도 묘하게 존재한다.
과거의 풍경화처럼 자연을 관찰하거나 관조하는 대상을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을 둘러싼 문화적인 혹은 개인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독창성이다.
지역적 특성과 현실의 감흥을 표현하고 순간을 기록하듯 실제 풍경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교정해서는 안되지만, 아름다움이나 편안함. 좋은 기운의 느낌을 담기도 한다.
개인의 개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예술은 자연을 외경의 상징으로 인식하느냐 대립의 실체로 파악하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적합한 예가 있다. 충남 서천군 문산면에 위치한 저수지 풍경 그림이다.
추석 명절 고향에 오신 황 선생님이 우리 집 전시실에 오셨다.
서울에서 스포츠 의류 사업을 한다고 하신다.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며 “요 집 바로 여기 세상에 그 집이 여기 있네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 그림 제게 주실 수 있나요?” 간절함이 묻어나는 그의 표정이다.
서울 생활 정리하고 고향에서 살고 싶어 그림 속의 집을 계약하려 했는데 아들이 팔지 못하게 하여 실제로 사지는 못한 집이라고 한다.
고향에서 살지는 못해도 고향의 그림을 걸어두고 고향을 느끼려 하는 마음은 알지만, 집에 걸어두기에는 그림이 너무 큰 것 같아 작은 크기 10호에 담아 드렸더니 자신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준다며 흡족해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단계를 지나 갤러리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자연을 불러와 미술 속으로 예술의 범위를 넓히는 나의 삶이 행복하다.
대상과 일치할 수 있는 기록을 스케치하며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도 그들이 내 안으로 찾아들기도 한다.
회화(繪畫)는 내면세계의 흐름을 캔버스로 들여오는 예술의 행위이다.